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실수로 보안법 사슬에 묶인 팔순노인 주인식씨… 무죄 판결에도 ‘빨갱이’ 낙인 대물림
“글쎄, 지금 와서 과연 맺힌 억울함을 풀 수 있을까 모르겄어요. 그동안 말 한마디 못하다 이제와 세상 달라지니 떠든다고 남들이 뭐라지나 않겄소?” “창피스럽다”면서도, 주인식(84·전북 전주시)씨는 슬며시 낡은 서류 한장을 꺼내보였다. 1971년 1월26일 확정된 대법원의 무죄 판결문이었다. “사건 70도 1846 반공법 위반. 피고인 주인식(공무원), 상고인 전주지방검찰청. 전주지검의 상고는 이유없기에 기각한다….”
30년 세월의 더께로 색이 바래긴 했지만 서류는 깨끗했다. 혹시라도 어디 상하지나 않을까, 장롱 속 깊이 넣어둔 채 고이 간직해온 것이다. 그것은 그가 세상에 대고 자신의 억울함을 입증해보일 수 있는 유일한 공적 근거였다. 아니, 그는 그 판결문이야말로 언제 다시 들이닥칠지 모를 공권력의 횡포에 맞서 자신을 지켜줄 수 있는 보호장치라고 생각해왔을지 모를 일이다.
칼기 납북사건 잡담이 고무·찬양으로
69년 12월26일이었다. 주씨의 생애가 강제로 어긋나고 틀어지기 시작한 날은. “전날이 크리스마스였어요. 밤에 잠도 안 오고 해서 라디오 채널을 여기저기 틀다보니 갑자기 북한방송이 나오는 겁니다. 얼마 전에 강릉에서 칼 여객기 납북사건이 있었는데, 마침 그 얘기가 나오더군요. 그 납북사건 주모자를 남한에선 채씨라고 보도하고 있었는데, 그 방송에선 유 조종사가 한 것으로 나왔어요. 그 유 조종사가 월북환영대회에서 북조선은 위대한 김일성 수령 영도하에 지상낙원이 됐는데 남조선은 부정부패해 실업자가 많다고 말하더군요.” 주씨 귀를 놀라게 한 건 남쪽 발표와 달리 북에선 납북사건 주모자를 유 조종사로 알리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당시 52살로 이리시(현 익산시) 고참 농정계장으로 재직하던 주씨는 다음날 동료 공무원들과 잡담을 나누다 우연히 이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이런 일도 있더라’며 별다른 생각없이 털어놓은 이야기였지만, 당시 한창 날카롭게 뻗어가고 있던 공안의 촉수를 자극하고 말았다. 주씨는 한 부하 공무원의 신고로 경찰에 끌려갔다. 경찰도 처음엔 큰 사건으로 생각하는 것 같지 않았다. “정보계장이 ‘최선을 다해 돕도록 하겠다’고 하더군요. 정보과장도 ‘곧 집에 보내주겠다’고 했고….” 하지만 경찰의 태도는 조사 이틀 만에 돌변했다. “위에서 무슨 지시가 내려왔는지 갑자기 ‘그런 얘기 한 게 다 북한을 찬양하기 위한 것 아니냐’고 따지더군요.” 조사 태도도 험악해졌다. 애초 법원도 기각한 구속영장을 거듭 신청하는 등 주씨를 반공법으로 옭아매려는 공안당국의 의지는 확고했다. 결국 주씨는 1심에서 징역 8월과 자격정지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사석에서의 대수롭지 않은 잡담이 “북괴공산집단을 고무 찬양한” 공안사건으로 불거진 것은 당시 격변을 거듭하던 정치적 배경을 모르고서는 이해하기 힘들다. 박정희 정권이 야당의 반대를 무릅쓰고 3선개헌을 통과시킨 것이 사건 두달 전인 이 해 10월17일의 일이었다. 이에 앞서 67년 동백림사건이 터져나왔고, 68년 1·21사태와 푸에블로호 피랍, ‘위장간첩’ 이수근 사형(69년 7월3일) 등으로 남북관계도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박정희 정권은 71년 대통령선거와 72년 유신체제로의 전환을 준비하며 국민들의 반공이데올로기를 끊임없이 자극하고 있었다. 막걸리 한잔에 얼큰해져 박정희를 욕했다가 반공법에 걸려 치도곤을 치러야 했던, 이른바 ‘막걸리보안법’ 위반자들이 쏟아져나오던 때였다. 반골 성향 지녀 일찍부터 수난
주씨는 평소 꼬장꼬장한 공무원으로 박정희 정권의 독재적 행태에 비판적이었던 자신의 모습도 사건 조작에 한 원인이 됐던 것으로 믿고 있다. “박정희 독재를 안 좋아했어요. 장기집권 획책하고 있다고 입바른 소리도 자주 하곤 했고요. 3선개헌 때도 전 공무원을 동원해 찬성 독려했지만, 아예 나는 빼놓더군요.” 주씨는 “경찰에서도 각종 조사를 하면서 이승만과 김구 중 누구를 존경하느냐고 하기에 ‘나는 이승만을 반대하고 김구 선생을 존경한다’고 떳떳하게 답변했다”고 말했다. 일제하인 39년 면서기자격시험을 봐 공무원에 들어섰던 주씨는 해방 직후엔 전평의 총파업에 참여했다 파면되는 등 일찍부터 ‘반골’ 성향이 다분했다고 한다. “일본 메이지대학을 나온 장형도 건준에 참여하는 등 주변에 민족주의 성향이 센 분들이 많아 나도 영향을 받았던 모양입니다.”
