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묘한 경매과정 속에 손윗처남에 넘어간 박건배 해태그룹 전 회장의 이태원 자택
대문이 빼꼼이 열려 있었다. 살짝 밀치자, 대문 옆에 나란히 붙어 있는 경비초소가 눈에 들어왔다. 조경수들은 기기묘묘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고, 잔디는 깔끔하게 정돈돼 있었다. 마당과 같은 높이의, 두 벽면을 통유리로 만든 거실이 한눈에 보였다. 고급 가구며 그림들이 기풍있게 배치돼 있었다. 서울시 용산구 이태원1동 106-2번지. 박건배 전 해태그룹 회장의 집이다.
지분공유로 세금을 피해가다
박 전 회장의 집은 3월 초에 경매에 붙여졌고 유찰없이 곧바로 낙찰됐다. 4월 말 찾아본 그 집의 모습이다. 해밀턴호텔 뒤편 언덕에 널찍하게 자리잡은 이태원 외인주택가는, 오래 전부터 내로라 하는 재벌가들이 모여 사는 동네로 유명하다.
‘박 전 회장 집의 상황’을 묻자 인근 부동산업자들과 민간초소 경비원들은 대뜸 한소리씩 쏘아붙였다. 백날천날 재벌 망했다는 이야기만 쓰면 뭐 하느냐는 것. 한 부동산업자는 “기업 다 말아먹고 나랏돈 쏟아붓게 하며 망한 오너들은 지금도 떵떵거리며 산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리고 “박건배씨만 봐도 처가쪽 친척이 경매에 참여해서 그 집을 사줬다”고 귀띔했다. 대지 250평에 건평 141평, 감정가 16억5천만원인 박건배 전 회장의 집은 지난 3월7일 실시된 법원경매에서 낙찰자가 바로 결정됐다. 행정절차상 사소한 문제로 일단 낙찰불허가 상태이지만, 5월에 다시 열리는 경매에서도 1차 낙찰받은 사람에게 다시 돌아갈 확률이 절대적이라고 한다. 낙찰자는 박 전 회장 집의 땅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종류의 경매에는 같은 땅의 공유자는 우선매수권을 갖기 때문에 최저가를 ‘걸어도’ 최고가 입찰자와 동일한 조건이 된다. 그 낙찰자는 바로 박 전 회장의 손윗처남 김아무개(50)씨였다. 94년 이 집을 구입할 당시 박 전 회장은 택지 소유권의 5분의 1을 처남 앞으로 넘겼다. 등기부등본상에는 250평(824.8㎡) 중 정확하게 199.9평(659.5㎡)만이 박 전 회장의 소유로 돼 있다. 이 평수는 무척 중요하다. 당시 토지공개념이 막 도입돼 서울지역의 경우 대지 200평 이상되는 집은 종합토지세, 취득세, 등록세를 무겁게 매겼고 7%의 택지초과소유부담금도 내야 했던 때였다. 불법은 아니지만 이런 식의 지분공유는 당시 만연한 편법 재산보유 수단이었다. 또한 그 즈음에는 땅에 대한 명의변경도 기승을 부릴 때였다. 그뒤 부동산실명제가 시행되면서 편법 명의변경이 철퇴를 맞게 됐지만 살 때부터 땅의 지분을 나눠가졌다는 이유로 박 전 회장은 피해갔다. 이 사실은 이태원 일대에서 공공연한 비밀이다. 박 전 회장의 처남인 김씨쪽은 경매참가에 대해 “유리한 조건이니 싼값에 사서 비싸게 팔 수 있기 때문”이라고 이유를 설명했다. 그리고 “94년에는 세금문제 때문에 같이 사게 된 것”이라고 밝혔다. 그리고 “박 전 회장은 계속 그 집에 살고 있다”고 덧붙였다. 서울 강남의 한 부동산업자는 “경매 나온 재벌집들은 인기가 많지만, 원소유주와 특별한 관계가 있는 이에게 낙찰되도록 부동산 브로커가 개입하는 일이 많다”며 “박 전 회장의 경우에는 굳이 그럴 필요없이 여건이 맞아떨어진 셈”이라고 말했다. 그가 말하는 여건이란 박 전 회장의 처남이 땅의 공유자라는 점과, 채무자가 아니면 누구나 참가할 수 있는 공개입찰 경매제도의 허점을 뜻한다. 법원 경매제도의 허점
현행 법원경매제도의 입찰참가자격과 관련해서는 ‘채무자는 경매에 참가할 수 없다’는 규칙만 정해져 있다. 채무자가 아닌 사람이면 친인척은 물론 배우자나 자식들도 참가할 수 있도록 돼 있다. 따라서 부도에 따른 책임과 그동안 재벌기업의 경우 총수나 그 가족들이 회삿돈을 마음대로 빼돌려온 현실을 감안하면, 박 전 회장의 집 경매처분과정은 개운치 않은 뒷맛을 남긴다. 특히 박 전 회장은 그룹이 부도를 낸 뒤에도 한참 동안 경영권을 거머쥐고서 계열사 연수원 매각과정에 일부 시설가격을 부풀리는 수법으로 19억원의 비자금을 조성한 사실이 적발돼 쇠고랑을 차기도 했다.
