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분을 속이고 들어간 경기도 가내공장, 외국인 노동자들과 함께 일한 며칠의 이야기
“자, 다 왔습니다. 저∼기가 작업장입니다.” 사장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이가 승합차를 내려서면서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쪽을 본 순간, 아뿔싸! 내심 깊은 한숨이 새어나왔다.
마당 한 귀퉁이에 무슨 괴물처럼 버티고 선 기계 1대가 공장시설의 전부라니. 이렇게 단순한 공정에서 무슨 얘깃거리를 끄집어낼 수 있단 말인가. 난감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그렇지만, 어쩌랴. 여기까지 와서 되돌아갈 수도 없는 일. 일단 하루라도 일을 해보고 판단해보는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지 않은가. ‘외국인 노동자의 삶’ 체험은 이렇게 당혹스러움 속에 시작됐다.
팔자에 없는 ‘낙방 고시생’이 되어…
‘기자가 뛰어든 세상’의 한 테마로 외국인 노동자의 삶을 다루자는 의견은 부서 회의에서 일찌감치 제기됐다. 대학 시절 이런저런 궂은 일을 많이 해본 동료기자가 경기도 마석에 가구공장이 많은데, 거기에 가면 외국인 노동자들이 일하는 곳에서 어렵지 않게 일자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구체적인 방법까지 내놓았다.
그렇지만, 실제 일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번번이 벽에 부딪혀야 했다. 동료기자와 잘 알고, 마석에서 가구공장을 운영한다는 이가 협조해줄 것이란 기대는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열악한 시설의 공장 안을 바깥에, 그것도 언론을 통해 낱낱이 드러내는 데 따른 부담감 때문이었던지 간곡한 요청에도 불구하고 취업(?) 허락을 얻어낼 수 없었다.
갖가지 시도가 무위로 돌아가던 중 우연찮게 돌파구가 나타났다. 마석 가구공장에 관한 인터넷 자료 가운데 외국인 노동자 인권보호단체 상담사의 경험담이 실마리가 됐다. 이 상담사가 외국인 노동자의 실상을 피부로 느껴보려는 의욕으로 가구공장에 직접 뛰어들어 일을 해봤다는 것이었다. 그래, 외국인 노동자 보호단체나 종교단체를 통하는 방법이 있겠구나! 마침 또다른 동료기자와 잘 아는 목사가 ‘ㅇㅇ외국인 노동자의 집’을 운영하고 있다기에 여기를 통했다.
한번 해볼 만한 일자리가 생기면 다른 기사 마감이 걸리고, 좀 한가해지면 일자리가 없는 어긋남이 몇 차례 반복된 뒤 봄볕 따뜻한 4월 어느 날 마침내 일이 성사됐다. 경기도 광주(지난 3월 군에서 시로 승격)지역에 있는 공장에서 사람을 구한다는 것이었다.
어찌어찌 운좋게 일자리는 구했는데, 또 하나의 걸림돌이 생겼다. 멀쩡한 한국인이 월급 70만원을 받고 일하겠다고 나선 것을 회사쪽에서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아무래도 의심받기 십상일 터이다. 그렇다고 신분을 밝힌다면 받아줄 리 만무하고, 설사 받아준다 하더라도 생생한 실상을 담아낼 수 없다는 문제가 남는다. 결국 신분을 속이고 들어갈 수밖에 없다는 얘긴데….
궁리 끝에 팔자에 없는 ‘낙방 고시생’이 되기로 했다. 월급쟁이는 싫고 해서 경험을 쌓아 ‘내 사업’을 할 참이라고 둘러대면 아무래도 의심을 덜 받을 것 같아서였다(이 대목에서 형제 사장에게 깊은 사과를 드려야할 것 같다. 합작으로 공장을 꾸려가는 두분은 속사정도 모르고 이런저런 설명을 자세히 해줬는데. 결과적으로 거짓말을 한 셈이 됐다. 무임금으로 일했고, 나쁜 뜻은 없었다는 점을 감안해 너그러이 이해해줄 것으로 믿는다). 이런 사정 때문에 외국인 노동자들과 같이 일하는 모습 등을 사진에 담을 수 없는 어려움이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회사는 광주 지역에 널려 있는 전형적인 가내공업형 공장이었다. 생긴 지 한달쯤 지난 이 회사에는 지금까지 우즈베키스탄에서 온 노동자 4명이 일하고 있었다. 이 밖에 사장을 맡고 있는 형제, 안주인, 한국인 노동자 1명이 있다.
