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충처리에 고충이 많습니다”
등록 : 2001-06-07 00:00 수정 :
‘결국 나는 이 사건을 종결 처리하기로 했다. 처리결과는 해결불가, 전산코드번호 90100. 해결된 것은 없었고, 민원인은 똑같은 진정을 계속할 것이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누군가의 고충을 해결해주는 일은 쉬운 게 아니다. 그 고충이 여러 사람 ‘손때’가 묻고나서도 해결되지 못한 경우라면 더욱 그렇다. 그런 ‘악성 민원’만 죄다 모아놓은 곳이 바로 국민고충처리위원회다. 고충처리위 박동혁(42) 조사관이 최근 펴낸 수필집 <황금노파>(도서출판 띠앗 펴냄)를 읽다보면 이런 궁금증이 생긴다. ‘국민고충을 처리하는 이들의 고충은 누가 처리해줄까?’
박 조사관은 고충처리위의 터줏대감이다. 1994년 출범 당시 창립멤버였으며, 1990년 공무원 임용 직후 고충처리위의 전신인 정부합동민원실 고충처리과에서 일을 시작한 산증인이다. 그러나 이 책은 민원처리 전문서적도, 모범사례집도 아니다. 박 조사관은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얘기들 가운데 오랫동안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는 사건의 ‘서투른 묶음’에 지나지 않는다”고 뜻을 매겼다.
책 곳곳에는 민원인들의 안타까운 사연과 고충처리위 사람들의 애환, 법과 제도로는 어찌하지 못하는 우리 사회의 여러 모순이 드러난다. 거기까지가 고충처리위의 한계일까. 하지만 박 조사관은 “행정기관의 조처를 시정하고 제도를 개선하는 일이 전부는 아니다”라며 “사건 처리과정에서 공무원들의 의식을 바꿔내는 기능이 더 클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책에는 어두운 얘기만 있는 건 아니다. 터무니없는 민원으로 실소를 자아내는 사연도 많다. 그렇다고 웃을 일만은 아니다. 박 조사관은 “억지 민원은 고충처리위 사람들에게 가장 큰 고충이고, 진짜 억울한 사람들에겐 기회를 빼앗는 일”이라며 정색한다. 책제목인 ‘황금노파’도 고충처리위에서 유명한 한 억지 민원인의 별명이다.
고충처리위 사람들은 문서민원 1만5천건을 비롯해 전화·방문민원까지 한해 15만건에 이르는 민원에 파묻혀 자주 탈출을 꿈꾼다. “해당기관에 시정권고를 했는데 거부될 때 가장 맥이 풀립니다.” 그러나 박 조사관은 “국민에게 실질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 일이라고 여겨 민원부서를 지원했고 지금도 그 생각엔 변함이 없다”며 “고충처리위와 운명을 함께할 것”이라고 말했다.
안영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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