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력과 가정폭력에 무방비로 방치된 여성장애인들… 평생 동안 약자라는 이유로 당해야 하는 고통
경기도의 한 소도시에 사는 임영희(가명·37)씨는 요즘 피가 마르는 심정이다. 청각장애가 있는 그는 시어머니와 남편, 그리고 열두살난 딸과 함께 살고 있다. 어느 날 동네 아주머니 한분이 넌지시 “자네 딸에 관해 안 좋은 소문이 돈다”는 말을 쪽지에 써서 전해왔다. 동네 상가의 나이든 입주자 한명이 임씨의 딸을 주차장으로, 뒷산으로, 상가 화장실로 끌고 다닌다는 이야기였다.
임씨의 딸은 아직 장애등급을 판정받지 않았다. 하지만 주변에서는 임씨가 임신 도중 심하게 남편에게 구타당한 뒤 조산으로 얻은 딸이라 정신지체가 된 것으로 여긴다. 성추행 사실이 동네사람들의 입질에 오르내리자 가해 남자는 위로금 명목으로 100만원을 임씨 모녀에게 내놓고 도망치듯 동네를 떠났다. 그러나 임씨는 발뻗고 잠을 잘 수가 없다. 딸에 대한 안쓰러움과 가해자에 대한 분노 이전에 ‘법보다 가까운’ 남편의 주먹이 모녀에게는 살아 있는 공포이기 때문이다. 남편은 툭하면 “병신, 너 때문에 내 인생 망쳤다”고 임씨를 때렸고, 어린 딸에게도 “바보로 살 바에야 죽어버리라”며 발길질을 하기 일쑤였다. 그래서 임씨는 동네 사람들에게 “제발 남편에게만은 알리지 말아달라”고 신신당부하고 다니는 형편이다. 문제 해결은커녕 이 사건을 빌미로 또다시 매질을 당할까 두려운 것이다.
해결 안 되는 사건 부지기수
임씨와 임씨의 딸이 겪는 일은 이 땅에서 끊임없이 벌어지는 장애여성사의 잔혹한 단면이다. 집밖에서는 성폭력에, 집안에서는 가정폭력에 무방비로 방치되는 것이다.
이 사건을 접한 장애인 전문상담원들은 “가해자가 부인하거나, 또 가해자가 특정되지 않았다면 온 마을 사람들이 집단적인 공범자 심리를 갖고 피해소녀를 ‘거짓말쟁이’나 ‘창녀’로 몰고갈 위험이 크다”고 입을 모은다. 실제로 지난해 가을 발생한 ‘김해 사건’, ‘서울 상계동 사건’에서 마을 사람들이 보인 태도는 이와 같았다.
가해자가 여러 명의 마을 남자들로 지목되자 온 마을 사람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원래 남자만 보면 실실 웃으며 따라다녔다”, “서로 좋아서 한 건 죄가 아니다”라며 피해여성에게 책임을 돌렸다. 두 사건은 피해여성이 정신지체 소녀라는 점과 가해자는 같은 동네 사람들 여러 명이고, 가해 기간이 여러 해에 걸쳐 있었다는 점도 닮았다.
정신지체 여성장애인 성폭력은 일반 성폭력과 달리 특수한 문제를 안고 있다. 피해자가 성폭력에 대한 인지능력이 낮기 때문에 오랫동안 피해를 당하다 노출되는 경우가 많고, 피해 뒤 대처능력도 떨어진다는 것이다. 뒤늦게 수사기관이나 전문가가 개입해도 해결되지 않고 묻혀버리는 사건들이 부지기수다.
지난 3월15일 부산고법에서 항소심 공판이 이뤄진 ‘부산 ㅇ목사 사건’을 보자. 이 사건은 목사가 자신의 교회에 다니는 정신지체 소녀 ㅅ(18)양과 ㅇ(19)양을 지속적으로 각각 성추행, 성폭행한 혐의로 기소된 사건이다. ㅅ양에 대해서는 교회 쉼터가 성추행 장소였고, 성폭행 피해자인 ㅇ양은 정확한 시간과 장소는 기억 못하나 “엄청나게 아팠다”는 말로 충격을 나타냈다. 그리고 ‘여관’이라는 글자를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목사는 ㅅ양을 성추행한 혐의로 실형을 선고받았지만 ㅇ양에 대한 성폭행 혐의는 인정되지 않았다. ㅇ양의 진술이 오락가락하고 앞뒤 정황과 증거가 불충분하다는 게 재판부의 판단이었다.
