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혈인들을 평생 따라다니는 차별의 굴레… 기지촌 벗어나 당당한 사회인으로 설 길은 없는가
떠나는 이
“떠날 겁니다. 떠나면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겁니다.”
채윤진(가명·21·여·경기도 의정부시)씨는 단호했다. “지긋지긋하다”는 게 이유였다. “아이들에게 굴레를 물려줄 수는 없다”고도 했다. 하지만 “더이상 한국인으로 살아갈 자신도 없고 그렇게 살고 싶지도 않다”고 말할 때, 그의 입술은 분명, 가늘게 떨렸다.
채씨는 혼혈인 2세다. 오목히 팬 갈색 눈에 유난히 오똑한 콧날, 계란형의 갸름한 얼굴 모양이 한눈에 그가 백인계 혼혈임을 알아보게 한다. 서구화한 미적 기준으로 볼 때 그는 분명 ‘아름답다’고 할 만한 용모를 지녔다. 하지만 그는 못내 한국을 떠나고 싶다고, 잊고 싶다고 했다. 미모로도 가리지 못할 차별의 매서운 눈길을 이젠 정말 더 견디기 힘들다고 그는 털어놓았다. “어른들은 태생이 의심스럽다며 수군거렸고, 아이들은 툭 하면 흰둥이, 마녀라며 놀려댔어요. 악의는 없더라도, 호기심 어린 눈길을 보내는 사람들도 부담스럽긴 마찬가지였고요. 사람들은 끊임없이 내게 설명을 요구합니다. 너는 왜 그렇게 다르게 생겼느냐는 겁니다.”
사실 그의 태생의 연원은 스스로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부분이다. 그의 ‘이국적’ 형질을 결정지은 유전자의 절반은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미군 외할아버지에게서 왔다. 어려서부터 혼혈로 설움을 겪던 그의 어머니는 미군 기지가 있었던 경기도 연천에서 태어났다. 3남매를 낳아 키우며 지금도 그곳에서 살고 있다. “아버지와 결혼할 때는 시댁의 반대가 너무 컸대요. 지금도 아버지쪽과는 왕래가 없어요.” 그의 가족 중에선 그래도 채씨가 제일 ‘한국적’인 용모를 가진 편이다. “오빠는 아예 눈도 녹색이고 머리도 짙은 갈색입니다. 여동생도 그렇고요.” 어렸을 땐 어머니에 대한 원망도 없지 않았다. 부모가 함께 공장일을 하며 떳떳이 자식들을 길렀지만, 주변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 “국사 시간이 제일 힘들었어요. 우리 민족은 세계 유일의 단일민족이라는 자랑은 우리에겐 치명적인 비수였습니다. 우리 같은 사람은 도대체 어디 끼어야 하는지 아무도 알려주지 않더군요.” 그는 고교 졸업 뒤 지금 서울의 한 회사에서 비서로 일하며 미국 유학을 준비중이다. 회사일이 끝나면 한 대학의 부설어학원을 다니며 영어를 배우고 있다. 동두천에서 혼혈아동 지원사업을 벌이고 있는 시민단체 새움터의 도움을 받아, 오는 8월까진 어떻게든 미국으로 떠날 계획이다. “어려서부터 늘 미국 가 사는 꿈을 꿔왔어요. 한국 국적을 갖고 있으면서도 한국사람으로 살 수 없는 처지, 차라리 미국에 가면 이런 차별은 없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의 남자친구는 지난 5월 먼저 미국으로 떠났다. 남자친구도 물론 백인계 혼혈 2세다. “같은 처지의 혼혈인끼리 만나는 게 더 편하고 좋아요. 이해할 수 있으니까요. 한국사람을 만나면 우리 어머니처럼 어떻게든 상처받을 수밖에 없을 겁니다.” 물론 그도 미국으로 간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리라 믿는 것은 아니다. 외모만 미국적일 뿐, 아직 서툰 영어부터 김치없이 밥을 못 먹는 식성까지 그의 내면은 온전히 한국적이기 때문이다. “제 친구 한명은 미국에 미군 아버지가 있는데도 결국 미국에 적응하지 못하고 두달 만에 돌아왔습니다. 저는 그나마 미국 국적도 없어 더욱 어려운 길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불안과 걱정에도 그의 이주 결심은 확고하기만 했다. “준 것이라곤 주민등록번호뿐”인 유구한 ‘단일민족’의 나라에서 한국인도 미국인도 아닌 혼혈인으로 살아야 하는 아슬아슬하고도 슬픈 정체성의 줄타기를 더이상 계속할 순 없다는 것이다. 떠남을 준비하는 이
“혼혈아이들을 이대로 내버려두면 결국 차별과 좌절의 역사가 되풀이될 뿐입니다. 차라리 미국으로 보내 영어라도 배울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합니다. 차별이 덜한 곳에서 마음껏 자기 재능을 펼칠 기회를 줘야 합니다.”
