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별장 통제로 지역개발 묶인 충북 청원군 주민들의 눈물과 절규
충북 청원군 문의면에서 대청호 상단을 끼고 돌면 갑자기 도로 사정이 좋아진다. 13번 군도의 시작지점이다. 한눈에도 시원스레 뚫린 길이 호반을 오른쪽에 두고 우거진 수풀 사이로 이어져 있다. 하지만 이 길은 중간이 끊겨 있다. 사람들은 지도상에 나 있는 길의 끝까지 가볼 수 없다. 육중한 쇠문으로 가로막힌 검문소 앞에서 차를 돌려야 한다. 그 너머로 대통령의 휴양지인 청남대가 있는 탓이다.
4월5일, 청남대 진입로에는 성묘길에 오르거나 나들이 나온 가족들이 많았다. 낮 1시께 쇠문 안쪽에서 차량 두대가 나왔다. 차에 탄 사람이 창문을 내리더니 사진을 찍는 한 가족을 제지했다. “여기는 사진 찍을 수 없는 곳입니다.” “왜 안 되나요?” “나는 저 안에 근무하는 장교인데, 여기는 보안구역입니다.” 어디를 둘러봐도 표지판은커녕 안내문구도 없었다. 장교는 긴말 필요없다는 표정을 짓고 떠났다.
“청남대 때문에 20여년째 한이 맺혔다”
남쪽의 청와대란 뜻으로 이름붙여진 청남대는 1983년 12월에 만들어졌다. 그뒤로 줄곧 대통령 휴양지로 사용되고 있다. 대통령이 이곳을 찾는 횟수는 한해에 많으면 서너 차례, 적으면 한두 차례이다. 김대중 대통령도 역대 대통령처럼 개각이나 남북회담 등 굵직한 일을 앞뒀을 때마다 청남대를 찾아 이른바 ‘청남대 구상’을 하곤 했다. 사람들은 대통령이 명절이나 휴가철에 어떤 책을 들고 갔는지는 알아도 청남대가 어디 있는지, 어떻게 생겼는지는 기실 잘 알지 못한다. 대통령의 별장이 들어설 정도로 공기좋고 물좋은 곳이라 자부심을 가질 법도 하건만, 청남대가 위치한 문의면 일대 주민들은 청남대를 고운 눈으로 보지 않는다. 심지어 “청남대 때문에 한이 맺혔다”고 말한다. 왜 그럴까. 청남대는 이들에게 단순한 ‘물리적 성역’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주민들과 청남대의 ‘악연’은 20여년을 거슬러올라간다. 75년 대청댐 개발계획이 세워지면서 일대는 국민휴양단지로 설계됐다. 주민들은 장밋빛 꿈으로 부풀어 올랐다. 전국에서 최고도시로 만들어주겠다는 관의 약속이 이런 꿈을 부추기기도 했다. 호반도시로 탈바꿈하면 관광소득을 올리리라는 기대로, 350여 가구에 이르던 수몰민들은 가구당 300만원에서 500만원씩 이주비만 받은 채 윗마을로 올라왔다. 이들이 십시일반 모은 돈으로 땅을 사서 만든 마을이 지금의 미천리, 면소재지이다. 사람들은 앞다퉈 은행빚을 얻어 집도 지었다. 대로변의 집들은 2층으로 올리고, 구락별로 지붕색깔까지 통일하라고 지시할 정도로 관에서도 적극적이었다. 한데 이 모든 것은 80년 전두환 전 대통령의 말 한마디로 완전히 물거품이 됐다. 이주대책추진위원이었던 장원재(59·현 청원군 의원)씨는 그 배경을 이렇게 설명한다. “80년 11월이 댐 준공식이었죠. 그때 막 전두환씨가 권력을 잡았을 때 아닙니까. 준공식에 대통령이 주변경관을 보더니 ‘아, 이런 데 별장이나 하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어요. 그뒤로 한마디 설명도, 사과도 없이 모든 계획을 하루아침에 취소시켜버린 거예요. 그렇게 들어선 게 청남대입니다.” 이미 허가를 받아 대청호에 모터보트도 띄우고 유람선도 운항하고 있던 중이었다. 그러나 휴게소 건설도 중단되고 빚을 내어 집을 짓거나 보트를 샀던 사람들은 빚더미에 올라앉았다. 북적대던 선착장은 20년이 지난 지금도 을씨년스런 모양으로 남아 있다. 지금은 대청호의 상류를 전망하는 곳으로 쓰이고 있다. 1만3천여명에 이르던 문의면 인구도 6천여명 남짓으로 줄었다. 배 띄우고 낚시도 할 수 없는데다 수몰지역이라 농지도 적어 먹고살 방도가 도무지 없기 때문이다. 현재 이곳은 상수원보호구역으로 지정돼 있다. 이 지역의 개발이 제한되고 있는 공식적인 이유도 바로 ‘상수원보호구역’이기 때문이다. 명분은 상수원 보호, 실제는 청남대 통제
하지만 문의면 전 번영회장 김신환(64)씨는 “문제의 시작은 청남대가 들어서면부터”라고 주장한다. “국민휴양지개발계획이 몽땅 취소된 게 청남대 들어서던 해였죠. 저는 보호구역으로 지정된 건 한참 뒤인 86년으로 기억하는데, 정부에서 외국처럼 녹지대니 자연보호지역이니 하는 걸 만들겠다고 막 나서던 때였어요. 공무원들이 책상에 지도 펴놓고 앉아 줄 북북 그어서 만든 거죠. 그 전에는 보호구역으로 지정됐다는 이야기를 못 들었어요. 아마 그전에 지정됐어도 지금 같지는 않았을 겁니다. 5공 때는 실제로 청남대 때문에 개발 못 시켜준 걸 위로한다며 대통령 행차 때 마을 사람들에게 소도 잡아주고 닭도 잡아주고 그랬습니다.”
