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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마음속 38선도 무너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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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8-04-03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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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 뒤 명칭으로 신경전 벌인 첫 회담부터 어언 585번의 만남

▣ 김연철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연구교수

1948년 남과 북이 각기 정부를 수립했다. 공식적으로 분단 시대가 시작됐다. 60년이 흘렀다. 2007년 말 기준으로 지난 60년 동안 두 개의 분단 정부는 585번 만났다. 만나서 경쟁하고, 싸우고, 대화했다. 회담의 결과로 38선이 뚫리고 도라산 역을 지나 개성으로 길이 났다. 1948년 4월19일 김구 선생은 단독정부 수립을 막기 위해 38선을 넘으며, “마음속의 38선이 무너지고야 땅 위의 38선도 철폐될 수 있다”고 말했다. 땅 위의 38선에는 길이 나고 기차가 다니기 시작했다. 우리 마음속의 38선은 얼마나 무너졌을까?

전쟁까지 치른 남과 북이 26년 만에 만났다. 인사를 하고 말싸움을 한 뒤, 헤어졌다. 1971년 9월20일 판문점에서 열린 사상 첫 남북회담(적십자회담)은 4분 남짓 만에 끝났다. (사진/ <대한민국 정부 기록사진집>)


26년 만에 이뤄진 첫 만남 시간은 4분

첫사랑의 추억처럼, 첫 번째 만남은 오래 기억된다. 첫 만남의 장소는 판문점이었다. 경계선에 떠 있는 중립 지역, 판문점은 북쪽 땅도 남쪽 땅도 아니다. 공동경비구역(JSA)으로 부른다. 옛 경기 장단군 진서면 널문리(현 경기 파주시 진서면·북에선 개성시 판문점리). 판문점(板門店)이란 지명은 ‘널문(리) 가게’를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1951년 당시 풍경을 그리는 신문기사를 인용해보자.

“누렇게 익은 조밭 가운데 4개의 기둥에 의지한 천막 한 채가 서 있다. 아직 전기는 가설되지 않았다. 3채의 촌가 뒤뜰에는 포탄에 상처 입은 흙담이 무너져 있고, 그 옆 농부들은 누렇게 익은 벼를 거두기에 열중하고 있다. 그러나 판문점 북쪽 능선에서는 이따금씩 구름 같은 연기를 품으며 요란스럽게 울리는 포탄이 적진을 향하여 간단없이 날아가고 있다.”(<서울신문> 1951년 10월26일치 ‘휴전회담 장소인 판문점 풍경 소개’)

휴전협정 이후 천막이 있던 자리에 목조 건물이 들어섰다. 이후 남한은 ‘자유의 집’(1965), 북한은 ‘판문각’(1968)이라는 콘크리트 건물을 세웠다. 남북회담은 1970년대에 들어서서야 시작됐다. 미국 닉슨 행정부와 중국의 화해, 주한미군의 철수와 미국의 대화 요구, 그리고 박정희 정권의 국내 정치적 필요가 결합되면서 적십자 회담이 시작된 것이다.

분단 이후 처음으로 온 겨레가 지켜보는 가운데, 1971년 8월20일 낮 12시 3분 전 남쪽이 중립국 감독위원회 회의실에 나타났고, 12시 정각에 북쪽 대표가 입장했다. 처음으로 나눈 말은 당연히 ‘안녕하십니까?’였다. 서로 자기소개를 하고, 신임장을 교환했다. 남쪽의 이창렬 대표(적십자사 서무부장)가 물었다. “얼마 전에 비가 많이 내렸는데 북에는 피해가 없었나요?” 북쪽의 서성철 대표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말했다. “우리의 공식 명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적십자회 중앙위원회입니다. 앞으로 그렇게 불러주시오.” 이창렬 대표가 대꾸했다. “우리의 공식 명칭은 대한적십자사입니다. 간단해서 외기 좋지요.” 호칭을 둘러싼 신경전이었다. 그리고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26년 만의 만남은 그렇게 4분 동안 이뤄졌다.

첫 번째 만남의 결과로 남북 적십자 회담을 위한 1차 예비회담이 1971년 9월20일 열렸다. 회담이 시작되자, 이 역사적인 회담에서 누가 먼저 발언할 것인지를 두고 다툼이 발생했다. 북쪽 김태희 대표가 소개에 이어 “대표 여러분, 나라가 갈라지고 민족이 분열된 지 26년이라는 긴 세월이 흘러” 하면서 본론을 말하기 시작하자, 남쪽의 김연주 대표는 큰일났다고 생각했다. ‘반드시 역사적인 첫 회담의 첫 번째 발언은 우리가 해야 한다’는 방침이 정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김연주 대표도 기본 발언문을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1분 이상 두 대표가 동시에 발언하게 되자, 북쪽 단장이 “김 선생, 김 선생” 하며 큰 소리로 불렀다. 그러나 김 대표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발언문을 읽어 내려갔다. 작전은 성공했다.(<평화의 기를 들고> 이병웅·도서출판 늘품·2006)

