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경대 죽음 때 새내기였던 91학번 4명의 오늘… 무대는 달라져도 열정은 그대로 간직
꽃이 피고 또 질 때면 91학번들은 ‘그날’을 생각한다. 그날은 1991년 4월26일이다. 교문 앞에서 시위를 하던 명지대 1학년 강경대가 공권력이 휘두른 쇠파이프에 맞아 죽은 날이다. 그날 저녁 학교에 나붙은 붉은 글씨의 대자보는 한 대학 새내기의 죽음을 알리고 있었다. 그리고 박승희, 김영균, 박창수, 김철수, 김귀정…. 그해 꽃잎이 떨어질 때마다 11명의 목숨이 스러졌다. 봄이 가는 줄도 모르고 91학번들은 최루탄 연기 자욱한 아스팔트 위에 있었다.
군대갔던 그들이 하나둘 돌아오던 90년대 중반. 대학가에는 새로운 열풍이 불어닥쳤다. 노동 대신 놀이가 미덕으로 여겨졌고, 계급이론 대신 문화담론이 넘쳐나기 시작한 것이다.
벗들의 죽음 알리며 문화담론 속으로…
<신세대 네 멋대로 해라>라는, 당시로서는 낯선 제목의 베스트셀러는 그 변화를 상징했다. 어느 때부터인가 록은 혁명적 소음이 되었고, 서태지는 주류질서의 전복자로 추앙받았다. 그들은 세계영화사 100년을 한꺼번에 회고하느라 영화제를 열거나 학교 앞 비디오방에 죽치고 살았다. 여성주의, 성정치, 국제주의, 인권의 정치…. 계급중심의 진보에서 좀더 다양한 진보로 구심력이 작용했다. 대학마다 여학생위원회가 생기고, 동성애 모임이 커밍아웃한 것도 이즈음이다. 그러나 91년 몸에 밴 최루탄 냄새가 채 가시기도 전 그들 가운데 대부분은 서둘러 도서관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지난 10년 동안 모두들 취직을 하고 결혼을 하며 숨가쁘게 살아왔다. 세상이 짜준 일정표대로. 그러나 남겨진 화두를 움켜쥐고 살아가는 91학번들이 아직 있다. 어쩌면 이 이야기는 몇 안 되는 91학번 출신 운동가 가운데서도 극히 일부만의 이야기일 수도 있다. 이들에게 91학번의 대표값을 매길 수는 없다. 이들말고도 상당수 91학번들이 진보운동의 현장에서 열심히 뛰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이 네명은 91학번들이 겪은 20대의 역사적 경험을 가장(?) ‘91학번답게’ 삶의 현장에서 드러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국제연대정책정보센터의 엄혜진(30), 평화인권연대의 최정민(30), 문화개혁시민연대의 이원재(29), 민주노동당의 장석준(30)씨. 그들의 공통분모는 다양한 운동 영역과 개인의 해방을 앞세우는 태도다. 91년 거리 투쟁과 90년대 중반의 ‘문화세례’를 거친 이들의 활동영역이 국제주의와 평화, 문화정치와 진보정당이라는 화두와 일치하는 것이 단순한 우연만은 아닌 듯하다. 거리정치의 마지막 세대이자, 다양한 진보의 이념을 받아들인 첫 세대인 91학번. 이들은 여전히 자신의 정체성을, 다른 질서를 꿈꾸며 다른 오늘을 살아가는 것으로 매김한다. “대학 졸업할 땐 외환위기 닥치고, 대학원 졸업할 땐 제2의 경제위기에 발목 잡힌 학번. 뭐 그런 얘기하려는 거면 안 해요. 그건 91학번 남학생들만의 얘기니까.” 얼마 전 91학번 기사에 등장인물이 되어달라고 부탁했을 때, 국제연대정책정보센터의 엄혜진씨가 대뜸 맞받아친 말이었다. 지난 겨울 한 신문에 나온 기사를 두고 하는 말이다. 그 기사는 91학번을 외환위기와 제2의 경제위기에 연타를 맞은 ‘불운한 학번’으로 묘사했다. 엄혜진씨는 남성중심의 기사를 ‘여성의 눈’으로 읽어내고 있었던 것이다. 엄혜진씨와 최정민씨(평화인권연대)는 요즘 ‘운동사회 성폭력 뿌리뽑기 100인위원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대학에서 여성주의 세례를 받은 첫 세대답게 운동사회조차도 자유롭지 못한 남성중심주의와 맞서고 있는 것이다. 진보운동의 지평을 넓혀가고 있다
4월18일 저녁 대학로 한 카페에서 만난 엄혜진씨와 최정민씨는 “91년이 엊그제 같다”며 말문을 열었다. 성신여대 교육학과 91학번인 엄혜진씨는 어린 시절 줄곧 선생님이 되리란 꿈을 품고 살아왔다. 하지만 91년 거리의 경험은 그를 운동하는 삶으로 이끌었다. 수원대 식품영양학과 91학번인 최정민씨는 “주변 친구들이 잡혀갈 때마다 눈물 흘리며 쫓아다니다보니 어느새 운동의 한가운데 서 있었다”고 돌이킨다. 그 눈물이 방울방울 그를 단련시켜왔는지도 모른다. 96년 무렵 대학을 나온 이들은 졸업 뒤에도 계속 사회운동을 하고 싶었지만, 마땅히 들어갈 사회운동 단체가 없었다고 한다.