이태원 외인주택가는 14개 외국공관을 빼고 나머지 120여채는 내국인 소유의 집들이다. 외국공관이 몰려 있다는 이유로 경찰 방범초소들이 눈에 띄게 많이 들어서 있다. 여기에다 집마다 월 16만∼25만원씩 내 공동운영하는 민간초소도 8군데나 된다. 이들 민간초소의 주업무는 순찰을 도는 거지만, 집의 하수구가 막혔다거나 할 때 곧바로 달려가 수리도 해줘야 한다. 공동초소 외에도 대부분 박 전 회장의 집처럼 마당 안에 또다시 경비초소를 두고 있다고 현지 부동산업자들은 전했다.
박 전 회장의 옆집은 김중원(53) 전 한일그룹 회장의 동생인 김중건(49)씨 집이다. 맞은편 집은 김중원 전 회장의 소유이며, 지금은 그의 어머니가 살고 있다.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이곳은 한남동이다. 한일그룹쪽 형제자매들은 이태원과 한남동 일대 5채의 집에 나눠 살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한때 재계순위 30위권 안에도 들어갔던 한일그룹이 IMF 위기국면에서 퇴출위기에 몰렸을 때 김중원 전 회장은 종업원과 채권단에게 “사재 465억원을 헌납하겠다”고 밝힌 적이 있다. 그러나 결국 그룹은 공중분해되고 채권금융기관들에는 수천억원의 손실을 안겼다. 한일그룹의 모회사인 한일합섬은 98년 6월 부도를 냈으며 이후 법정관리에 들어간 상태이다. 사재 헌납 약속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경비초소 주변에서는 “회사가 망해도 형제자매들은 멀쩡하다”는 이야기와 함께 “관리비 낼 때는 회사가 망해 돈이 없다고 발뺌한다”는 비난이 돌고 있었다.
자본주의 제도에서 기업이 망하면 대주주는 주식지분이 소각돼 경영권을 잃는 것으로 책임을 지는 게 원칙이다. 도덕적 기준으로 기업주에게 경영부실에 따른 책임을 물으면 자본주의의 근본질서가 무너진다는 게 이른바 ‘유한책임 원칙론’이다. 하지만 국내 재벌들의 부실은 경우가 근본적으로 다르다. 단지 경영상의 잘못이 아니라 대주주와 경영진들의 사기, 횡령, 배임 등 불법행위가 겹쳐 발생한 부실이 크다. 이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민·형사상 책임을 물어야 한다. 우선 1차적으로 부실기업에 돈을 꿔준 금융기관이 책임추궁에 나서야 하고, 만약 금융기관이 부실기업주에게 제대로 책임을 묻지 않으면 감독의무가 있는 정부가 독려하거나 직접 나서야 한다. 그래야 부실의 재발을 막을 수 있다.
미국에서는 80년대 저축대부조합(S&L)의 무더기 도산으로 공적자금을 투입할 때, 부실책임자에 대한 처벌이 우리로서는 상상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가혹했다. ‘금융기관 구제 및 규제강화법’이라는 특별법을 만들어 금융기관에 공적자금을 투입할 때에는 가장 먼저 부실책임자들을 가려내는 작업부터 시작했다. 93∼94년 저축대부조합 문제를 마무리할 즈음에는 부실책임자들에게 모두 90억달러에 이르는 손해배상청구소송을 냈고, 형사처벌 대상자도 1800여명에 이르렀다. 사기나 횡령과 같은 중대 범죄행위에 대해서는 최고 30년까지 감옥형을 내리는가 하면, 단지 금융기관에 끼친 손실액만큼 재산을 내놓게 하는 선에서 그치지 않고 손해배상을 끝낼 때까지 하루에 100만달러씩 벌금을 물리기도 했다.
의지만 있다면 책임추궁 가능하다
IMF 사태 이후 금융·기업 구조조정에 투입된 공적자금은 지난 3월 말 현재까지 모두 134조7천억원. 우리나라 한해 예산보다 훨씬 많은 돈이 부실청소 비용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이런 대규모 국민세금을 투입하게 만든 부실기업주와 경영진에 대한 재산환수는 사실상 거의 이뤄지지 않고 있다. 정부나 채권 금융기관 모두 적극적인 노력을 하지 않았고, 사실 의지조차 있는지 의심스러울 지경이다.
