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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진실게임’의 규칙

360
등록 : 2001-05-22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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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고은이 지난 연말 타계한 미당을 비판해 파문이 일고 있습니다. <창작과 비평> 여름호에서 권력의존적 속성을 질타한 것으로, 내용은 그동안의 일반적 비판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고은의 격정토로가 새삼스러운 것은 그가 미당의 추천으로 등단했고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미당의 아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무덤의 흙이 마르기도 전에…’라는 격한 반론이 나오고 있습니다. 반론은 비판 내용보다는 주로 비판 자체를 비판합니다.

나이 예순여덟인 고은이 한때 ‘또 하나의 정부(政府)’라는 헌사를 바쳤던 스승을 왜 굳이 비판했겠습니까? 그는 ‘분노보다 연민’이라고 밝혔지만, 터져나오는 진실의 말문을 참지 못해 쏟아낸 것이 아닌가 여겨집니다.

세상에는 진실을 잣대로 보면 진실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 사회는 진실한 이들이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훨씬 많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진실된 사람 가운데 진실을 말하는 사람은 드물다는 것입니다.

진실을 접어야 할 이유가 너무 많고 두텁기 때문입니다. 자신에게 돌아올 직접적 불이익도 있겠지만 친구니까, 동료니까, 사제지간이니까, 아는 사이니까, 한다리 건너 아는 사이니까, 의리 때문에, 정리 때문에, 체면 때문에….

이런 여건에서 보면 고은은 천근의 문을 열고 나왔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고은의 비판이 정당하다면 미당도 눈물 흘리지 않을 것입니다. 훠이훠이 한줌 흙으로 돌아간 넋이 무엇을 더 바라겠습니까? 미화도 폄하도 아닌 정당한 평가 외에.


가뭄에 단비 같은 소식이 하나 더 있습니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 어느 공수부대원이 5.18 당시 민간인사살 암매장 사실을 고백한 것입니다. 덕분에 21년 전 스물다섯에 죽임을 당하고도 가려졌던 애절한 사건의 실체가 드러났습니다.

하지만 아직 턱없이 부족합니다. 애가 타는 의문사진상규명부터 한국전쟁 민간인학살, 병역비리부터 기업의 부실회계까지 ‘진실게임’을 벌여야 할 일들이 너무 많습니다.

게임은 플레이어 못지않게 규칙과 관중이 중요합니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양승규 위원장은 지금 상태라면 잘못을 인정하는 사람은 조직 내부에서 매도되고 끝까지 숨긴 자는 피해갈 수 있다고 합니다. 따라서 진실을 말한 자는 용서받고 은폐한 사람은 끝까지 추적할 수 있도록 법을 바꿔야 한다고 말합니다. 군부재자 투표부정을 폭로하고 최근 내부고발연구센터를 연 이지문씨는 고발자보호를 제도화해야 한다고 역설합니다.

올바른 진실게임을 위해 시급히 정비돼야 할 규칙들 아닐까요. 이와 함께 우리가 의리와 충성이라는 미명 아래 진실을 저 아래로 봐온 군사문화의 잔재에 물들어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할 것 같습니다.

한겨레21 편집장 정영무 you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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