강영철(36·경기도 동두천시) 선교사는 기지촌 혼혈아들을 위한 독특한 지원활동을 벌이고 있다. 동두천의 한 교회 1층에 터를 빌려 지난 99년 9월 혼혈아를 위한 조그마한 학교를 열었다. 혼혈아만을 받아 처음부터 미국식으로 교육하는 외국인학교다. 현재 유치원과 초등학교 과정에서 5개 반, 모두 42명의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앞으로 아이들이 크면 중학교 과정까지 개설할 예정이다. 수업은 모두 영어로 진행되며, 한 학기 한국사를 가르치는 것을 빼곤 미국의 교과를 그대로 따르고 있다. 수업료는 편모 가정의 경우 매달 3만원을, 아버지가 있는 가정은 10만원을 받는다. 교사는 모두 8명으로, 선교사가 3명이고 자원봉사를 하는 이들이 5명이다.
이 학교는 한국 교육당국의 인정을 받지 못한 무인가 학교다. 따라서 이 학교에 아이들을 보내는 부모들은 엄밀히 따지자면, 교육의 의무를 어기는 불법을 저지르는 셈이 된다. 학교 개설 초기 교육청에서 이 때문에 몇번 실태조사까지 나왔다. 하지만 별다른 조처는 아직 없다고 했다. “오히려 잘해보라고 하더군요. 그분들도 기존 혼혈아 교육의 문제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우리 활동을 반대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이 학교 아이들은 대신 미국 학력을 인정받는다. 중학교를 마치면 미국 고등학교로 유학을 가거나 국내 외국인고교로 진학하게 된다.
이 학교를 연 것은 2년 전이지만 강 선교사는 지난 93년 미국 성결교회 선교사로 한국에 정착하면서부터 이런 식의 ‘대안학교’를 구상해왔다. 그 자신 흑인계 혼혈로, 13살 때 미국으로 이주했던 강 선교사는 한국 혼혈아문제의 현실적 대안을 교육에서 찾고 있다. “혼혈아들이 일반 학교에서 섞여 교육을 받아도 한국사회 일원으로 진입할 수가 없는 실정입니다. 학교를 다니며 주위의 놀림과 차별에 삐뚤어지기 쉽고 설사 학교를 무사히 마쳤더라도 취업 등에선 늘 배제됩니다.”
그런 혼혈아들에게 그가 무기로 쥐어주고 싶은 것이 바로 영어다. “영어는 혼혈아들이 한국사회의 당당한 구성원으로 자리잡는 데 든든한 밑천이 될 수 있습니다. 혼혈아들은 이국적인 용모 탓에 취업 등에서 배제되지만 반면 영어만 잘한다면 충분히 사회적 인정을 받을 수 있습니다. 세계화 시대의 첨병이 될 수도 있고 영어강사라도 할 수 있을 것 아닙니까?”