우즈베키스탄 여인의 눈물
작업 공정은 아주 간단하다. 가공이라고 할 것도 없다. 고물상에서 대거 사들인 장판을 분쇄기로, 엄지손톱만한 크기만큼 썰어 납품하는 것이었다. 공장 도착 때 당혹스러웠던 것은 바로 이처럼 너무나 단순한 공정 때문이었다. 물론 실제 일을 해보고, 이런저런 얘기를 들으면서 생각은 많이 달라졌지만….
외국인 노동자들이 일하는 곳에선 흔한 일일지 모르겠지만, 도착하자마자 아주 가슴아픈 장면을 봐야했다. 마침 이날은 한달 전부터 일해온 우즈베키스탄 노동자들이 다른 곳으로 떠나는 날이었다. 이름이 ‘사샤’라는 18살 소년과 40∼50대로 보이는 세 여인은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떠나는 설렘으로 부풀어 있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몸매가 가냘픈 여인네가 고향 친구 소개로 인근 도자기 공장에 취직이 됐다고 했는데, 일자리 펑크가 난 것이었다. 이곳에선 이미 떠나기로 결정이 돼 있는데 말이다. 한마디로 공중에 붕 뜬 것이다. 이 여인은 전화기를 힘없이 놓더니 작업장 한구석으로 가서 눈물을 줄줄 흘렸다.
사장은 여인을 달래더니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나머지 3명이 가기로 한 단무지 공장에 부탁해 일자리를 알아봐준 것이다. 일이 잘 풀려 그쪽에 가면 일을 할 수 있다고 하자, 이 여인은 눈물이 채 마르지도 않은 눈에 담뿍 웃음꽃을 피워올렸다. 주위에 있던 이들, 모두 덩달아 한바탕 웃었다. 단무지 공장으로 이들을 데려다준 사장에게서 나중에 들은 바, 바닥에 물기가 질퍽한 것을 보고는 다시 이곳 공장으로 돌아오겠다며 울고불고 난리가 났었다고 한다.
이곳 공장에 오기 전 전화로는 다음날부터 일하기로 약속했지만, 모두가 일하는 것을 두고만 볼 수 없어 가자마자 바로 작업장으로 뛰어들었다. 마감 시한을 감안할 때 하루라도 빨리 일을 시작해야할 필요도 있었다.
처음에 한 일은 수거해온 장판을 40∼50cm 너비로 자르는 것이었다. 허리 높이의 작업대에 장판을 올려놓고 문구용 칼로 죽죽 그으면 되는 아주 간단한 일이었다. 말이 제대로 통하지 않는 외국인도 금방 배워서 할 수 있을 듯싶었다.
쉬운 듯 보이는 이 일의 어려움은 바로 먼지에서 비롯된다. 장판을 이리저리 옮기고 작업대에 올리는 과정에서 적지 않은 먼지가 일었다. 작업장 이곳저곳에 마스크가 있었지만, 때가 끼어 쓸 엄두가 나지 않았다. 우즈베키스탄 노동자들도 먼지 때문에 힘들어했다고 한다.
장판의 무게도 그리 만만치 않았다. 둘둘 말린 장판은 의외로 무거웠다. 과장을 약간 보태면 비슷한 부피의 통나무나 마찬가지였다. 40∼50대 여성 노동자들에게는 고역이었을 게 분명하다. 물론 하루종일 칼질을 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칼질을 하고 난 다음날이면 팔뚝이 얼얼하다.
샤워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먼지
50cm 안팎의 너비로 자른 장판은 지게차에 실어 분쇄기 앞으로 옮긴다. 지게차에 싣기에 앞서 팰릿에 차곡차곡 쌓아야 하는데, 이때 ‘팻트’와 ‘모노륨’을 구분한다. 원재료가 다르기 때문이다. 팻트는 PVC, 모노륨은 GF(유리섬유)로 만들어진 것이어서 구분·납품해야 하는 것이다. 초보자는 장판 뒷면에 써 있는 글자로 판단할 수밖에 없는데, 한글을 모른다면 꽤나 헷갈릴 법하다. 또 하나 종류는 얇고 딱딱한 이른바 ‘막장판’으로, 이는 폐기 대상이다.