“기존의 사회운동 단체들은 너무 제도화돼 있었어요. 조직 풍토나 활동가들의 감수성도 우리들과 달랐습니다. 그 안에서 견디기보다는 아예 새로운 실험을 하기로 한 겁니다.”
이미 대학에서 여성주의, 문화정치 등 새로운 진보이념의 세례를 받아 충분히 ‘리버럴’한 이들에게 기존 사회운동 단체는 여러 면에서 몸에 맞지 않는 옷이었다. 이들은 좀더 다양하고 급진적인 진보를 원했다. 기존 사회운동 단체 조직의 위계와 권위는 이들 눈에 떨쳐버려야 할 그 무엇이었다.
세상을 바꾸기 전에, 몸담은 조직 내부에서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내는 것이 이들에겐 중요했다. 그래서 80년대 말 90년대 초반 학번이 중심이 돼 새로운 단체를 결성했다. 국제연대정책정보센터와 평화인권연대는 이런 고민의 결과였다. “새로운 국제주의”를 모토로 내건 국제연대정책정보센터는 97년에, “반폭력 평화주의”를 기치로 하는 평화인권연대는 98년에 만들어졌다. 전통적인 계급운동의 한계를 뛰어넘으면서 제도화된 시민운동의 틀에 갇히지 않는 운동, 이들이 꿈꾸는 신좌파적 운동이다. 엄혜진씨는 “우리 단체의 지향점이 91학번의 세대적 감수성과 다를 바 없다”고 말한다.
신좌파적 상상은 몇년의 시간을 거치며 서서히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국제연대정책정보센터와 평화인권연대에는 대표와 수직적인 조직체계가 없는 것도 그런 맥락이다. 이들은 나이를 뛰어넘어 반말을 쓰고, 이름을 부르는 대신 서로의 별명을 부른다. 그만큼 위계질서와 권력의 집중을 경계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국제연대정책정보센터 내규에는 출신대학별 정원이 정해져 있을 정도다. 한 대학 출신 활동가가 3명을 넘지 못하며 여성이 반드시 활동가의 반을 넘어야 한다는 규정이 바로 그것이다. 지난해 이 단체가 <한겨레> 생활광고에 낸 활동가 모집 광고는 이를 대변한다. ‘서울대 출신은 이미 정원이 찼으므로 비서울대 여성활동가만을 모집합니다.’
진보단체의 위계질서와 권력집중 극복
서로 다른 공간에서 활동하던 91학번 두 여성이 처음 만난 것은 98년 ‘사회단체 여성활동가 모임’에서다. 이 모임을 통해 이들은 여성주의를 좀더 깊이 고민하게 됐고, 이는 ‘운동사회 내 성폭력 뿌리뽑기 100인위원회’의 결성으로 이어졌다. 둘은 최근 100인위원회가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되면서 ‘91학번 정체성’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고 한다.
“막상 고소당하니까 후배들은 좀 당황하더라구요. 우리 둘은 비교적 담담한 편이었거든요. 처음에는 왜 다른 반응이 나오는지 몰라 어리둥절했죠. 곰곰이 생각해보니 ‘대학 신입생 때 주변 사람들이 죽고 구속당하는 걸 경험한 세대와 그렇지 않은 세대의 차이구나’ 싶더라구요.” 물론 후배세대에 대한 우월함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차이는 분명이 있다는 게 이들의 생각이다.
문화연대 이원재 정보팀장은 두 여성 못지않게 다양한 진보의 가치를 몸으로 받아들이려는 사람들이다. 4월19일 오후 2시. 이원재씨는 약속장소인 ‘아트 선재’ 앞에 찢어진 청바지에 체 게바라 티셔츠를 입고 나타났다. 왼쪽 귀에는 작은 귀걸이가 걸려 있었다.