그의 이런 결론은 한국사회의 배타성에 대한 일종의 체념에서 비롯된 것이다. “사회적 인식을 바꿔나가는 노력도 물론 기울여야겠지만 그것은 너무도 더뎌 보입니다. 차라리 그나마 혼혈인들에게 열린 사회적 틈새에 아이들을 적응시키는 것이 더 효과적일 겁니다.” 가장 좋은 것은 혼혈아들에 대한 차별없이 한국사회에 똑같이 어울려 사는 일이겠지만 혼혈인들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바꾸기 어렵다면, 당장 써먹을 수 있는 영어교육에 어려서부터 전념할 수 있게 해줘야 한다는 주장인 셈이다. 강 선교사는 “혼혈아를 미군의 사생아, 매춘 결과 등으로 바라보는 부정적 인식은 학교라고 다르지 않다”며 “이 때문에 한국 학교에 다니는 혼혈아들은 스스로에 대한 긍정적 정체성을 확립하기는커녕 남과 다른 자신의 용모와 가족들에 대해 원망을 품게 되기 일쑤”라고 지적했다. 소수자에 대해 배타적인 우리 사회 현실을 혼혈아들이 헤쳐가려면 영어라는 무기의 힘이라도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학교 학생들의 절반은 미국 국적을 갖고 있지만 나머지 절반은 한국 국적자이다. 그렇지만 혼혈아가 겪는 어려움이 국적에 따라 갈리는 것은 결코 아니라고 그는 말한다. 미국 국적을 가진 아이들도 아버지와 어머니가 함께 살지 않을 경우엔 혼혈아로서의 문제를 똑같이 경험하게 된다는 것이다. “아이가 미국 국적자라도 어머니는 함께 미국으로 갈 수 없기 때문에 결국 아버지 도움없이는 그 아이도 한국에서 자라야 한다. 한국사회의 부정적 시선에서 그 아이들도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강 선교사는 “결국 자긍심을 갖고 사회에 진입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교육체계는 모든 한국의 혼혈아들에게 똑같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더욱 슬픈 이름… 흑인계 여성혼혈
“힘들 때도 많았어요. 하지만, 늘 당당히 맞섰습니다.” 흑인계 혼혈 가수 소냐(21)는 혼혈아의 ‘아픔’을 딛고 서 탁월한 가창력을 인정받고 있다. 직업군인이던 아버지는 그가 태어나던 80년 여섯살 많은 오빠만을 데리고 미국으로 떠났다. 한국에 남은 어머니마저 8살 때 유방암으로 돌아가고 난 뒤 그는 경북 김천의 외할머니댁에 맡겨졌다. 이름은 손희, 옆집 아저씨를 따 김씨로 성을 삼았다.
“김천에선 제가 유일한 혼혈아였습니다. 학교에 가면 아이들이 많이 놀려 싸움도 자주 했습니다.” 중학교 때 한번은 옆반 친구가 세계사 책을 빌려갔다. 돌려받은 책을 펼치니 인도의 성인 간디 사진 밑에 손희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당장 찾아가 싸움 끝에 사과를 받아냈다. “아이들과 갈등이 생길 때마다 솔직하게 제 마음을 털어놓고 당당하게 대처했습니다. 바깥 시선에 지지 않겠다고 수도 없이 다짐했습니다. 덕분에 나중엔 아이들과 잘 어울리게 됐고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지금은 검은 살결이 오히려 가수로서의 개성을 살리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며 “혼혈이라는 점에 결코 위축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소냐는 가수로서의 자신의 재질을 발휘해 성공적으로 인생을 개척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대다수 혼혈아들에게 소냐식의 성공스토리는 여전히 먼 얘기인 것만도 분명한 현실이다. 특히 같은 미국계 혼혈이면서도 흑인계 혼혈인들은 백인계 혼혈인들보다 한층 깊은 심리적 상처를 입게 될 가능성이 크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혼혈 일반에 대한 배타적 시각에 흑인과 백인을 구별하는 인종적 편견까지 겹쳐 백인계보다 흑인계 혼혈인들에 대해 더 큰 경멸과 차별의식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실제로 국내 혼혈인들의 인종별 비중에선 백인계가 흑인계보다 3대 1 정도 더 많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미국계 혼혈인 하면 흑인계를 먼저 떠올리기 일쑤다. 펄벅재단 이경균 부장은 “나도 처음엔 흑인계가 대부분이겠거니 생각했지만 조사해보니 백인계가 훨씬 많아 놀라웠다”고 말했다. 백인계 혼혈인인 강필국(50) 한국혼혈인·입양아연합 회장은 “일반적으로 백인 혼혈에 대해서는 백인에 대한 열등감을 푸는 식으로 차별이 가해지는 반면, 흑인계 혼혈에게는 우월감을 드러내며 무시하는 식으로 대한다”며 “이 때문에 흑인계 혼혈인들도 외부의 차별적 시선을 인종적 열등의식으로 내면화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여기에 성적인 차별의식까지 더해지면서 흑인계 여성혼혈인들은 최악의 상황으로 내몰리게 된다. 이성교제와 결혼문제에서 이 점은 뚜렷해진다. “백인계 여성혼혈인도 결혼에선 장애가 있지만 이성교제에선 오히려 인기가 있고 결혼도 흑인계 여성보다는 훨씬 나은 편이다. 흑인계 남성들도 한국여성을 만나 사는 데는 큰 문제가 없다. 하지만 흑인계 여성들은 거의 절망적인 상황이다. 가수 인순이처럼 한국남자 만나 사는 건 참 쉽지 않은 일이다.”(강영철 선교사) 이경균 부장은 “백인계 아이들은 용모에 대해 일부 자신감도 갖는다”며 “하지만 흑인계 여자아이들은 어려서부터 자신감을 잃고 지내 보기에도 안쓰러울 때가 많다”고 말했다. “아이들을 만날 때 보면 손으로 얼굴을 가리거나 시선을 외면하는 등 극도로 위축된 반응을 보이는 경우는 대부분 흑인계 아이들이고, 한국인 상대를 찾지 못해 결국 기지촌에서 미군 상대로 어머니 직업을 대물림하는 2세들도 대부분 흑인계 여성”이라고 그는 덧붙였다.