적십자 본회담을 위해 ‘초고속’ 도로 닦아

이후 25차례의 예비회담과 실무회의를 거쳐 1972년 8월29일 1차 적십자 본회담이 평양에서 열리게 된다. 그해 3월과 5월에 각각 정홍진 중앙정보부 국장대리와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의 비밀 방북이 있었지만, 기자단을 포함해서 공식 대표단이 평양을 방문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그날은 회담 대표단이 집에서 출발하는 장면부터 일거수일투족이 언론에 중계됐다. 연도에 많은 시민들이 나와서 지켜봤다. 거의 모든 신문들은 회담이 끝난 뒤, ‘북한 101시간’ 등의 제목을 단 방북기를 일주일 이상 연재했다. 이범석 수석대표는 그의 쓰다만 회고록(이범석 대표는 1983년 버마 아웅산 사태 당시 외무부 장관으로 순직했음)에서 “판문점 ‘돌아오지 않은 다리’의 마지막 교각을 넘어섰을 때, 시계는 오전 10시31분7초였다”고 기록했다.

남과 북이 서로 상대 지역을 방문하기로 결정하자, 대결만큼 치열한 경쟁이 시작됐다. 우선 길부터 닦아야 했다. 당시 서울에서 판문점까지는 비포장이었고, 비 오는 날에는 회담 대표들이 타고 가는 차가 수렁에 빠진 일도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1971년 12월에 지시해서 석 달 만에 여러 건설회사가 구간을 나눠 초고속으로 통일로가 만들어졌다. 급한 나머지 뿌리도 없는 나무를 심기도 했다. 북한도 판문점에서 평양까지 250km의 도로를 100만 명의 인원을 동원해 초고속으로 건설했다. 회담을 위해 남한은 캐딜락 승용차를 급히 수입했고, 북한도 100대의 벤츠200 승용차를 수입했다. 보여주기 경쟁이 시작된 것이다. 이범석 수석대표의 회고록에는 이런 내용도 들어 있다. “봉산~사리원을 지나 황주로 가는 동안 비가 억수로 왔으나, 채소밭의 스프링클러는 계속 물을 뿌리고 있었다.”

그렇다면 북한 대표단의 서울 방문은 어떠했을까? 북한 대표단이 처음으로 서울을 방문한 것은 1972년 9월12일 2차 예비회담 때였다. 이날 판문점을 지나, 문산~박석고개~홍은동~무악재~사직터널을 거쳐 중앙청~시청 앞에 이르는 연도에는 많은 시민들이 나와 구경했다. 그러나 ‘기대’는 얼마가지 않았다. 9월13일 열린 회담은 텔레비전으로 생중계됐다. 처음으로 접한 북한 대표단의 연설은 이산가족 만남의 기대로 접어두었던 ‘마음속의 38선’을 불러왔다. 북쪽 자문위원이던 윤기복이 ‘우리 민족의 경애하는 김일성 수령’ ‘영광스러운 민족의 수도 평양’이라는 표현의 정치연설을 하자 난리가 났다. 9월13일 하루 동안 서울시경 112와 113 범죄 신고대에 접수된 169건의 전화 중 ‘북한의 정치 선전을 규탄하는 시민들의 항의 전화’가 60건이나 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9월15일 기자들과의 환담에서 “국민의 반공정신이 오히려 더욱 뚜렷해졌다”고 말했다.

이후 적십자 회담은 11월의 4차 회담까지 갔으나, 1973년 8월28일 북쪽의 중단 선언으로 2년6일 동안의 첫 번째 대화 국면은 막을 내렸다. 첫 번째 회담의 목적이던 이산가족 만남은 그로부터 12년이 지난 1985년 5월28일이 돼서야 성사될 수 있었다.

판문점에도 38선이 그어지다

그 침묵의 시간 동안 판문점에는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대화가 멈추자 총성이 울리기 시작했다. 1976년 8월18일, 공식 외교 용어로는 ‘나무 자르기 사건’으로, 한국의 교과서에는 ‘도끼 만행 사건’으로 불리는, 한국전쟁 이후 가장 전쟁에 근접했던 아찔한 충돌이 발생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한반도의 유일한 중립 지역인 판문점에도 38선이 그어졌다. 높이 7cm, 너비 40cm의 시멘트가 남과 북을 갈랐다.

* 무한대결의 남북관계사를 되짚어, 평화와 화해의 미래로 가는 길을 모색할 ‘냉전의 추억’은 격주로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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