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1년 홀연히 나타난 황태성, 1980년대 ‘88라인’, 2007년 김만복까지 남북관계 밀사들의 역사
▣ 김연철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연구교수
1989년 7월1일 평양의 능라도 5·1 경기장. 세계청년학생축전 개막식이 열렸다. 무려 15만 명의 평양 시민들이 군중의 열기를 내뿜으며 들어차 있었다. 그곳에 임수경, 그가 있었다. 남과 북에서 잘 알려진 ‘역사의 현장’이다. 그러나 주석단 건너편에는 또 다른 남쪽 손님도 있었다. 신분도 방북 목적도 달랐던 사람들, 바로 박철언 대통령 정책보좌관과 수행원인 강재섭 현 한나라당 대표 일행이었다. 그들은 ‘밀사’였다.
△ ‘그때 기억나지요?’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2005년 6월17일 평양 대동강 영빈관에서 6·15 남북 공동선언 5돌 기념 민족통일대축전에 참가한 남쪽 대표단과 오찬을 하면서 임동원 전 통일부 장관과 잔을 부딪히고 있다. 맨 오른쪽은 박재규 전 통일부 장관이다. (사진/ 통일부 제공)
‘불법월경죄’로 총살당하다
남북관계에서 최초의 밀사는 누구인가? 황태성이다. 일제시대 때 좌익 활동을 했고, 1946년 대구 폭동의 주동자였고, 1947년 월북했으며, 북한에서 무역상 부상(차관)까지 지냈던 사람이 1961년 9월1일 서울의 중앙대 정문에 홀연히 나타났다. 그는 당시 중앙대 시간강사였던 김민하를 찾았다. 경북 상주의 옆집에 살았고 박정희 의장의 대구사범 후배였던 김민하에게 자신은 밀사이니 박정희 의장이나 김종필 중앙정부보장을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것은 북한 지도부의 착각이었다. 북한은 5·16 직후 대남 비방 방송을 일시적으로 중단했다. 5·16 주체 세력의 과거 남로당 활동 경력에 주목했으며, 그런 이유로 대화의 가능성을 타진해보고 싶었을 것이다. 황태성은 5·16 주체 세력에게 접근할 수 있는 최적의 인물이었다. 그는 대구 폭동 당시 총살당한 박정희 의장의 형 박상희와 친구였다. 박상희와 조기분을 중매했던 당사자이기도 했다. 조기분은 박정희의 형수이면서, 동시에 김종필 당시 중앙정보부장의 장모였다. 황태성은 결국 조기분을 만났고, 조기분은 이 사실을 사위였던 김종필에게 알렸다.
황태성이 김종필 부장이나 박정희 의장을 실제로 만났는지는 여전히 ‘역사의 비밀’로 남아 있다. 서대문 형무소에 갇혀 있던 황태성의 운명은 1963년 5대 대통령 선거가 본격화되면서 기울어졌다. 사상논쟁이 불붙어 정치적 쟁점이 되면서 밀사 황태성은 간첩이 되었다. 1963년 10월22일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됐고, 같은 해 12월14일 황태성은 총살당했다. 대법원에서 간첩죄는 인정되지 않았다. 그의 죄목은 ‘불법월경죄’였다.
1972년 남북회담이 시작되면서, ‘공식 밀사’가 상호 방문을 하게 된다. 적십자회담 과정에서 중앙정보부 소속이던 정홍진과 노동당 조직부 소속인 김덕현이 정치적 대화를 시작했고, 각각 서울과 평양을 비밀리에 방문했다.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은 1972년 5월2일 정홍진이 갔던 경로로 평양을 방문했다.
방북 이틀째인 5월3일 이 부장은 김영주 노동당 조직지도부장과의 2차 회담을 마치고 모란봉 초대소로 돌아와 잠자리에 들었다. 새벽 1시쯤 그는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옷을 입고 급히 가자는 것이었다. 김일성 주석 관저에 도착할 때까지 그는 목적지를 몰랐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4층에서 내리자, 김일성 주석이 앞에 기다리고 있었다. 김일성이 손을 내밀었는데, 이후락은 그 손을 잡을 수 없었다.
그날은 억수같이 비가 내리는 날이었고, 이후락을 태운 차는 지름길로 오기 위해 비포장 산길을 달려왔다. 이후락은 여차하면 입에 넣으려고 서울에서 준비해온 청산가리를 손에 쥐고 있었다. 그런데 그만 김일성과 악수를 해야 하는 상황에서 청산가리 캡슐이 녹아 손에 달라붙어 있었다. 그는 주머니에 손을 다시 넣어 캡슐을 떼고 나서야 악수를 할 수 있었다. 이후락은 당시를 회상하며 “그때 내 태도가 수상했던지 김일성이 멈칫합디다”라고 말했다.
