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계 안되는 돈 받으며 악전고투하는 영화판 스태프…표준계약서 도입해 최소한의 처우 보장해야
지난 4월25일 대종상영화제 시상식이 열린 서울 광화문의 세종문화회관 앞. 붉은 카펫을 밟고 행사장으로 들어가는 스타들을 향해 고정된 카메라 수백개의 시선 바깥에는 작은 시위 현장이 있었다. ‘40억 영화에 연봉은 200만원’, ‘제작자=반칙왕’, ‘표준계약제 실시하라’라고 적은 피켓을 든 22명의 시위대가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채 침묵시위를 벌이는 중이었다. 잠시 연출부에서 일하다 97년부터 시나리오 작업을 해온 강성진(28·가명)씨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5년동안 번돈 220만원”
“5년 동안 영화판에서 일하며 번돈이 220만원입니다. 지난해에는 한 영화사의 준비작품을 6개월 동안 각색하다가 몸이 아파서 포기하게 됐습니다. 그동안 회사에서 받은 돈이라고는 그만둘 때 약값하라며 찔러준 20만원이 전부입니다.” 그가 썼던 초고와 여러 개의 수정본들은 아무런 양도합의도 없이 다른 시나리오 작가에게 넘어갔다. 최근 그가 확인한 새로운 수정본에는 주인공 이름과 몇몇 상황을 제외한 이야기들이 완전히 바뀌었다. “그때 작업했던 제작사의 선배가 얼마 전에 다른 영화사를 소개시켜주며 태연하게 ‘너도 이제 돈 좀 받고 일해야지’라고 말하더군요. 견디기 힘든 모욕감을 느꼈습니다.”
강씨는 충무로에서 결코 유난히 운이 없었던 영화인 가운데 하나가 아니다. 이른바 ‘한국영화 르네상스’시대에 1년에 채 100만원도 못 버는 수만명의 스태프 가운데 한명일 뿐이다. 연극영화과를 졸업하면서 촬영부에 뛰어든 지 올해로 6년차인 곽영민(30)씨가 100만원대의 연봉을 벗어난 것도 최근 일이다. “98년에 서울로 올라오면서 월세 20만원짜리 자취방을 구했어요. 방세쯤이야 제가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죠. 그해 내내 두 작품을 하면서 90만원을 벌었습니다. 1년 반 뒤에 주인집 아주머니가 보증금 500만원 가운데 50만원을 돌려주면서 나가라고 말씀하시더군요.” 지난해부터 촬영부 수석이 된 곽씨는 작품당 계약금액이 500만원으로 ‘껑충’ 뛰었다. 1년에 두 작품 하기가 힘든 현실에서 그의 연봉은 여전히 최저임금에도 못 미치지만 그나마 좋은 촬영팀을 만나서 후하게 대접받는 것이라고 동료들의 부러움을 받는 처지다. 최근 들어 100만명 이상을 동원하는 흥행작들이 심심치 않게 등장하고, 제작비 40억원이 넘는 대작영화들이 한해에도 여러 편 만들어지고 있다. 그러나 스태프들의 처우는 여전히 영화후진국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특히나 ‘한국영화 전성시대’, ‘뭉칫돈 영화로 몰린다’라는 제목의 기사가 연일 신문의 영화면을 메우는 요즘 스태프들이 느끼는 박탈감과 분노의 목소리가 높아지는 건 당연한 일이다. 지난 3월 중순 작가 강씨와 동료들이 인터넷 다음 카페에 개설한 ‘비둘기 둥지’(http://cafe.daum.net/vidulgi/)에는 한달 반 동안 연출, 촬영, 조명 등 다양한 분야의 스태프와 연기자들까지 320명이 넘는 젊은 영화인들이 회원등록을 했다. 이들은 단지 영화를 사랑한 “죄”로 생존권도 보장되지 못하는 ‘노비문서’를 강요하는 현실을 성토한다. “영화판에는 박봉이라는 개념도 없습니다. 4대보험이나 퇴직금이 해당되지도 않고요. 정말 영화가 좋아서 달려드는 젊은이들의 열정을 제작자들은 악용하고 있습니다. 일도 배우는데 돈까지 바라냐는 거죠.”(한 촬영보조) 그러나 이 카페에서 자신의 실명을 밝히며 문제제기를 하는 사람은 아직 많지 않다. 인맥으로 얽힌 영화판에서 “찍히면 죽는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대학졸업 뒤 미국에서 영화를 공부하고 돌아와 연출부에서 일하고 있는 박성민(29·가명)씨 역시 입봉에 대한 부담 때문에 터놓고 문제제기를 하지는 못하는 입장이다. “지난해 9개월 동안 준비하던 작품이 엎어졌습니다. 그동안 차비 한푼 받지 못했어요. 올 1월부터 지금까지 하고 있는 작품도 마찬가지고요. 제작사 이야기로는 개봉까지 2년 반에서 3년이 걸린다는데, 임금은 촬영이 결정되어야 나오는 거니까 또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거죠.” 부서별 임금 계약, 막내에겐 부스러기만
박씨처럼 연출부에서 일하는 스태프들은 다른 파트의 스태프들보다 인력관리에서 더 부당한 대우를 받는다고 비판한다. “영화가 구상되면 파이낸싱이나 구체적인 제작일정이 결정되기도 전에 마구잡이로 연출부부터 선발합니다. 프리프로덕션이라고는 하지만 상세한 계획도 듣지 못하고 불려갔다가 사무실 청소나 제작자의 개인심부름 등으로 시간낭비하기 일쑤예요.”