수원대 화학공학과 91학번인 그는 “후배들 잘 꾀고, 약속시간 철저히 지키는 전형적인 운동권 모범생이었다”고 돌이킨다. 항상 수원대 학생운동의 중심에 서 있던 그였지만, 95년 군복무를 마치고 돌아온 대학은 달라져 있었다. 노동현장 중심의 운동은 쇠락하고 있었고 여성주의, 생태주의, 문화정치 등 새로운 진보이념이 화두로 떠올랐다. 서구 신좌파 이론가들의 서적을 뒤적이게 되면서 스스로 이전의 운동을 반성하게 됐다.
“세상을 해방시키겠다는 운동을 하면서도 내 스스로 억압되고 소외돼왔다는 걸 느꼈습니다. 비로소 나 자신, 주체에게 눈을 돌리게 된 거지요. 당위에 기반한 운동보다는 내 삶을 바꾸는 운동, 주체 전복적인 운동을 하고 싶었습니다.”
민주주의의 원형을 지켜가기 위하여…
97년 대학을 졸업하고 형편상 취직을 할 수밖에 없었지만 오래 가지 못했다. 출근할 때마다 속에서는 ‘도저히 이렇게는 못살겠다’는 욕망이 끓어올랐다. 제도에 발목잡히는 인생을 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4개월 만에 직장을 그만두고 대학원 입시를 준비해 98년 봄 중앙대학교 신문방송학과 대학원에 들어갔다. 거기서 만난 ‘서울문화이론연구소’ 사람들을 통해 문화정치에 대한 이해를 높일 수 있었다. 대학원에 다니면서 인터넷의 전복성에 주목하게 됐고, 요즘은 문화연대 정보팀장으로 ‘인터넷상의 표현의 자유’를 지키기 위한 운동에 열심이다.
이처럼 욕망에 충실한 운동을 주장하는 이원재씨지만 여전히 91년의 기억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이씨는 “91년의 기억이 여전히 삶의 자양분이 된다”면서 “무엇보다 자기 삶을 결정할 용기를 갖게 된 것은 91년에 시작한 학생운동 덕분”이라고 말한다. 그에게도 91년은 중요한 삶의 분기점이었던 셈이다.
이원재씨가 운동권 모범생에서 세상의 전복을 꿈꾸는 ‘날라리’로 변한 경우라면, 연세대학교 사회학과 91학번 장석준씨는 좀더 전통적인 방식의 운동에 헌신하고 있다. 지난해부터 진보정당인 민주노동당 중앙연수원 교육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91년은 그에게 어떤 의미일까. “같은 학번인 강경대가 타살되는 것을 보면서 ‘이후의 삶은 여분’이라고 다짐했었죠. 진보정당운동은 그 약속을 지켜가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에게 91년은 살아 꿈틀대는 민주주의의 원형으로 남아 있다. 91년 거리에서 그는 다른 세상의 가능성을 보았고 아직도 그 기억을 잊지 못한다. “선배들이 91년 투쟁에서 패배의 그림자를 봤다면, 새내기였던 우리들은 살아 꿈틀대는 민주주의의를 체험했습니다. 그게 희망의 원형으로 남아 있는 거죠. 우리 당에 90년대 초반 학번이 유난히 많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합니다.”
386세대가 정치참여를 기존의 제도정당 안에서 사고하는 경향이 있다면, 90년대 학번들은 다른 정치를 꿈꾸는 경우가 많다. 혹자는 90년대 초반 학번을 ‘진보정당운동세대’라고도 부른다. 장석준씨는 지난해 결성된 민주노동당을 노동법개악 반대투쟁의 성과물이자, 91년 투쟁이 내건 요구를 해결할 유일한 주체라고 말한다.
“91년 투쟁에서는 87년 민주화운동이 남긴 과제가 본격적으로 드러났습니다. 보수야당 세력과 노동자·민중 세력의 대립이 바로 그것이지요. 형식적 민주주의를 넘어서는 실질적 민주주의를 풀어갈 주체가 민주노동당인 셈입니다.”