파면 뒤 다시 농림부 산하 귀속농지관리부에 들어갔던 주씨는 이후 전북도청을 거쳐 이리시청 공무원으로 일하게 됐다. 사회계와 농사계에 3년여 있었던 것을 빼면, 주로 농정계에서 근무했다. 해방 직후 농지개혁을 통해 유상분배된 농지의 부채 상환업무를 담당했지만, 단 한번도 뇌물이나 상납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주씨의 부인 최막내(82)씨는 “몇번 고기 선물이 들어온 적이 있었지만, 돌려주라고 호통쳐 도로 보낸 적도 많다”며 “그렇게 살았으니, 주변 상관이나 동료들도 좋아하지만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반공법 올가미에 걸려 고통받던 그를 더욱 괴롭게 한 것은 도청과 시청의 거듭된 사표 강요였다. 도청 공무원이던 처조카까지 나서 사표를 써야 한다고 했다. “‘이대로 있으면 파면된다, 그러면 퇴직금도 못 받는다’고 하더군요. 판사로 있던 집안 조카는 ‘왜 그런 일로 사표를 내느냐’며 반대했지만 더 견디지 못했어요.” 결국 70년 3월10일 그는 사표를 내고 말았다. 그리고 곧바로 3월26일 1심 유죄선고를 받았다.
그뒤 1년여에 걸친 법정투쟁 끝에 2심과 3심에서 “단순한 말실수”였다며 무죄를 선고받긴 했지만, 한번 낸 사표는 끝내 돌이킬 수 없었다. 직장을 잃자 당장 먹고사는 문제가 들이닥쳤다. 직업소개소를 하려고 신청서를 냈지만 신원조회에 걸렸다. “결국 집사람이 보험일 해서 겨우겨우 먹고살았습니다. 애들 대학도 못 보내고.” 반공법의 망령은 세대를 넘어 아들에게까지 그림자를 드리웠다. 80년 광주항쟁 직후 그의 아들은 영문도 모른 채 경찰서에 불려가 “빨갱이 아들”이라며 곤욕을 치렀다. 반공법 이력은 무죄 판결로도 씻을 수 없는 가족 전체의 낙인이 돼 있었던 것이다.
반강제 퇴직의 불명예를 씻고 싶다
그렇게 30년이 흘렀다. 주씨가 가슴에 묻으려 했던 이야기를 새삼 풀어놓게 된 것은 얼마 전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후배를 만나면서다. 바로 익산시 지방자치연구소 황세연 대표였다. 황 대표는 80년 광주항쟁의 진상을 알리는 유인물을 나눠주다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고, 근무하던 이리시청에서 의원면직됐다. 황 대표는 그뒤 사회과학출판사인 중원문화와 청사 등을 운영하면서 직접 철학책을 쓰고 사회운동에 참여해왔다. 그는 “올 초 친구에게서 주 선생님 얘기를 듣고 나와 너무 비슷한 처지에 놀랍기만 했다”며 “돌아가시기 전에 꼭 억울함을 풀어드려야겠다고 마음먹었다”고 말했다.