국내 시중은행들은 지난해 10월 부실기업주들에게 민·형사상 책임을 본격적으로 묻겠다며 ‘부실채권 회수를 위한 금융기관 공동협약’을 제정하고 각 은행 여신담당 임원들로 구성된 회수대책위도 구성했다. 한빛은행 불법대출 사건에서 불거진 금융권의 ‘도덕적 해이’에 대한 여론의 눈총이 따가울 때였다. 은행들은 협약제정에 따라 금융부채 규모가 100억원 이상인 부실기업을 분류해 대주주와 경영진들의 은닉재산을 철저히 조사하고, 배임과 횡령 등 형사처벌 사안에 대해서도 공동으로 법적 대응을 하겠다고 공언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대책위는 한 차례 회의를 열어 정부 건의안만 제시했을 뿐 실제 부실기업주 책임추궁 활동은 전혀 없었다.
정부는 부실책임자 처벌에 더 소극적이다. 정부 산하기관은 예금보험공사 불법대출로 금융부실을 야기한 기업주와 금융기관 임직원들의 재산은닉 실태를 조사해 지금까지 적발한 은닉 부동산이 고작 207건, 615억원어치에 불과하다. 투입된 공적자금에 견주면 그야말로 ‘새발의 피’이다. 그나마 압류나 매각 등을 통해 현금을 회수한 사례는 단 한건도 없다. 예보 관계자는 “관련 법제도의 미비 때문”이라고 해명했다. 하지만 현행 제도에서도 정부가 의지만 있다면 부실책임자들을 처벌할 수 방법이 얼마든지 있다. 문제는 의지다.
금융기관들은 재경부와 국세청, 행자부, 건교부 등 정부부처에 부실관련자들의 재산추적에 필요한 자료를 제공해주도록 기회있을 때마다 요청해왔다. 그때마다 해당 부처의 태도는 한결같다. ‘사생활 보호’를 이유로 난색을 표명하는 것이다. 참여연대를 비롯한 시민단체들이 금융감독원이나 예금보험공사 등 공적자금 관련기관들을 상대로 제기한 무수한 정보공개청구에서도 답변은 역시 ‘사생활 보호’가 주류를 이룬다. 아마 정부에게는 도둑질당한 국민혈세를 철저하게 되찾고 재발을 방지하는 일보다 기업주들의 사생활을 보호해주는 게 더 중요한 모양이다. 국민들은 공적자금을 투입하게 만든 장본인들이 어떤 처벌을 받았고 지금 어떻게 책임을 졌는지 제대로 알지 못한다.
그들은 언제까지 만사형통할 것인가
해밀턴호텔 뒤편 주택가는 서울시가 ‘자연경관지구’로 지정해 그림같이 아름다운 집들이 많다. 그중에 하나가 ㄷ그룹 전 회장의 둘쨋부인으로 알려진 ㄱ씨 소유의 집이다. 이 그룹 역시 97년 크게 부도를 냈다. 얼핏 보아 단층으로 납작하게 숨어 있지만 담너머로 보이는 마당은 숲처럼 울창하게 관리돼 있었다. 일대의 부동산 업자들은 “집은 낡았지만 마당이 좋고 전망이 빼어나 땅 크기는 박건배 전 회장 집과 비슷해도 가격은 훨씬 웃돌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이 집은 76년 ㄱ씨 소유가 된 이래 80년대 한두차례 근저당권설정이 됐던 것을 빼고는 등기부등본도 깨끗했다. ‘기업부실→금융기관 부실→국민세금 부담’이란 연결고리를 감안할 때, 부도를 낸 재벌총수의 특수관계인으로 볼 수 있는 이에게 대저택이 남아 있다는 사실은 씁쓸함을 남긴다.