혼혈… 차별받지 않을 권리를 위해
“2천명쯤 되는 혼혈인들조차 포용하지 못하는 사회를 어떻게 건강한 사회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새움터 김주영 사무국장은 “90% 넘는 혼혈인들이 ‘나는 미국인이다’라거나 ‘혼란스럽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며 “분명 우리 땅에서 태어났고, 우리 핏줄을 타고 난 사람들에게 안식처가 되지 못하는 현실은 우려할 만하다”고 지적했다.
혼혈인들의 흔들리는 정체성은 곧 혼혈인들에 대한 차별과 부정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때, 이 문제를 풀기 위한 출발점은 차별과 부정의 근원을 따져보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김 국장은 “혼혈인들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기지촌이라는 환경적 특성을 이해해야만 한다”고 말했다. “혼혈아문제는 폐쇄적으로 살아온 우리의 문화적 특성 때문에 비롯된 것이기도 하지만 주요하게는 기지촌문화의 산물에서 온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사실 대부분의 혼혈아에게는 미군에 의한 강간과 매춘의 결과물이란 윤리적 낙인이 찍혀 있다. 정상적인 국제결혼을 통해 태어난 혼혈들조차도 기지촌의 음울하고 부정적인 이미지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또 상당수의 혼혈아들은 고아이거나 편모 슬하에서 자라나는 실정이다. 2001년 펄벅재단 실태조사 결과 일반인의 편모가정 비율이 2%인데 비해 혼혈인은 무려 43.3%에 이르렀다. 결손가정에 대한 냉랭한 시선까지 함께 가해지는 것이다.
외부의 따가운 시선 탓에 이들에겐 기지촌이야말로 가장 마음편한 장소이다. 비슷한 처지의 혼혈인들과 함께 교류하고 마음을 달랠 수 있는 유일한 곳이기 때문이다. 취업기회가 제한되는 탓에 기지촌을 벗어나선 경제적 자립이 힘든 점도 기지촌을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의 하나다. 결국 기지촌에서 태어나 기지촌을 벗어나지 못한 채 기지촌의 부정적 유산을 온몸에 안고 살아가는 악순환이 이어진다. 기지촌 바깥사람들과의 교류와 융합은 심리적, 지역적, 경제적으로 온통 가로막히게 된다. 단절과 차별은 그렇게 오래도록 이어지게 된다.
이 때문에 혼혈인문제의 풀이는 곧 기지촌문화의 탈피에서 비롯될 수 있다는 지적이 설득력을 갖는다. 김 국장은 “기지촌을 벗어나 지역사회로 들어설 수 있도록 지원이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혼혈아 어머니들이 기지촌을 떠나서도 생활할 수 있도록 다양한 경제적 재활대책이 필요하다. 또 경제적 이유로 학교를 중단하지 않도록 학자금 지원과 학교적응을 위한 적극적인 상담 등이 있어야 한다.” 강필국 회장은 “연예계와 스포츠계를 빼면 대부분의 혼혈아들이 따르고 싶은 성공적인 역할 모델이 없다”며 “대학진학과 함께 교수, 공무원 등 전문직종에 진출해 자리잡을 수 있도록 돕는 꾸준한 사회적 관심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기지촌이 아니더라도 사회적 인정을 받고 살 수 있는 길이 있음을 보여줘야 기지촌으로 고립해 들어가려는 편향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경균 부장은 “피임과 낙태 등 의료수준과 의식이 높아져 미군과의 사이에서 나는 혼혈1세는 연간 10명 안팎으로 줄어들었다”며 “하지만 혼혈2세들은 계속 늘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김주영 국장은 “혼혈인들이 워낙 소수화해 사회적으로 이들의 문제를 쟁점화하는 것도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아무리 그 수가 적다고 해도 혼혈인문제는 결코 그냥 버려둠으로써 저절로 해결되고 말 문제로 치부할 수는 없는 일이다. “한 사회의 발전수준은 소외된 소수자에 대한 사회적 관심과 정부의 책임으로 판단할 수 있다”는 말은 혼혈인문제에서도 여전히 유효할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최근엔 동남아시아계 외국인노동자들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아들이 급속히 늘어나고 있다. 이들은 미국계 혼혈인과 달리 외국으로 떠나보내 해결할 수도 없는 처지다.
