여성이여, 몸을 아는가
등록 : 2001-06-07 00:00 수정 :
크고 굵고 오래가는 남성 성기가 여자를 만족시킨다? ‘질 오르가슴’의 신화가 만들어지는 지점이다.
‘슈테른 사건’ 주역인 알리스 슈바르처(59·독일 페미니스트저널 <엠마> 편집장)가 75년에 펴낸 책 <아주 작은 차이와 그 엄청난 결과>에 등장하는 독일 여성들은 입을 모아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심지어 “좋지도 않으면서 좋은 척했다”고 고백한다. 나아가 이들은 개인적 ‘운명’들도 속속들이 털어놓았다. 원치 않은 임신과 남편의 폭력 등 고전적인 문제는 물론 교육기회의 박탈, 직장일과 가사노동의 이중부담, 집 안팎에서의 온갖 차별들을 비롯해 자기표현과 욕망의 억압이라는 탈근대적 주제에 이르기까지 자신이 겪은 일들을 가감없이 밝힌 것이다.
나이와 의식수준, 사회적 여건, 성적 정체성을 기준으로 뽑힌 15명의 주인공들은 어지간한 독일 여성의 삶을 거의 대변한다. 그러나 이들의 용감한 발언은 다시 한번 독일사회를 뒤흔들었고 여자들의 ‘발칙한’ 말을 모아 책을 낸 슈바르처는 독일의 진보적 남성들에게도 공격받는 ‘마녀’가 돼버렸다. 여자가 남자의 갈비뼈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고 따라서 여자들이 겪는 차별도 부당한 것이지만 어찌하여 침대 안에서 남성의 지위를 확인시켜주는 삽입섹스마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돼야 하는가. 그러나 남성들의 항변과 반발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은 “전적으로 옳다”는 함성을 질렀다.
25년이 흘렀지만 독일사회의 스테디셀러로 자리잡은 이 책은 스웨덴, 알제리를 거쳐 일본에서 브라질에 이르기까지 12개국 언어로 번역소개됐고 가는 곳마다 여성들에게 절절한 환영을 받았다. 최근 국내에서도 <아주 작은 차이>(이프 펴냄)라는 제목으로 출간됐다. 지구촌 여자들의 반응은 이랬다. 책에 등장한 인물 중 누구 하나는 꼭 나와 닮았다는 것. 그리스 어촌의 어부 아내나 일본 증권가의 펀드매니저, 브라질의 저임금 노동자에 이르기까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같은 팔자에 놓인 여자들이 비슷한 공감대를 이루게 된 것이다. 여자들의 개인적 ‘운명’이라는 것이 가부장사회가 유도하는 ‘보편적’ 현상일 수밖에 없다는 여성운동의 오랜 화두를 확인해주는 현상이기도 했다.
유럽 여성들이 누리는 상대적인 ‘특권’들을 생각해보면 이 책에 등장하는 사연을 먼나라 이야기쯤으로 오해할 수 있다. 그러나 페이지를 넘기다보면 경제력과 피부색, 교육의 정도와 상관없이 여자들은 사랑과 성의 문제, 남성중심사회의 폭력, 그리고 가정과 아이들문제에 대해서는 똑같은 기반 위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실제로 몇년 전 미국의 한 연구는 백인 미국 여성이 꾸는 꿈은 백인 미국 남성이 꾸는 꿈보다는 호주 원주민 여성의 꿈과 훨씬 더 닮았다는 결과를 내놓기도 했다.
70년대 초반 낙태금지조항 철폐운동으로 점화된 독일의 여성운동은 독일사회를 아주 많이 바꾸어놓았다. 생식기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최소한 교육과 직업선택에서만큼은 어떠한 차별도 당하지 않도록 법적 기반이나 관행들이 바뀌었고, 사회전체의 사고방식과 감수성도 달라졌다. 그러나 여전히 바뀌지 못한 뿌리깊은 무의식들이 있다. 슈바르처는 이 책의 한국어판 서문에서 “아주 많은 여자들은 사랑과 자유, 연민과 욕망, 가정과 직장 중 한쪽만을 택해야 하는 심각한 갈등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말한다.
30년 전 독일에 비해 훨씬 더 다양한 형태로 여성 관련 이슈들이 제기되는 한국사회를 향해 이 책은 짧고 단호하게 말한다. 생물학적으로 구별되는 아주 작은 차이가 사회적으로 엄청난 결과를 빚어서는 절대 안 된다고. 여자를 잘 모르는 남자, 그리고 누구보다 여자를 잘 안다고 자부하는 남자들이 가장 먼저 읽을 만하다.
보통여자들의 사연을 모은 1부 “내 불감증에는 이유가 있다”, 질 오르가슴의 신화와 성의 통제권을 밝힌 2부 “클리토리스의 비밀”, 행복한 가정주부 증후군 등 모성신화를 파헤친 3부 “남자보다 두배 더 일하는 여자”로 구성돼 있다.
김소희 기자
sohe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