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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우리 남장이라도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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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1-05-29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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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추는 게 세상에서 가장 즐거운 댄싱퀸들, 왜 들러리에 만족해야 하는가

사진/ 덕성여고 댄스팀 E&G. 편견을 극복하고 여성댄스팀으로 성공할 것이라고 다짐한다.
“이것 좀 봐 하! 나를 조금 봐 하! 내가 즐거워 보이지 않니.”

속사포처럼 빠른 랩이 쏟아지고 있었다. 랩에 맞춰 헐렁한 힙합바지가 춤춘다. 손끝은 리듬을 타고 흐른다. 헝클어진 머리카락마저 리듬에 취해 흔들린다. 비트가 빨라질수록 티셔츠는 점점 더 땀으로 젖어갔다.

“세상이 박자를 맞춰주지 않는다”


5월23일 오후 8시30분. 경기도 부천시 4층 건물의 지하연습실은 춤의 열기로 후끈했다. 네평 남짓의 연습실을 가득 메우던 음악이 끝나자 모두 플로어에 털썩 주저앉았다. 널브러진 남자들 사이로 두 여성이 끼어 있었다. 검은색 바지에 뾰족한 구두가 인상적인 성현진(20)씨와 기다란 속눈썹을 휘날리며 춤에 열중하던 서은혜(19)씨다. 이들은 쇼핑몰 무대에 주로 서는 혼성댄스그룹 ‘노아의 아이들’의 여성멤버들이다. 한치의 오차도 없이 남자들과 호흡을 맞추느라 힘이 든 듯 유난히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서은혜(19)씨는 “춤추는 게 세상에서 제일 즐겁고 자신있는” 여고생이다. 중학교 시절, 댄스그룹을 하던 한살 터울의 오빠를 졸라 춤을 배우기 시작했다. ‘노아의 아이들’에 들어온 지도 벌써 3년째. 하지만 아직도 가족들의 반대에 시달린다. 오빠도 댄스그룹멤버로 활동하고 있지만 집안의 반대는 유독 그에게 집중돼 있다. “오빠는 괜찮은데 나는 왜 안 되느냐?”고 울면서 매달려보기도 했다. 하지만 언제나 “빨리 취직해 돈벌어서 시집이나 가라”는 완강한 반대만이 돌아왔다. 집안의 반대는 비단 서씨만의 고충이 아니다. 올 2월에 ‘노아의 아이들’에 들어온 여성멤버 한명은 집안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혀 결국 춤을 그만둬야 했다.

겉보기에 얼핏 화려해보이는 소녀들의 유쾌한 댄스를 가로막는 장벽들은 곳곳에 널려 있다. 우선 “여자가 무슨 춤이냐, 집안 망신이다”라는 편견이 소녀들의 발목을 잡는다. 어렵사리 집안의 반대를 물리친다 해도 즐거운 댄스가 시작되는 것은 아니다. 그 다음 장벽으로는 “여자는 안 된다”는 춤판 내부의 편견이 남아 있다. 성현진씨는 “춤추고 싶지만 세상은 박자를 맞춰주지 않는다”는 말로 여성댄서들의 고충을 요약했다.

다음날 오후 4시 종로구 안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여성댄스그룹 ‘Key’의 멤버 강정숙(18)씨는 흘러나오는 노래에 맞춰 연신 손동작을 계속했다. 노래만 들려오면 어깨를 들썩이는 그이지만 지금은 춤을 포기할 위기에 놓여 있다. 강씨는 지난 99년 중학교 동기 5명과 여성댄스그룹 Key를 결성했다. 그해 댄스경연대회에 입상하며 쇼핑몰 무대에 설 기회를 얻었다. 여성댄스그룹으로는 드물게 쇼핑몰 무대에서 인기몰이도 했다. 이런 Key를 눈여겨본 한 남성댄스그룹의 매니저가 혼성팀을 만들자고 제안해왔다. 연예계에 진출하기 위한 발판이 필요했던 이들은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남자 5명과 Key의 여자 5명으로 이뤄진 혼성팀이 만들진 것이 지난해 5월. 하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전문 춤꾼으로 살아남기란 하늘의 별따기

사진/ 동대문의 한 쇼핑몰에서 공연하고 있는 여성댄스팀. 관객의 대부분이 소녀팬이라 이들이 무대에 설 기회가 적다.
막상 혼성댄스그룹을 만들었지만 팀 운영은 남자 위주였다. 강씨는 “춤실력은 제쳐둔 채 무조건 리더도 남자, 앞에 서는 것도 남자였다”고 목청을 높인다. 채 다섯달을 채우지 못하고 여성멤버들은 혼성그룹을 뛰쳐나왔다. 이런 문제는 구조적으로 되풀이된다. 연예계는 물론 쇼핑몰 무대조차 소녀팬이 대부분이다보니 혼성그룹에서 여성들은 언제나 들러리로 그치는 것이다. 더구나 전문 춤꾼은 남성 일색인 탓에 진로마저 막막하다. 강씨는 남녀 차별적인 춤판 풍토를 지적하며 흥분한다.

“여자가 전문 춤꾼으로 살아남기란 하늘의 별따기예요. 항상 춤동작의 빠르기나 힘이 강조되니까 그렇죠. 점점 고난도의 기술을 할수록 여자들이 불리할 수밖에 없어요. 리듬감이나 유연성 같은 여성춤의 아름다움은 무시되기 십상이에요.”

결국 Key 멤버들은 5월 말 쇼핑몰 공연을 마지막으로 해체를 결심했다. 한때 춤에 빠져 학교를 그만둘 생각까지 한 강씨지만 “아무래도 취업에 필요한 자격증 딸 궁리나 해야겠다”고 씁쓸하게 내뱉는다. 다른 멤버들의 고민도 강씨와 별반 다르지 않다.