“이제 와 될 일이냐”며 망설이던 주씨도 황 대표의 설득에 마음을 움직였다. 그는 황 대표의 도움을 받아 지난 5월7일 청와대 게시판에 복직과 정년퇴직 인정 등 명예회복을 청원하는 진정서를 올렸다. 익산시와 민주화운동보상위원회 등에도 억울함을 호소할 계획이다. “이 사건은 독재정권이 전가의 보도로 휘둘렀던 반공법이 어떻게 한 사람의 인생을 황폐화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황 대표는 “김대중 대통령은 어디선가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사회를 만들겠다고 말한 적이 있다. 독재의 철권에 상처받은 여든넷 노인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것이야말로 정의를 실현하는 첫걸음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익산= 손원제 기자 wonje@hani.co.kr

사진/ 이제라도 반공법의 망령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주인식씨가 비슷한 사연으로 명예회복에 나선 황세연(오른쪽)씨를 만났다.
69년 12월26일이었다. 주씨의 생애가 강제로 어긋나고 틀어지기 시작한 날은. “전날이 크리스마스였어요. 밤에 잠도 안 오고 해서 라디오 채널을 여기저기 틀다보니 갑자기 북한방송이 나오는 겁니다. 얼마 전에 강릉에서 칼 여객기 납북사건이 있었는데, 마침 그 얘기가 나오더군요. 그 납북사건 주모자를 남한에선 채씨라고 보도하고 있었는데, 그 방송에선 유 조종사가 한 것으로 나왔어요. 그 유 조종사가 월북환영대회에서 북조선은 위대한 김일성 수령 영도하에 지상낙원이 됐는데 남조선은 부정부패해 실업자가 많다고 말하더군요.” 주씨 귀를 놀라게 한 건 남쪽 발표와 달리 북에선 납북사건 주모자를 유 조종사로 알리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당시 52살로 이리시(현 익산시) 고참 농정계장으로 재직하던 주씨는 다음날 동료 공무원들과 잡담을 나누다 우연히 이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이런 일도 있더라’며 별다른 생각없이 털어놓은 이야기였지만, 당시 한창 날카롭게 뻗어가고 있던 공안의 촉수를 자극하고 말았다. 주씨는 한 부하 공무원의 신고로 경찰에 끌려갔다. 경찰도 처음엔 큰 사건으로 생각하는 것 같지 않았다. “정보계장이 ‘최선을 다해 돕도록 하겠다’고 하더군요. 정보과장도 ‘곧 집에 보내주겠다’고 했고….” 하지만 경찰의 태도는 조사 이틀 만에 돌변했다. “위에서 무슨 지시가 내려왔는지 갑자기 ‘그런 얘기 한 게 다 북한을 찬양하기 위한 것 아니냐’고 따지더군요.” 조사 태도도 험악해졌다. 애초 법원도 기각한 구속영장을 거듭 신청하는 등 주씨를 반공법으로 옭아매려는 공안당국의 의지는 확고했다. 결국 주씨는 1심에서 징역 8월과 자격정지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사석에서의 대수롭지 않은 잡담이 “북괴공산집단을 고무 찬양한” 공안사건으로 불거진 것은 당시 격변을 거듭하던 정치적 배경을 모르고서는 이해하기 힘들다. 박정희 정권이 야당의 반대를 무릅쓰고 3선개헌을 통과시킨 것이 사건 두달 전인 이 해 10월17일의 일이었다. 이에 앞서 67년 동백림사건이 터져나왔고, 68년 1·21사태와 푸에블로호 피랍, ‘위장간첩’ 이수근 사형(69년 7월3일) 등으로 남북관계도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박정희 정권은 71년 대통령선거와 72년 유신체제로의 전환을 준비하며 국민들의 반공이데올로기를 끊임없이 자극하고 있었다. 막걸리 한잔에 얼큰해져 박정희를 욕했다가 반공법에 걸려 치도곤을 치러야 했던, 이른바 ‘막걸리보안법’ 위반자들이 쏟아져나오던 때였다. 반골 성향 지녀 일찍부터 수난

사진/ 30여년 동안 맺힌 억울함을 풀려는 주인식씨. 그는 단순 말실수로 시청 공무원의 자리에서 불명예 퇴직을 당해야 했다(왼쪽). 오른쪽은 젊은 시절의 주인식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