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개인 플레이’는 우리에게 즐거움을 주고 또한 한국축구를 한 단계 위로 끌어올리는 데 기여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정신적 신체적 폭력은 아직도 수많은 잠재적 ‘이영표’를 교실에서 군대에서 회사에서 죽이고 있다. 대학은 예외일까?
이영표는 갑자기 유명해진 선수다. 물론 큰 선수에게서 언제나 확인하는 것은 그뒤에 있는 수년간의 피나는 훈련과 자기와의 부단한 싸움이다. 나는 대체로 연고주의나 뇌물에 의해 승패가 결정되는 일반사회와 달리 성실한 노력이 언젠가는 결실을 맺는 스포츠의 세계에 매료된다. 물론 그 안에서도 온갖 부패, ‘빽’, ‘패거리 문화’가 판치고 있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는다. 심지어 올림픽 대표 선발전에서도 연고주의적 ‘양보의 미덕’이나 출신학교별 암투가 작용하기도 한다. 다만 상대적으로 덜 그렇다는 뜻이다. 이승엽이 TK 출신이라서, 박세리가 뇌물 공세를 해서, 송진우가 ‘회장님’이라서, 서장훈이 특정대 출신이라서 그 분야의 정상에 올랐다고 믿는 사람이 있을까? 한국 특유의 ‘음모론’에 병적으로 물든 사람을 제외한다면 말이다(혹시 몰라서, 그런 분들을 위해 미리 밝히는데 이영표는 대전대 졸업생이 아니다).
“때리면 잘한다”는 신화
최근의 어떤 인터뷰에서 ‘화려한 드리블’의 배경에 대한 질문을 받았을 때 이영표가 뭐라고 대답했을까? 고교 시절 수없이 드리블 연습을 해낸 것이 오늘의 그를 만들었다. 그러나 그 때문에 이영표는 수도 없이 감독에게 매맞았다. 왜냐하면 그건 ‘개인 플레이’에나 필요한 기술이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는 그게 좋아서 숨어서 몰래 연습할 수밖에 없었다. 겸손해보이는 그가, 세계적 수준의 어떤 선수와도 드리블 싸움에서는 자신이 있다고 단언할 수 있게 만든 배경이다. 그런데 그는 도대체 뭘 잘못해서 구타를 당해야 했는가? 그의 드리블 기술에 우리는 열광하고 있지 않은가?
우리 사회는 승리지상주의 문화가 지배한다. 이기면 천당에 가지만 지면 매도와 멸시의 대상으로 전락한다. 고교 감독의 경우, 이기면 제자들이 대학에 가고 부모의 선물도 받지만, 지면 원망의 대상이 되고 박봉의 자리마저 위태롭게 된다. 지속적인 신체적인 단련을 통해 정신적 육체적인 능력을 향상시키고 그 속에서 자기 충족적 기쁨을 누리는 스포츠 정신은 애시당초 불가능하다. 정상적인 학업, 윤리, 즐거움을 포기하고 오로지 이기기 위해서 자나깨나 군대식의 훈련을 거듭하며 무차별적인 경쟁의 노예가 된다. 개인의 사정이나 취향은 ‘팀’의 승리를 위해 절대적으로 통제된다. ‘개인 플레이’는 금기시되며 ‘이기적’인 행위로 매도된다. ‘팀’의 단합과 승리를 해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기기 위해서라면 폭력도 불사한다. 감독이 선수를, 선배가 후배를 구타하는 것은 오랜 관행이다. 경기 내용이 좋지 않을 경우 전반전이 끝나고 라커룸에서 선수가 구타당하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심지어는 프로야구에서 기혼자 선수를 감독이나 선배가 구타하는 경우도 있었다(물론 미혼자라고 때려도 된다는 얘기는 아니다).