김일성이 손 내밀자 주저주저
1980년대 들어 안기부장 특별보좌관이던 박철언과 유엔대사였던 한시해가 비밀접촉을 재개했다. 안기부는 이 접촉 라인을 ‘88라인’으로 불렀다. 몇 번의 접촉 이후, 북한의 허담(노동당 중앙위원회 비서국 비서)이 서울을 방문했다. 1985년 9월5일 오전 11시 전두환 대통령은 경기도 기흥에 있는 최원석 동아그룹 회장의 별장에서 허담 일행을 맞이했다. 당시 남북 양쪽은 정상회담 개최에 원칙적인 합의를 했고, 밀사 접촉을 통해 정상회담에 포함될 의제들을 협의하는 단계였다.
점심식사를 하면서 대화는 계속됐다. 대화가 끝날 때쯤 전두환 대통령이 “평양에도 골프장 있어요?”라고 묻자, 허담은 “골프장이 하나 있습니다”라고 답했다. 전두환은 다시 말했다. “미국에서는 테니스 치는 것보다 골프 치는 것이 더 싸대요.”
이어서 1985년 10월16일 장세동, 박철언, 강재섭(당시 안기부 연구실장) 등이 개성역에서 특별 열차를 타고 평양을 방문했다. 다음날 오전 장세동과 박철언은 김일성을 만나러 갔고, 강재섭 등 다른 수행원들은 숙소에 남아 <조선의 별>이라는 영화를 관람했다. 장세동은 1984년 북한이 수해물자를 보낸 것에 대해 감사를 표했다. 김일성 주석은 “받은 것이 더 용감하지요”라고 호응했다. 1950년대부터 북한은 인도적 지원을 여러 차례 제안한 바 있다. 당시는 ‘제안 경쟁 시대’였다. 그러나 전두환 대통령은 예상을 깨고 북한의 제안을 진짜로 받았다. 그래서 최초의 이산가족 고향방문단 교류가 이뤄졌고, 최초의 경제회담이 시작됐다.
노태우 정부 들어와서도 비밀접촉은 계속됐다. 1990년 10월1일 서동권 안기부장이 북한을 방문했다. 서동권 부장은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총비서를 동시에 만난 유일한 밀사였다. 서동권 부장의 방북은 그동안 박철언팀이 중심이 된 ‘88라인’을 제치고 이뤄졌다. 서동권 부장이 김일성 주석과 만나던 10월1일은 바로 남한과 소련의 수교가 발표된 날이다. 박철언은 서동권의 방북을 “북한이 가장 민감한 때 가서 무슨 대화가 된다고 생각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라고 혹평했다.
2000년 정상회담 추진 과정에서도 밀사의 역할이 컸다. 박지원 문화부 장관이 나서 정상회담을 합의했고, 5월과 6월 초에는 임동원 국정원장이 비밀 방북했다. 당시 북한은 김대중 대통령의 금수산 기념궁전 방문을 강력히 요구했다. 김 대통령이 평양행 비행기를 탈 때까지도 이 문제는 결론이 나지 않았다. 평양에 도착하자마자 다시 한 번 임 원장은 “참배 문제를 고집하지 말아달라”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마침내 김 위원장이 만찬장에서 “임 원장이 이겼어요”라고 귓속말했다.
2007년 정상회담 추진 과정에서도 김만복 국정원장이 8월 초 두 번 북한을 방문했다. 그는 2005년 12월 통과된 ‘남북관계 발전에 관한 법률’에 따라 대통령으로부터 공식적인 임명장을 받은 최초의 특사였다. 물론 비밀 방북이었고, 정보부서 책임자였고, 판문점을 통해 방북했다는 점에서 앞선 사례와 완벽하게 일치한다.
차라리 전두환, 노태우에게 배워라
더욱 중요한 공통점이 있다. 밀사들의 방북 목적은 모두 정상회담 추진이었다. 전두환 정부는 1986년 아시안게임과 88년 올림픽 개최를 위한 평화적 환경 조성을 위해, 노태우 정부는 북방정책 추진을 위해,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는 군사적 긴장 완화와 경제협력 활성화를 위해 정상회담을 추진했다. 이명박 정부는 어떤 선택을 할까? 대북정책에서 지난 10년의 흔적을 지우겠다고 한다. 그러면 ‘공백의 5년’이었던 김영삼 정부로 돌아가겠다는 말인가? 그 길은 아니라고, 그 산은 아니라고 하는데도 걸어가고 있다. 차라리 전두환, 노태우 정부에서 배워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