지금은 동시녹음팀에서 일하고 있는 한 녹음기사는 연출부로 일하다가 지쳐서 아예 전공을 바꿨다. “몇달 동안 스태프들을 놀리기 미안했는지 하루는 제작부장이 자신의 경영하던 모자공장의 재고품들을 팔아서 차비에 보태쓰라고 선심을 쓰더군요. 몇년 동안 묵고 구멍까지 난 모자들을 고속도로변에서 천원에 팔다가 정말 못할 짓이구나 하고 때려치우게 됐습니다.”
녹음기사로 일하면서도 그의 형편은 크게 나아진 게 없다. 40만원이고, 50만원이고 이른바 ‘오야지’ 마음대로 주는 임금을 그저 감사하게 받을 뿐이다. 그래서 정식감독이 되지 않는 한 이들의 수입원은 따로 있다. 방송사의 촬영보조나 에로비디오제작 현장, 때로 공사판에라도 뛰어들 수밖에 없다. 촬영 스태프의 경우 결혼비디오 촬영이나 중소기업 홍보비디오 촬영으로 생활비를 충당하는 일도 흔하다.
비둘기 둥지의 스태프들이 요구하는 건 모든 영화의 스태프들에게 적용할 수 있는 표준계약서의 제정과 그를 통한 개인별 계약이다. 영화제작에 들어갈 때 개인이 아닌 부서별로 임금을 계약하는 것은 충무로의 오랜 관행이다. 예를 들어 촬영팀을 3천만원에 계약했으면 그 반액을 촬영감독이 가져가고 나머지의 반을 1조수가, 또 나머지의 반을 2조수가 가져가는 식이다. 결국 4∼5명이 한팀인 부서에서 막내가 가져가는 것은 100만원이 채 안 된다. 이나마도 못된 ‘오야지’를 만나면 건지기 힘들 때가 많다. 최근 들어 <파이란>을 제작한 튜브엔터테인먼트 등 합리적인 시스템을 만들려는 제작사들을 중심으로 스태프 전체를 대상으로 개인별 계약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충무로 전체에서는 아직 낯선 제도다. 표준계약서가 없는 상태에서 영화의 간판급인 시나리오 작가나 감독들이 맺는 개별 계약 역시 피고용인에게 지극히 불리하다.