피해여성 법정에서도 배려 못 받아
부산 여성장애인 성폭력상담소 최경숙 소장은 “전형적인 초동수사의 한계와 장애인에 대한 이해부족이 맞물린 결과”라고 이 사건을 평가했다. 그 이유는 초동수사 과정에서 피해진술이 당사자와의 심층면접 없이 ㅇ양 어머니의 간접증언으로 이뤄졌고, 이를 기초로 법정에서 ㅇ양이 소화하기 어려운 질문들이 여과없이 쏟아졌기 때문이다. ㅇ양 사건을 계기로 부산 여성장애인연대에서는 “장애인 성폭력 사건은 초기 수사과정에서부터 장애인 전문상담원이나 성폭력 상담원이 동석하도록 해야 한다”고 촉구하고 나섰다.
지난해 가을 드러난 ‘김해 사건’을 보면 초동수사가 철저해야 할 필요성은 더욱 분명해진다. 15살 때부터 마을 사람 여러 명에게 성폭행을 당했던 정신지체 장애인 ㄱ(20)씨가 임신을 하자, 관할 파출소장은 그를 데리고 “이 아저씨가 그랬느냐”고 물으면서 마을을 돌아다녔다. 이렇게 방만하게 용의자 수사가 이뤄지는 사이 마을에서는 대책회의가 열렸고, 부녀회에서는 ㄱ씨를 병원으로 데려가 낙태수술을 받기에 이른다. 이 사건은 뒤늦게 여성단체들에게 알려져 올 2월 가해자들이 실형을 선고받은 것으로 마무리됐지만, 수사관이 장애인 성폭력 사건에 대한 최소한의 원칙이나 배려를 무시한 바람에 피해자의 인권은 처음부터 완전히 실종됐다. 재수사 과정이 훨씬 더 복잡하고 어려워진 건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부산의 ㅇ양처럼 상당수의 피해여성이 법정에서도 기본적인 배려를 받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장애인의 특성에 대한 무지 때문이다.
초등학교 5년 때부터 동네 사람들에게 수시로 성폭행을 당해온 서울 상계동 ㅇ양(16)은 지난 3월9일 열린 비공개 재판에서 결정적인 증언을 뒤집었다. 10분 이상을 집중하지 못하는 ㅇ양은 변호사의 질문공세에 당황한 나머지 “아저씨와 연애(성폭력을 뜻하는 피해자의 표현)하지 않았다”고 말해버렸다. 서울 여성장애인성폭력상담소 조옥 상담부장은 “이런 일은 종종 벌어진다”며 “한 정신지체 3급 장애소녀는 수사와 재판과정에서 너무 시달린 나머지 대면접촉까지 피할 정도로 중증을 보이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여성장애인연합이 분석한 40여건의 장애여성 성폭력 피해사건을 보면 피해자의 장애유형은 정신지체 25명, 지체장애 7명, 언어·청각장애 2명, 시각장애 3명 등으로 정신지체 여성이 가장 많은 비율(62.5%)을 차지한다. 그리고 피해유형은 강간이 29건으로 압도적으로 많다. 하지만 성폭력 피해자라는 특성과 장애인이라는 특성이 세심하게 고려되지 않아 수사나 재판과정에서 피해여성이 방치되는 일이 많다. 수사 도중 똑같은 가해자에게 성폭행을 또 당한 피해자도 있었다.
여성장애인성폭력상담소의 폭주하는 업무
올해 들어 부산(051-583-7736), 대구(053-637-6057), 전주(063-286-1366), 서울(02-3675-4466)에 잇따라 여성장애인성폭력상담소(이하 상담소)가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마자 업무가 폭주하고 있다. 장애인 전문상담소가 없다보니 이들 상담소는 가정, 재활, 취업, 육아, 의료에 이르기까지 종합상담소 구실을 해야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각 상담소에 가장 많이 들어오는 내용은 상습적인 가정폭력 문제이다. 부산 상담소 최경숙 소장은 “언어폭력을 포함한 가정폭력은 너무나 일상적이고 범위가 넓어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난감할 지경”이라고 말했다.