분쇄기는 2천만원을 들여 산 것으로 이 공장의 보물 1호이다. 좁게 자른 넓적한 장판을 비스듬하게 설치된 컨베이어벨트에 올리면 단단하고 예리한 기계 칼날이 마구 짓이기고 잘게잘게 썬다. 이 과정에서 우당탕 쿵쾅 소음이 엄청나다. 잘게 쪼개진 장판 쪼가리들은 나선형으로 생긴 철제 컨베이어를 거쳐 커다란 부대에 차곡차곡 담긴다. 이것으로 모든 공정은 완료된다. 부대에 담긴 장판 쪼가리들은 트럭에 실려 자동차시트커버 재료를 만드는 회사에 납품될 것이다.
공장에 도착한 첫날 오후에 몽골인 2명이 공장을 찾아왔다. 친구 사이라고 밝힌 뭉크(26)와 마터(26)였다. 까만 머리의 뭉크는 반지르르하게 무스를 발랐고, 마터는 노란색으로 머리를 물들여 제법 신세대 분위기를 풍겼다. 한국에 온 지 3년된 뭉크가 일자리를 구하고 있었고, 마터는 친구를 도와주러 따라왔다고 했다. 한국인 사장의 안내에 따라 작업장 이곳저곳을 둘러보던 뭉크는 일자리가 맘에 든 듯했다. 그런데, 숙소문제 때문에 일이 꼬이기 시작했다. 떠듬떠듬 한국말을 제법 하는 뭉크는 독방을 쓸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구했다. 물론 이런 요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독방으로 내줄 공간이 없는 이곳에선 4∼5평 크기의 방에 네댓명이 기거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었던 것이다.
몇 차례 승강이 끝에 일을 하는 것을 봐가며 한달쯤 뒤에 컨테이너를 개조해 독방을 만들어줄 수 있다는 쪽으로 대략 타협이 이뤄졌다. 뭉크는 그때까지 당분간 마터와 지내기로 했다.
하루 일과는 오후 6∼7시에 끝난다. 잠자리로 정해진 방은 작업장 옆에 붙은 5평 안팎의 골방이다. 퀴퀴한 냄새가 나는 방 안에는 TV수상기, 조그마한 거울 하나, 검은색 비닐소파 두개를 맞붙여 침대처럼 만들어놓은 게 전부이다. 방바닥을 밟을 때마다 서걱서걱 밟히는 느낌이 싫었지만, 청소를 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먼지를 뒤집어써 매일 샤워를 해야 하는데, 몸을 씻기가 불편하기 짝이 없다. 부엌 한쪽 공간에 비닐천을 얼기설기 엮어 만들어놓은 곳에서 빨래, 세수, 샤워를 모두 해결해야 한다. 여성 노동자들에겐 여간 난감하지 않을 듯했다. 조악하나마 전기로 물을 데울 수 있는 시설이 있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폐장판 수거에서 납품까지 전 과정을 거치다
이곳에 온 뒤 들은 얘기인데, 외국인 노동자들이 이 부근 공장으로 유입되는 경로는 대략 세 가지. 갖가지 직업소개소를 통하는 경우가 그 하나로 ‘ㅇㅇ외국인 노동자의 집’도 이런 범주에 든다. 이 밖에 외국인 노동자 스스로 친구 등의 소개로 직접 찾아오는 수가 있으며 거리를 오가다 우연찮게 만나 일을 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공장에 온 첫날 만났던 사샤 일행은 거리에서 우연히 만나 이곳으로 오게 됐다고 한다. 이곳 공장의 주인이 길거리를 오가다 사샤를 태워주게 됐는데, 이런저런 얘기 끝에 동향인 이들 넷이 한꺼번에 여기에 똬리를 틀게 된 것이었다. 이전까지는 마늘공장에서 일했다고 한다.
공장 도착 이튿날은 아침부터 추적추적 비가 내렸다. 전날까지만 해도 초여름 같던 날씨는 하루 만에 싹 달라져 으슬으슬 소름이 돋을 정도로 서늘했다.