손원제 기자 wonje@hani.co.kr

사진/ 혼혈아들은 가족에게도 환영받지 못한다. 경기도 파주의 한 고아원에 맡겨진 흑인계혼혈아.(이정용 기자)
사실 그의 태생의 연원은 스스로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부분이다. 그의 ‘이국적’ 형질을 결정지은 유전자의 절반은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미군 외할아버지에게서 왔다. 어려서부터 혼혈로 설움을 겪던 그의 어머니는 미군 기지가 있었던 경기도 연천에서 태어났다. 3남매를 낳아 키우며 지금도 그곳에서 살고 있다. “아버지와 결혼할 때는 시댁의 반대가 너무 컸대요. 지금도 아버지쪽과는 왕래가 없어요.” 그의 가족 중에선 그래도 채씨가 제일 ‘한국적’인 용모를 가진 편이다. “오빠는 아예 눈도 녹색이고 머리도 짙은 갈색입니다. 여동생도 그렇고요.” 어렸을 땐 어머니에 대한 원망도 없지 않았다. 부모가 함께 공장일을 하며 떳떳이 자식들을 길렀지만, 주변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 “국사 시간이 제일 힘들었어요. 우리 민족은 세계 유일의 단일민족이라는 자랑은 우리에겐 치명적인 비수였습니다. 우리 같은 사람은 도대체 어디 끼어야 하는지 아무도 알려주지 않더군요.” 그는 고교 졸업 뒤 지금 서울의 한 회사에서 비서로 일하며 미국 유학을 준비중이다. 회사일이 끝나면 한 대학의 부설어학원을 다니며 영어를 배우고 있다. 동두천에서 혼혈아동 지원사업을 벌이고 있는 시민단체 새움터의 도움을 받아, 오는 8월까진 어떻게든 미국으로 떠날 계획이다. “어려서부터 늘 미국 가 사는 꿈을 꿔왔어요. 한국 국적을 갖고 있으면서도 한국사람으로 살 수 없는 처지, 차라리 미국에 가면 이런 차별은 없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의 남자친구는 지난 5월 먼저 미국으로 떠났다. 남자친구도 물론 백인계 혼혈 2세다. “같은 처지의 혼혈인끼리 만나는 게 더 편하고 좋아요. 이해할 수 있으니까요. 한국사람을 만나면 우리 어머니처럼 어떻게든 상처받을 수밖에 없을 겁니다.” 물론 그도 미국으로 간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리라 믿는 것은 아니다. 외모만 미국적일 뿐, 아직 서툰 영어부터 김치없이 밥을 못 먹는 식성까지 그의 내면은 온전히 한국적이기 때문이다. “제 친구 한명은 미국에 미군 아버지가 있는데도 결국 미국에 적응하지 못하고 두달 만에 돌아왔습니다. 저는 그나마 미국 국적도 없어 더욱 어려운 길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불안과 걱정에도 그의 이주 결심은 확고하기만 했다. “준 것이라곤 주민등록번호뿐”인 유구한 ‘단일민족’의 나라에서 한국인도 미국인도 아닌 혼혈인으로 살아야 하는 아슬아슬하고도 슬픈 정체성의 줄타기를 더이상 계속할 순 없다는 것이다. 떠남을 준비하는 이

사진/ 국내 혼혈인들의 모임인 한국혼혈인·입양아연합 회원들의 수련회.

사진/ 흑인계혼혈의 아픔을 딛고 선 가수 소냐.(이정용 기자)

사진/ 국제결혼이 늘고 있지만 혼혈인을 바라보는 부정적 시각은 바뀌지 않고 있다.(강창광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