부실기업주들이 영욕의 세월을 뒤로 했다는 말은 이태원의 경우에는 해당하지 않는 듯했다. 기업은 망해도 기업주는 살아남는다는 말이 실감났다. 박건배 전 해태그룹 회장 집의 초소관리인은 “이사는 하지 않았지만 회장님은 사람들 만나는 게 싫어서 다른 장소에 가 계신다”고 말했다. 이야기 도중 말끔하게 차려입은 해태그룹 비서실의 관계자가 집에서 나왔다. 그러자 관리인은 “회장님은 안 계시지만 업무 때문에 온 것 같다”고 말을 흐렸다. 박 전 회장 집의 현관에는 입춘대길, 만사형통(立春大吉, 萬事亨通)이라는 문구가 쓰인 종이가 붙어 있었다. 제2의 IMF사태를 우려할 정도로 위기감이 감돌고 가계파산으로 길거리에 나앉는 서민들이 줄을 잇는 이 봄에, 굳이 이런 부적이 없어도 만사형통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소희 기자 sohee@hani.co.kr

사진/ 이태원 외인주택가 금싸라기따에 자리한 박건배 전 해태그룹 회장의 집. 최근 경매에 부쳐졌지만 박 전 회장은 여전히 이 집에 살고 있다. 대문 안쪽에 개인 경비초소가 있을 정도로 ‘집단속’이 철저했다.(박승화 기자)
‘박 전 회장 집의 상황’을 묻자 인근 부동산업자들과 민간초소 경비원들은 대뜸 한소리씩 쏘아붙였다. 백날천날 재벌 망했다는 이야기만 쓰면 뭐 하느냐는 것. 한 부동산업자는 “기업 다 말아먹고 나랏돈 쏟아붓게 하며 망한 오너들은 지금도 떵떵거리며 산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리고 “박건배씨만 봐도 처가쪽 친척이 경매에 참여해서 그 집을 사줬다”고 귀띔했다. 대지 250평에 건평 141평, 감정가 16억5천만원인 박건배 전 회장의 집은 지난 3월7일 실시된 법원경매에서 낙찰자가 바로 결정됐다. 행정절차상 사소한 문제로 일단 낙찰불허가 상태이지만, 5월에 다시 열리는 경매에서도 1차 낙찰받은 사람에게 다시 돌아갈 확률이 절대적이라고 한다. 낙찰자는 박 전 회장 집의 땅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종류의 경매에는 같은 땅의 공유자는 우선매수권을 갖기 때문에 최저가를 ‘걸어도’ 최고가 입찰자와 동일한 조건이 된다. 그 낙찰자는 바로 박 전 회장의 손윗처남 김아무개(50)씨였다. 94년 이 집을 구입할 당시 박 전 회장은 택지 소유권의 5분의 1을 처남 앞으로 넘겼다. 등기부등본상에는 250평(824.8㎡) 중 정확하게 199.9평(659.5㎡)만이 박 전 회장의 소유로 돼 있다. 이 평수는 무척 중요하다. 당시 토지공개념이 막 도입돼 서울지역의 경우 대지 200평 이상되는 집은 종합토지세, 취득세, 등록세를 무겁게 매겼고 7%의 택지초과소유부담금도 내야 했던 때였다. 불법은 아니지만 이런 식의 지분공유는 당시 만연한 편법 재산보유 수단이었다. 또한 그 즈음에는 땅에 대한 명의변경도 기승을 부릴 때였다. 그뒤 부동산실명제가 시행되면서 편법 명의변경이 철퇴를 맞게 됐지만 살 때부터 땅의 지분을 나눠가졌다는 이유로 박 전 회장은 피해갔다. 이 사실은 이태원 일대에서 공공연한 비밀이다. 박 전 회장의 처남인 김씨쪽은 경매참가에 대해 “유리한 조건이니 싼값에 사서 비싸게 팔 수 있기 때문”이라고 이유를 설명했다. 그리고 “94년에는 세금문제 때문에 같이 사게 된 것”이라고 밝혔다. 그리고 “박 전 회장은 계속 그 집에 살고 있다”고 덧붙였다. 서울 강남의 한 부동산업자는 “경매 나온 재벌집들은 인기가 많지만, 원소유주와 특별한 관계가 있는 이에게 낙찰되도록 부동산 브로커가 개입하는 일이 많다”며 “박 전 회장의 경우에는 굳이 그럴 필요없이 여건이 맞아떨어진 셈”이라고 말했다. 그가 말하는 여건이란 박 전 회장의 처남이 땅의 공유자라는 점과, 채무자가 아니면 누구나 참가할 수 있는 공개입찰 경매제도의 허점을 뜻한다. 법원 경매제도의 허점

사진/ 박건배 전 회장은 지난해 거액의 비자금을 조성한 사실이 뒤늦게 드러나 구속되기도 했다.

사진/ 박건배 전 해태그룹 회장의 옆집인 김중원 전 한일그룹 회장 동생 김중건 씨의 집. 멀리 대문이 보이는 집은 김중원씨의 소유이다.(박승화 기자)

사진/ 97년 크게 부도를 낸 ㄷ그룹 전 회장의 둘째부인으로 알려진 ㄱ씨 소유의 대저택. 높은 담 안으로 울창한 숲과 같은 정원이 들어서 있다.(김소희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