감독들, 심지어 선수들까지 이구동성으로 동의하는 것은 폭력이 “효과가 있다”라는 점이다. 위계 상하간의 폭력이 ‘사랑의 매’로 정당화되는 문화에서 승리에 집착하는 사람들이 단기적인 처방으로 구타에 의존하는 것은 당연하다. 얼마 전 어떤 프로여자농구팀의 선수가 감독에게 맞아 고막이 찢어진 사건이 있었다. 들끓는 여론 때문에 잠시 벤치 뒤로 물러나기로 공언했던 감독이 막상 결승전에서는 선수들의 ‘자발적’ 요청으로 결국 지휘봉을 다시 잡았다. 그 팀이 졌기에 망정이지 우승했더라면 과연 어떻게 됐을까? 오히려 “거봐, 때리니까 우승했잖아” 하는 탄복이 여기저기서 터져나왔을지도 모른다. 스포츠에만 국한된 얘기가 아니다. 교실에서도 “때리면 성적이 올라간다”는 신화는 강고하다. 군대에서도 “풀어주면 금방 흐트러지고 가끔씩 때려야 군기가 바짝 든다”는 신조가 사라졌다고 믿기 힘들다. 대학교의 일부 학과에서도 선후배간의 ‘질서’와 ‘단합’을 위해 물리적 제재가 정당화된다. 인간의 영혼을 남기는 깊은 상처 여기서 우리가 읽는 것은 집단의 ‘승리’와 ‘단합’이라는 목적을 위해 폭력이 쉽게 동원하는 문화다. “어쨌든 목적지에만 가면 된다”라는 목적주의가 폭력을 정당화한다. 그 목적 달성에 개인의 소망과 재능은 종속변수다. 목적에 근접하는 ‘효율성’ 혹은 ‘효과’가 최상의 가치로 여겨지기 때문에 인간의 존엄성이나 인권은 관심 밖이다. 가해자는 물론 피해자조차 수단적 폭력을 받아들이기 쉽다. 목적 달성을 통한 일시적 성공과 ‘혜택’ 가능성이 그의 눈을 멀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승리’나 ‘단합’은 과연 누구를, 무엇을 위한 것인가? 폭력에 대한 공포의 내면화는 사람으로부터 존엄성과 주체성을 빼앗아가며 영혼에 깊은 상처를 남긴다. 그것이 획일주의적 집단주의의 도구가 되어 개인의 창조적 자아실현을 막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이영표 선수는 청소년 시절에 겪은 무지한 폭력적 억압에도 불구하고 다행히 자신의 소신과 재능을 잘 지켜냈다. 그의 ‘개인 플레이’는 우리에게 즐거움을 주고 또한 한국축구를 한 단계 위로 끌어올리는 데 기여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정신적 신체적 폭력은 아직도 수많은 잠재적 ‘이영표’를 교실에서 군대에서 회사에서 죽이고 있다. 대학은 예외일까? 권혁범/ 대전대 교수·정치학

감독들, 심지어 선수들까지 이구동성으로 동의하는 것은 폭력이 “효과가 있다”라는 점이다. 위계 상하간의 폭력이 ‘사랑의 매’로 정당화되는 문화에서 승리에 집착하는 사람들이 단기적인 처방으로 구타에 의존하는 것은 당연하다. 얼마 전 어떤 프로여자농구팀의 선수가 감독에게 맞아 고막이 찢어진 사건이 있었다. 들끓는 여론 때문에 잠시 벤치 뒤로 물러나기로 공언했던 감독이 막상 결승전에서는 선수들의 ‘자발적’ 요청으로 결국 지휘봉을 다시 잡았다. 그 팀이 졌기에 망정이지 우승했더라면 과연 어떻게 됐을까? 오히려 “거봐, 때리니까 우승했잖아” 하는 탄복이 여기저기서 터져나왔을지도 모른다. 스포츠에만 국한된 얘기가 아니다. 교실에서도 “때리면 성적이 올라간다”는 신화는 강고하다. 군대에서도 “풀어주면 금방 흐트러지고 가끔씩 때려야 군기가 바짝 든다”는 신조가 사라졌다고 믿기 힘들다. 대학교의 일부 학과에서도 선후배간의 ‘질서’와 ‘단합’을 위해 물리적 제재가 정당화된다. 인간의 영혼을 남기는 깊은 상처 여기서 우리가 읽는 것은 집단의 ‘승리’와 ‘단합’이라는 목적을 위해 폭력이 쉽게 동원하는 문화다. “어쨌든 목적지에만 가면 된다”라는 목적주의가 폭력을 정당화한다. 그 목적 달성에 개인의 소망과 재능은 종속변수다. 목적에 근접하는 ‘효율성’ 혹은 ‘효과’가 최상의 가치로 여겨지기 때문에 인간의 존엄성이나 인권은 관심 밖이다. 가해자는 물론 피해자조차 수단적 폭력을 받아들이기 쉽다. 목적 달성을 통한 일시적 성공과 ‘혜택’ 가능성이 그의 눈을 멀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승리’나 ‘단합’은 과연 누구를, 무엇을 위한 것인가? 폭력에 대한 공포의 내면화는 사람으로부터 존엄성과 주체성을 빼앗아가며 영혼에 깊은 상처를 남긴다. 그것이 획일주의적 집단주의의 도구가 되어 개인의 창조적 자아실현을 막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이영표 선수는 청소년 시절에 겪은 무지한 폭력적 억압에도 불구하고 다행히 자신의 소신과 재능을 잘 지켜냈다. 그의 ‘개인 플레이’는 우리에게 즐거움을 주고 또한 한국축구를 한 단계 위로 끌어올리는 데 기여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정신적 신체적 폭력은 아직도 수많은 잠재적 ‘이영표’를 교실에서 군대에서 회사에서 죽이고 있다. 대학은 예외일까? 권혁범/ 대전대 교수·정치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