‘비둘기 둥지’에 올라온 한 시나리오 작가의 계약서를 보면 ‘갑(제작자)의 보충촬영 요구시 을(작가)은 별도의 보수청구 없이 이에 응하기로 한다’, ‘을은 본계약에 명시된 보수료 이외 일체의 금액 혹은 현물의 급여를 요구할 수 없다’, ‘본 영화를 제작할 수 없을 경우 을은 즉시 별도의 보수없이 본 영화를 다른 작품으로 대체하여 직책을 담당한다’ 등 권리는 없고 의무만 잔뜩 나열된 불평등한 계약내용을 담고 있다. 반면 가까운 일본의 작가계약서는 ‘작가는 제작자의 지시를 존중하고 제작자는 작가의 예술가적 주장과 의사를 존중한다’는 상호평등의 원칙을 명시하고, 저작권에 대한 작가의 권리를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보험되는 장비, 보험안되는 스태프
또한 미국이나 오스트레일리아의 경우, 시간외 수당이라는 난이 따로 마련돼 있어 노동법이 정하고 있는 시간 외의 작업이나 야근, 휴일근무를 할 때 받는 수당을 계약서에 명시하고 있는 데 비해, 우리나라에는 작품의 촬영일수만을 고려해 계약금액을 산정하고 있다. 예고없이 진행되는 밤샘촬영이나 주말촬영, 그리고 일정을 넘어가는 보충촬영이 수시로 이뤄지지만 어느 누구도 문제제기를 하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해외에서는 이미 영화제작에서 필수가 된 안전보험 가입을 안 하는 제작사도 여전히 많다. 최근 영화진흥위원회 게시판에 올린 글에서 한 스태프는 ‘크레인에 손이 끼어 한달 넘게 손가락에 깁스를 했다. 그런데 준메이저라고 할 수 있는 제작사에서는 보험을 든 게 없다고 스스로 치료비를 해결하라고 말했다. 단순 깁스 이상으로 치료비가 꽤 많이 나오는데 개런티 400만원을 쏟아부어야 할 판’이라고 분노했다. 파손이나 분실이 되면 보험처리가 되는 장비와 비교하면서 스태프들은 자신들을 “개값”이라고 표현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A급 촬영감독으로는 드물게 스태프들의 처우 개선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는 김영철 감독(<강원도의 힘> <정사> <단적비연수> <파이란> 등 촬영)은 결국 시스템의 합리화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제작시스템이 많이 합리화됐다고 하지만 아직 일단 찍고 보자는 식으로 인력과 제작비를 낭비하고 있는 게 현실”이라고 비판했다. 구체적이고 치밀한 작업계획없이 일단 팀부터 꾸려놓으면서 사람들을 묶어놓거나 중간편집 도입으로 절약할 수 있는 필름을 낭비하면서 무조건 인건비를 줄여 제작비를 줄이려는 게 제작사들의 태도라는 것이다.
스태프들의 처우 개선을 위한 표준계약서 도입에 제작자들은 원칙적으로 동의하고 있다. 그러나 고민의 양상은 다르다. 싸이더스의 차승재 부사장은 “표준계약서 도입 이전에 영화인력의 전문화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해외의 경우, 촬영보조만 20년씩 하는 전문인력이 포진해 있는 데 반해 한국 스태프들은 대체로 숙련도가 떨어진다. 이런 현실에서 만약 표준계약서를 도입하면 오히려 많은 스태프들이 도태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그러나 스태프들의 전문화와 처우문제는 어느 하나가 먼저 해결될 수 없다는 게 스태프들의 입장이다.
지난해 말 영화인협회 이사장에 당선된 유동훈씨는 “반드시 표준계약서를 성사시키겠다”고 취임사에서 강조했다. 유씨는 “개인이 제작사와 개별계약을 맺으면서 불공정한 처우를 감수하면서도 도장을 찍는 관행을 막기 위해서는 모든 개별계약을 대신할 ‘표준계약서’의 도입이 급선무”라고 말했다. 이어 자신이 회장으로 있는 시나리오작가협회를 중심으로 올해부터 표준계약서 제정을 본격적으로 추진할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열정을 악용하지 말라
그러나 아직 표준계약서는 산 넘어 산이다. 파트마다 이해관계가 조금씩 다르고, 무엇보다 이들의 목소리를 대변할 단체가 아직 없기 때문이다. 촬영감독협회, 조명감독협회 등이 있지만 젊은 스태프들의 이익을 대변하기에 이들 단체들이 그동안 받아온 불신이 너무 크다. 또한 협회와 단체에 소속된 영화인은 전체의 40%에도 미치지 못하는 상황이다. 대종상 영화제 현장시위를 주도했던 비둘기 둥지의 회원들은 아직 조직적 역량을 다지지는 못한 상태지만 개인적으로 법률적 자문을 구하거나 해외의 스태프 처우 등을 연구하는 등 좀더 적극적인 대처방안을 모색중에 있다.