“참고서를 사러 가야 한다”는 강씨를 뒤로 하고 종로구 안국동의 덕성여고에 들어섰다. 어스름이 짙게 깔린 오후 7시이지만 학교 한쪽에 위치한 체육관의 불은 환하게 켜져 있었다. 발을 디딜 때마다 먼지가 폴폴 날리는 체육관에서 다섯명의 소녀들이 춤에 열중하고 있었다. 덕성여고 댄스팀 ‘E&G’다. 연습을 마치고 나오는 이들의 체육복에는 군데군데 먼지가 잔뜩 묻어 있었다.

리더 강정희(18)씨는 숨을 고르며 “참 쌓인 게 많다”고 운을 뗐다. 강씨는 먼저 댄스경연대회의 불공정한 상 분배를 지적했다. 지난 2000년 10월 결성된 ‘E&G’는 댄스경연대회에서 여러 번 상을 탔다. 하지만 최고성적은 2등에 그쳤다. 강씨는 “시상자 명단에 양념처럼 여성팀을 끼워넣을 뿐 1등은 남성팀에게만 돌아간다”고 푸념한다. 반면 최근 댄스경연대회에 참가하는 여성팀은 점점 늘고 있다. 강씨는 “예전에는 댄스경연대회에 참가하면 ‘어? 여자들이네?’라고 했지만 요즘엔 ‘또 여자야?’ 할 정도로 많이 늘었다”고 전한다. 쇼핑몰에 오디션을 보러오는 댄싱팀도 여자팀이 오히려 더 많을 정도다.

여자춤꾼들은 늘어나고 있지만 춤을 배울 곳은 마땅치 않다. 일부 남자춤꾼들로부터 여자라는 이유로 가르쳐주기를 거부당하기도 한다. E&G도 이런 경험을 갖고 있다. 지난 4월 ‘E&G’는 성남의 한 남자힙합팀에 안무를 배우러 갔다. 일요일 새벽 6시에 길을 나서 두 시간이 넘어서야 성남에 도착했다. 먼길을 찾아온 그들에게 힙합팀의 리더는 “여자는 하기 어려운 동작”이라며 가르쳐주기를 거부했다. E&G 멤버 박지혜(18)씨는 “아직도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다”며 “남자춤꾼들부터 여자들에 대한 편견을 버려야 하는 것 아니냐”고 따진다. 여성들끼리 춤을 추면 따라오는 불이익이 많은데도 굳이 여성댄스팀을 고집하는 이유는 뭘까. 박씨는 여성춤의 아름다움을 강조한다.

연예계 진출과정에서도 차별

사진/ 부천의 한 연습실에서 춤에 열중하고 있는 노아의 아이들. 서은혜(앞쪽에서 세 번째)양의 어머니는 아직도 댄스팀 활동을 말린다.
“여자들이 안무를 훨씬 섬세하고 짜임새 있게 짜죠. 동작도 더 깔끔하고 익히는 속도도 빨라요. 움직이는 선의 아름다움이나 유연성은 남자들이 도저히 쫓아오지 못하는 겁니다.”

“여성댄스팀을 결코 포기하지 않겠다”고 거듭 강조하는 E&G 멤버들과 헤어져 서울 중심가의 한 쇼핑몰에 이르렀다. 벌써 무대 위에서는 남자댄서들이 현란한 춤동작을 선보이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소녀들의 아우성이 터졌다. 무대 뒤편에는 여성댄스팀 ‘어트랙션’(Attraction)의 멤버들이 긴장한 채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회색머리가 인상적인 어트랙션의 리더 김태은(20)씨는 “무대에 오를 때마다 반응이 썰렁할까봐 겁난다”고 말한다. 어렵게 오디션을 통과해도 관객의 대부분이 여성인 탓에 남자댄스팀에 비해 호응이 적은 것이다. 곁에 있던 어트랙션 멤버 조용미(19)씨는 “우리 남장이라도 할까?”라고 농담을 건넬 정도다. 홀대는 무대 위에서 계속된다. 김씨는 “남자댄싱팀은 사회자가 개인기를 시켜 띄워주지만 여자팀은 소개만 제대로 해줘도 고마울 정도”라고 푸념한다. 조씨도 “그래도 여기는 나은 편”이라며 “다른 쇼핑몰에서는 남자팀이 대여섯곡씩 할 때 여자팀은 겨우 두어곡 할 기회밖에 못 얻는다”고 거든다.

어트랙션이 무대 위에 올라간 사이 만난 여성댄스그룹 ‘환타’의 강영혜(20)씨는 연예계 진출에서도 여자춤꾼들이 차별받기는 마찬가지라고 목청을 높인다. “제가 아는 한 혼성댄스팀이 음반기획사에 들어가게 됐어요. 근데 여자멤버만 빼고 오라고 했대요. 얼굴이 안 된다고 그랬다나. 남자는 웬만큼만 외모가 되면 춤실력으로 평가받지만 여자들의 춤실력은 뒷전이에요.”

어트랙션의 리더 김태은씨는 무대에서 내려오자마자 다음 공연 준비에 들어갔다. 앞서 무대에 오른 남자댄스팀보다 호응이 적었지만 괘념치 않는 듯했다. 오히려 “힘들수록 욕심이 생긴다”고 한마디 던질 뿐이었다. “춤을 출 때면 비로소 살아 있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고 입을 모으는 여성댄서들. 세상의 그 어떤 걸림돌도 이들의 ‘춤바람’을 막지는 못한다. 누가 뭐래도 이들은 스스로에게 취한 댄싱퀸이기 때문이다.

글/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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