이날은 가공 과정을 거친 장판 쪼가리들을 납품하고, 돌아오는 길에 고물상에 들러 폐장판을 수거해오기로 돼 있었다. 1년 정도 고물상을 한 경험이 있는 사장이 모는 차에 동승해 이런저런 잡일을 돕는 게 과제였다. 이 바람에 여기에 온 지 이틀 만에 폐장판 수거, 팻트-모노륨 구분, 절단, 분쇄, 납품 등 전체 작업 공정을 골고루 거칠 수 있었다.
납품하는 날 아침은 장판 쪼가리들을 잔뜩 담은 부대를 2.5t 트럭에 싣는 작업으로 시작됐다. 장판 쪼가리로 꽉 찬 부대는 보통 400∼500kg에 달해 지게차로 실어날라야 한다. 처음에 여기에 온 외국인 노동자들이 이 과정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삐죽하게 튀어나온 지게차 다리에 부대 네 귀퉁이의 고리를 걸어주는 일이다.
그다지 크지 않은 트럭에 부대 4개 정도쯤 실을 수 있을까 했는데, 두줄로 나란히 세워 8개를 싣고 그 위에 또 4개를 더 얹었다. 짐을 실을 때마다 트럭은 움찔움찔 몸살을 앓았고, 정량 이상 물건을 담은 라면박스마냥 트럭의 가로대는 금방이라도 미어터질 듯했다.
운전수 조수가 돼 가게 된 곳은 경기도 포천의 어느 납품공장이었다. 무려 세 시간을 쉬지 않고 달려야 닿을 수 있는 먼 거리였다. 이렇게 운전수 조수가 돼 이곳저곳을 다닐 수 있는 외국인 노동자는 한국말을 좀 할 줄 아는 이가 선택된다고 한다. 납품하는 날 트럭에 동승할 경우 폐장판을 싣는 일 빼고는 별로 할 일이 없으므로 비교적 편하다.
잘게 쪼개진 폐장판은 kg당 180∼200원. 고물상에서 사오는 값 80원에 비교할 때 부가가치가 높을 것 같은데, 운반비 등을 감안하면 그렇지도 않다는 게 한국인 사장의 설명이다.
납품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공장에서 연락이 왔다. 원재료(폐장판)가 다 떨어져 기계 가동을 중단해야할 지경이니, 어떻게든 장판을 구해와야한다는 것이었다. 포천 근방 고물상에 예약돼 있는 물건이 있어 찾아오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으나, 문제는 비가 내리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비가 올 경우 싣는 작업 자체가 어려울 뿐 아니라 빗물 때문에 폐장판의 무게가 더 나가, 사는 쪽에서 손해를 볼 수밖에 없다.
바닥은 질척거리고 사방에선 악취가…
쓰레기 소각장 분위기를 풍기는 고물상에서, 그것도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와중에 폐장판을 싣는 작업은 을씨년스럽기 그지없었다. 바닥은 질척거리고 사방에서 악취가 진동하는 가운데 빗물을 잔뜩 머금은 장판을 싣는 작업은 적잖은 고역이었다. 하긴, 날씨가 맑은 날이면 먼지 때문에 비오는 날의 고역 이상으로 힘든 과정일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폐장판을 싣고 오는 트럭 안에서 원재료값, 납품가, 인건비 등을 머리에 떠올리며 손을 꼽아봤지만 도무지 계산이 나오지 않았다. 공장을 세운 지 얼마되지 않았다고는 하나, 당분간 힘든 과정을 겪을 수밖에 없고 이 때문에 외국인 노동자들은 저임금과 열악한 노동조건에서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김영배 기자 kimyb@hani.co.kr

폐장판을 너비 50cm 안팎으로 자르는 작업실. 분쇄기는 작업실 바깥에 설치돼 있다.(김영배 기자)

경기도 광주 공장지대의 골목 풍경. 가내공업형 공장들이 주로 입주해 있다.(박승화 기자)

외국인 노동자들은 임금체불로 고통을 겪는 일이 많다. 방글라데시에서 온 까말(24·오른쪽)씨도 전북 익산의 한 공장에서 일한 뒤 190만원의 임긍을 제때 못 받고 있다.(박승화 기자)

폐자원활용 업체 등이 몰려 있는 경기도 광주의 공장지대, 업체들의 영세성으로 인해 외국인 노동자들이 열악한 노동조건에서 벗어나는 게 당분간 쉽지 않을 듯 보였다.(박승화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