“힘들지만 영화판을 떠나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아무리 고생하고 차비가 없어 집에 못 들어갈 지경이라도 영화 엔딩 타이틀에 제 이름이 나오는 걸 보면 모든 서러움이 눈녹듯 사라지지요. 그렇지만 이런 우리의 열정이 더이상 악용당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수많은 영화학과와 관련교육단체에서 쏟아져 나온 예비영화인들이 오늘도 장밋빛 꿈을 안은 채 충무로로 들어오고 있다. 그러나 그 못지않은 숫자가 열정의 대가로 상처만을 안은 채 충무로를 떠나고 있기도 하다. 떠나는 이들의 ‘근성없음’을 비난하기엔 2001년 ‘한국영화 르네상스’의 속살이 너무 부실하다.
김은형 기자 dmsgud@hani.co.kr

사진/ 대종상영화제 시상식장 앞에서 피켓 시위를 벌이고 있는 ‘비둘기 둥지’회원들. 그들이 요구하는 건 표준계약서의 제정과 그를 통한 개인별 계약이다.(정진환 기자)
강씨는 충무로에서 결코 유난히 운이 없었던 영화인 가운데 하나가 아니다. 이른바 ‘한국영화 르네상스’시대에 1년에 채 100만원도 못 버는 수만명의 스태프 가운데 한명일 뿐이다. 연극영화과를 졸업하면서 촬영부에 뛰어든 지 올해로 6년차인 곽영민(30)씨가 100만원대의 연봉을 벗어난 것도 최근 일이다. “98년에 서울로 올라오면서 월세 20만원짜리 자취방을 구했어요. 방세쯤이야 제가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죠. 그해 내내 두 작품을 하면서 90만원을 벌었습니다. 1년 반 뒤에 주인집 아주머니가 보증금 500만원 가운데 50만원을 돌려주면서 나가라고 말씀하시더군요.” 지난해부터 촬영부 수석이 된 곽씨는 작품당 계약금액이 500만원으로 ‘껑충’ 뛰었다. 1년에 두 작품 하기가 힘든 현실에서 그의 연봉은 여전히 최저임금에도 못 미치지만 그나마 좋은 촬영팀을 만나서 후하게 대접받는 것이라고 동료들의 부러움을 받는 처지다. 최근 들어 100만명 이상을 동원하는 흥행작들이 심심치 않게 등장하고, 제작비 40억원이 넘는 대작영화들이 한해에도 여러 편 만들어지고 있다. 그러나 스태프들의 처우는 여전히 영화후진국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특히나 ‘한국영화 전성시대’, ‘뭉칫돈 영화로 몰린다’라는 제목의 기사가 연일 신문의 영화면을 메우는 요즘 스태프들이 느끼는 박탈감과 분노의 목소리가 높아지는 건 당연한 일이다. 지난 3월 중순 작가 강씨와 동료들이 인터넷 다음 카페에 개설한 ‘비둘기 둥지’(http://cafe.daum.net/vidulgi/)에는 한달 반 동안 연출, 촬영, 조명 등 다양한 분야의 스태프와 연기자들까지 320명이 넘는 젊은 영화인들이 회원등록을 했다. 이들은 단지 영화를 사랑한 “죄”로 생존권도 보장되지 못하는 ‘노비문서’를 강요하는 현실을 성토한다. “영화판에는 박봉이라는 개념도 없습니다. 4대보험이나 퇴직금이 해당되지도 않고요. 정말 영화가 좋아서 달려드는 젊은이들의 열정을 제작자들은 악용하고 있습니다. 일도 배우는데 돈까지 바라냐는 거죠.”(한 촬영보조) 그러나 이 카페에서 자신의 실명을 밝히며 문제제기를 하는 사람은 아직 많지 않다. 인맥으로 얽힌 영화판에서 “찍히면 죽는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대학졸업 뒤 미국에서 영화를 공부하고 돌아와 연출부에서 일하고 있는 박성민(29·가명)씨 역시 입봉에 대한 부담 때문에 터놓고 문제제기를 하지는 못하는 입장이다. “지난해 9개월 동안 준비하던 작품이 엎어졌습니다. 그동안 차비 한푼 받지 못했어요. 올 1월부터 지금까지 하고 있는 작품도 마찬가지고요. 제작사 이야기로는 개봉까지 2년 반에서 3년이 걸린다는데, 임금은 촬영이 결정되어야 나오는 거니까 또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거죠.” 부서별 임금 계약, 막내에겐 부스러기만

사진/ <파이란>의 촬영장면. 이 작품의 촬영을 맡은 김영철 감독은 A급 촬영감독으로는 드물게 스태프들의 처우 개선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이혜정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