열사의 추모행사에 91명이 합창한다
장석준씨와 헤어져 밤이 이슥할 무렵인 4월19일 저녁 8시, 4월26일 열릴 ‘강경대 열사 10주기 추모행사’를 위해 노래연습을 하는 91학번들을 만나러 연세대로 들어섰다. 연세대는 91년 범국민대회가 가장 많이 열렸던 장소다. 오른쪽에는 강경대의 주검이 옮겨졌던 세브란스병원 간판이 여전히 휘황했고, 집회가 자주 열렸던 왼쪽 대운동장에는 어느새 신공학관이 들어서 있었다. 학생회관에 들어서는 순간 ‘91학번 91명의 합창’ 소리가 들려왔다. “나이 서른에 우린 어디에 있을까… 빈 가슴마다 물려나던 참된 그리움의 북소리를 나이 서른에 우린 들을 수 있을까.” 다시 봄이다.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사진/ 91학번들은 91년 5월 투쟁을 기리는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강경대 열사 10주기 추모행사를 위해 노래연습을 하는 91학번들.(강창광 기자)
<신세대 네 멋대로 해라>라는, 당시로서는 낯선 제목의 베스트셀러는 그 변화를 상징했다. 어느 때부터인가 록은 혁명적 소음이 되었고, 서태지는 주류질서의 전복자로 추앙받았다. 그들은 세계영화사 100년을 한꺼번에 회고하느라 영화제를 열거나 학교 앞 비디오방에 죽치고 살았다. 여성주의, 성정치, 국제주의, 인권의 정치…. 계급중심의 진보에서 좀더 다양한 진보로 구심력이 작용했다. 대학마다 여학생위원회가 생기고, 동성애 모임이 커밍아웃한 것도 이즈음이다. 그러나 91년 몸에 밴 최루탄 냄새가 채 가시기도 전 그들 가운데 대부분은 서둘러 도서관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지난 10년 동안 모두들 취직을 하고 결혼을 하며 숨가쁘게 살아왔다. 세상이 짜준 일정표대로. 그러나 남겨진 화두를 움켜쥐고 살아가는 91학번들이 아직 있다. 어쩌면 이 이야기는 몇 안 되는 91학번 출신 운동가 가운데서도 극히 일부만의 이야기일 수도 있다. 이들에게 91학번의 대표값을 매길 수는 없다. 이들말고도 상당수 91학번들이 진보운동의 현장에서 열심히 뛰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이 네명은 91학번들이 겪은 20대의 역사적 경험을 가장(?) ‘91학번답게’ 삶의 현장에서 드러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국제연대정책정보센터의 엄혜진(30), 평화인권연대의 최정민(30), 문화개혁시민연대의 이원재(29), 민주노동당의 장석준(30)씨. 그들의 공통분모는 다양한 운동 영역과 개인의 해방을 앞세우는 태도다. 91년 거리 투쟁과 90년대 중반의 ‘문화세례’를 거친 이들의 활동영역이 국제주의와 평화, 문화정치와 진보정당이라는 화두와 일치하는 것이 단순한 우연만은 아닌 듯하다. 거리정치의 마지막 세대이자, 다양한 진보의 이념을 받아들인 첫 세대인 91학번. 이들은 여전히 자신의 정체성을, 다른 질서를 꿈꾸며 다른 오늘을 살아가는 것으로 매김한다. “대학 졸업할 땐 외환위기 닥치고, 대학원 졸업할 땐 제2의 경제위기에 발목 잡힌 학번. 뭐 그런 얘기하려는 거면 안 해요. 그건 91학번 남학생들만의 얘기니까.” 얼마 전 91학번 기사에 등장인물이 되어달라고 부탁했을 때, 국제연대정책정보센터의 엄혜진씨가 대뜸 맞받아친 말이었다. 지난 겨울 한 신문에 나온 기사를 두고 하는 말이다. 그 기사는 91학번을 외환위기와 제2의 경제위기에 연타를 맞은 ‘불운한 학번’으로 묘사했다. 엄혜진씨는 남성중심의 기사를 ‘여성의 눈’으로 읽어내고 있었던 것이다. 엄혜진씨와 최정민씨(평화인권연대)는 요즘 ‘운동사회 성폭력 뿌리뽑기 100인위원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대학에서 여성주의 세례를 받은 첫 세대답게 운동사회조차도 자유롭지 못한 남성중심주의와 맞서고 있는 것이다. 진보운동의 지평을 넓혀가고 있다

사진/ “91년의 기억은 삶의 자양분이다” 여전히 세상의 문화적 전복을 꿈꾸는 이원재씨.(이용호 기자)

사진/ 강경대 열사 영결식 모습.(장철규 기자)

사진/ “계급운동의 한계를 넘고 시민운동의 틀을 깨뜨린다.” 운동사회 내 성폭력 뿌리뽑기에 나선 엄혜진(왼쪽)씨와 최정민씨.(박승화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