경북의 한 소도시에 사는 김은옥(가명·40대)씨는 어릴 때 소아마비를 앓아 다리를 전다. 20대 초반에 그는 친정에 짐이 될까봐 한 청년과 만난 지 5개월 만에 서둘러 결혼했다. 그러나 김씨는 “결혼 전에 남편이 보였던 휴머니즘은 덜 익은 센티멘털에 불과했다는 것을 느끼기에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가 인터뷰를 대신해 보낸 이메일의 한 대목을 보자.
“국영기업체 간부인 남편은 결혼 당시의 맹세를 잊고 술만 먹으면 ‘너 때문에 내 인생이 망했다’며 입에 담지 못할 언어폭력부터 칼을 휘두르는 것은 물론, 옷걸이 기둥을 휘두르며 위협하고 때렸습니다. 아이들과 이웃집으로 피난가기도 하고 여관에서 자기도 했지만 한번도 친정으로는 가지 않았습니다. 저의 장애로 친정식구와의 관계가 자연스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김씨는 결국 20년 결혼생활에 종지부를 찍었다. 여러 차례 병원 응급실에 실려간 끝이다. 위자료도 한푼 못 받고 헤어졌지만 김씨는 폭력에서 벗어나 훨씬 행복해졌다고 말한다. 그는 공공근로 타이핑을 해서 생계를 꾸려가고 있다.
김씨의 경우는 비교적 교육정도가 높고, 사회성이 있었기에 이혼이 가능했다. 지난해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군포의 ‘장애여성 남편살해 사건’은 이혼마저도 할 수 없는 장애여성의 현실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우리나라는 장애여성의 성폭력, 가정폭력 피해에 대한 실태는커녕 장애여성의 실태마저도 제대로 파악되지 않은 형편이다. 보건복지부에서는 여성장애인의 숫자가 전체 장애인의 30%에 이르는 56만여명이라고 추산하고 있으나, 장애인등록률이 낮은데다 시설장애인의 숫자는 파악되지 않아 실제로는 훨씬 높을 것으로 보인다. 장애계에서는 세계보건기구의 기준에 따라 전체 인구의 10%인 450만명이 장애인이며, 그중 여성장애인은 45%인 200만명이라고 보기도 한다.
여성부는 연말까지 충남·경기 등으로 여성장애인성폭력상담소를 확대 설치하고 5천여만원씩 운영비를 지원하겠다는 계획을 갖고 있지만, 성폭력과 가정폭력의 발생빈도에 비춰볼 때 아주 더딘 걸음이다. 전주 상담소 김순환 상임상담원은 “뒤늦게 상담소로 온 사건들을 보면 이미 어찌해볼 수 없게 악화되거나 재판이 진행돼버린 사건들이 많아 안타깝다”고 말한다.
장애여성 대상 성교육과 인권교육 시급
장향숙(43) 한국여성장애인연합 공동대표는 “상담소는 그동안 사회의 그늘에 있던 여성장애인들이 참다못해 스스로의 인권을 찾기 위해 나선 것”이라며 △여성장애인 성폭력 피해 실태 파악 △상담접근권 확보 △전담쉼터 설치 △전문가 교육 △지속적인 교육과 홍보를 당면과제로 꼽았다. 장 대표는 또 “교육과 사회활동에서 소외된 장애여성들에게 최소한의 자기방어를 할 수 있는 성교육과 인권교육이 무엇보다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여성이자 장애인인 이들이 성폭력, 가정폭력에 무방비로 내몰리는 현실은 우리 사회가 약자에게는 여전히 ‘카스트 사회’라는 것을 다시 한번 일깨운다. “여성장애인이 행복해야 사회가 행복하다.” 가정폭력 피해자였던 김씨의 말이다.
김소희 기자 sohee@hani.co.kr

사진/ 우리 사회에서 여성장애인들은 이중·삼중의 고통을 겪는다. 장애로 인한 불편함과 기회박탈은 물론 성폭력·가정폭력의 위험에도 심각하게 노출돼 있다.(박승화 기자)

사진/ 한국여성장애인연합 장항숙 공동대표는 장애여성 대상 성교육·안전교육이 시급하다고 강조한다.(김소희 기자)

사진/ 지난 3월15일 문을 연 서울 여성장애인성폭력 상담소. 폭주하는 상담 중 가장 많은 것은 가정폭력 문제이다.(이정용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