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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시장의 자유, 선택형인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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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9-07-08 17:12 수정 : 2009-07-10 1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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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려고 했어. 놓치지 말고 보려고 찜해둔 영화도 있었거든. 이럴 때 여러 영화를 한꺼번에 상영하는 영화관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고마운 일이야? 그런데 집 근처 상영관의 상영시간표를 보고 내가 얼마나 안이하게 살아왔는가를 깨달았지. 10개의 상영관을 가진 극장은 자유자재 변신 로봇들이 완전히 점거를 마친 상태더라고.

취향을 바꿔, 이 바보야!

시장의 자유, 선택형인 거야?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내가 특별히 별난 영화를 보려고 했던 것은 아니야. 감상 후보작으로 고려하고 있었던 것은 이주노동자와 청소년 문제를 다룬 것으로 주목받은 <반두비>와 학교를 둘러싼 여러 문제들을 공포영화라는 틀로 접근한 <여고괴담5>였어. 가물에 콩 나듯 드문드문 상영하고 있더라고. 근무가 끝나고 이 영화를 보려면 아주 늦은 시간까지 기다려야 해. 기다려서 봤냐고? 이것 봐! 나는 내일 아침에도 새벽같이 일하러 가야 한다고. 하나, 이런 투덜거림도 호사에 겨운 것이었어. 1순위로 보고 싶었던 영화 <히말라야, 바람이 머무는 곳>은 이미 상영시간표에서 사라졌더라고.

당황한 나는 상당 시간을 인터넷 검색에 투자했지. 그리고 드디어 심오한 깨우침을 얻었지. 원하는 영화를 골라볼 수 있는 도를 깨우친 거야. 비웃지 마, 이 친구야. 이건 시장경제의 가장 중요한 장점을 살리는 방안이라고. 시장의 좋은 점이 뭔가. 선택의 자유를 마음껏 누릴 수 있다는 것 아니겠어? 수요만 있다면 시장은 언제나 그것을 충족시켜준다고 배웠거든. 그게 바로 단속을 뚫고 산꼭대기에서 마늘종을 고추장에 찍어먹으며 막걸리를 마실 수 있는 ‘기적’의 비밀 아니겠어? 그러니까 내가 원하는 영화를 골라볼 수 있는 방법을 알게 됐다는 것은 드디어 이 시장이 제공하는 선택의 자유를 마음껏 누리게 됐다는 얘기라고.

첫째, “내가 필요할 땐 나를 불러줘/ 언제든지 달려갈게/ 낮에도 좋아 밤에도 좋아/ 언제든지 달려갈게.” 내가 어떤 시간을 원하는지 묻지 말고 영화가 내게 언제 시간을 내줄 수 있는가를 물어라. 그리고 그 시간에 맞추어라. 그 시간이 밤 11시가 되었건 아침 9시가 되었건. 둘째, “다른 사람들이 나를 부르면/ 한참을 생각해보겠지만 / 당신이 나를 불러준다면 / 무조건 달려갈 거야.” 원하는 영화가 개봉됐다면 그 주말이 가기 전에 즉시 보라. 언제 상영관에서 사라질지 모르니까. 셋째, “태평양을 건너 대서양을 건너/ 인도양을 건너서라도/ 당신이 부르면 달려갈 거야/ 무조건 달려갈 거야.” 계속 찾아헤매다 보면 ‘특수한’ 취향을 가진 소수 관객을 위해 ‘특수한’ 영화를 상영하는 영화관을 발견할 수 있다. 다만 그 상영관은 내가 사는 곳에서 멀리 있으니 영화관까지 한두 시간쯤 걸릴 각오를 해야 한다. 이 깨우침이 그대에게 너무 복잡하다면 간단히 말해주지. 즉, 영화에 대한 무조건적인 ‘특급 사랑’을 가지면 되는 거야.

깨달음을 얻은 이가 그 다음에 할 일이 무엇이겠나? 아직 깨우침을 얻지 못한 이들에게 도를 설파하는 것이 깨달은 자의 도리라네. 뭇사람들에게 ‘선택의 자유에 이르는 길’을 설파하던 중, 한 현명한 이가 단 한마디로 일침을 놓더군. “취향을 바꿔, 이 바보야!” 시장이 너에게 변신로봇 영화를 주면 그냥 변신로봇 영화를 사랑하면 되는 거야. 대부분의 상영관에서 30분 간격으로 변신로봇 영화를 보여주고 있으니까, 넌 그냥 어느 시간에 볼까, 그것만 선택하면 만사형통이야. 변신로봇 영화도 나쁘지 않아. 단돈 8천원에 세상 시름을 잊는 2시간을 네게 줘.


고교선택제도 이런 거 아닐까

젠장. 나는 예술영화를 원한 것도 아니었어. 그냥 변신로봇 말고 다른 것을 보고 싶었을 뿐이라고. 지금까지 내가 선택한 것을 얻는 일이 늘 조금씩 어려웠던 이유를 이제야 알았지. 나는 서술형 문제를 풀고 있는 줄 알았는데 사실 내 앞에 놓인 문제는 ①②③④⑤ 다섯 개 답지 중에 하나를 고르는 선택형이었던 거야. 시장이 내게 ‘네가 원하는 것을 마음대로 고를 수 있어’라고 말할 때 너무 흥분해서 그 다음에 이어지는 속삭임을 놓친 거야. “단, 내가 주는 것을 네가 원한다는 조건하에서”라는 말을. 혹시 말이야, 2010년 입학생부터 교육 소비자들의 만족도를 높이기 위해 고교선택제를 실시한다던데 그 ‘선택’도 이런 것 아닐까?

박현희 서울 구일고 사회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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