환경부의 자료에는 대청댐이 상수원보호구역으로 지정된 것은 80년 11월로 나와 있다. 대청댐이 완공되던 바로 그해이다. 그러나 대청호에 여객선 운항이 허가난 시점은 82년 6월이고 국민휴양관광개발이 전면취소된 때는 이듬해인 83년 6월이다. 그리고 반년 뒤 청남대가 준공됐다. 김씨의 기억과 정확히 일치하는 것이다. 환경부 관계자 역시 86년 환경부가 생기고 업무가 넘어오면서 상수원보호구역에 대한 관리감독과 규제가 지금처럼 강화됐다고 설명한다. 실제로 89년까지 대청호에서는 지금은 행위규제 대상인 낚시대회가 열리곤 했다.
주민들은 일대의 개발이 댐이나 상수원보호구역 때문이 아니라 청남대 때문에 묶였다는 또 다른 근거를 몇 가지 꼽았다. 우선 대청댐 준공에 앞서 스포츠레저 사업권을 허가해줬고, 숙박업소나 음식점 등을 위해 대로변의 집들은 2층으로 설계하지 않으면 허가를 내주지 않았다. 또한 90% 가까이 조성됐던 신대리의 전통한옥마을도 순식간에 굴삭기로 밀어버렸다. 지금 청남대가 들어선 바로 그 자리이다. 친정이 전통한옥마을에서 가장 큰집을 지었다는 김정순(61·충북 문의면 미천리)씨는 당시의 일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돌기와를 올리라고 해서 살던 곳에서 기둥이나 문짝, 지붕을 다 뜯어서 올라왔죠. 집도 다 짓고 손님맞을 채비를 한 상태였는데 갑자기 나가라는 거예요. 처음 이주할 때는 이주비만 주더니 이때는 미안했던지 땅값을 조금씩 쳐줬어요. 공무원연수원이 들어선다니 따르는 게 도리라는 생각에 군말없이 보따리를 쌌죠. 그게 청남대인 줄은 나중에 알았어요.”
제2검문소에서 불과 몇백미터 못 미친 곳에 세워져 있는 망향탑은 이들의 사연을 증언하고 있다. 98년에 이 마을 출신인 청주교원대 김지택 교수가 고안설계한 탑에는 청남대 자리에 살던 63가구 가족들의 이름이 하나하나 적혀 있다. 탑 꼭대기에는 신대리에서 많이 났던 감을 대리석으로 깎아 올렸다. 김정순씨는 그뒤로 “영영 고향을 잃어버린 것 같다”고 씁쓸해했다. 청남대 주변에서 묘를 쓰던 이들은 90년대 초반까지 성묘나 벌초를 하러 들어갈 때마다 장총 멘 군인들의 ‘호위’를 받아야 했다고 한다. 그나마 통제구역 바깥쪽에 묘가 있었던 이들은 다행이다. 청남대 경호구역 안에 선친의 묘가 있던 이들은 소리소문없이 이장을 해야 했다.
대청댐 완공 뒤 관광수입 기대했건만
문의면 주민들의 과거사는 역대 권부가 민권을 어떻게 무시할 수 있는지 생생하게 보여준다. 청남대 공사는 공무원연수원이라는 명분으로 시작됐다. 기존의 허가건이 우르르 취소되는 과정에서 주민들은 뒤늦게 대통령 별장이 들어선다는 것을 알았다. 5공 시절에는 수십킬로미터 떨어진 마을까지 군인들이 철통경비를 섰다. 관광객은 얼씬도 하지 않았고, 고기잡이는커녕 배도 띄울 수 없었다.
참다못한 주민들은 88년 침묵시위를 필두로 95년께까지 16차례 과잉통제와 개발억제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였다. 하지만 그때마다 돌아온 청와대쪽의 대답은 “상수원보호구역이라 개발을 제한하는 것일 뿐 청남대 경호와는 무관하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전두환 대통령 시절에 소잡고 닭잡아 주민들을 달랬다면, 노태우 대통령 시절에는 체육공원으로, 김영삼 대통령 때에는 청남대 진입로 들머리의 천연동굴 앞에 생뚱한 분수대를 놓는 것으로 입막음을 했다.
웃지못할 에피소드도 있다. 95년에 문의면 주민대표 90여명이 관광버스를 대절해 청와대로 항의방문을 한 일이 있다. 주민대표 다섯 사람과 면담을 하면서, 청와대쪽은 선착장이 있는 미천리와 청남대 진입로 들머리가 속한 상장리 사이에 호수를 가로지르는 행운의 다리 등을 놓아주겠다고 약속했다. 주민대표들을 배웅하는 자리에서 관계자는 2000년 공사가 끝날 때까지 해마다 5억원씩 지원하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실제로 그해 5억원이 청원군으로 ‘쾌척’됐다. 그 돈은 청남대 진입로를 닦고 작은용혈 앞에 분수대를 짓는 데 쓰이고 나머지는 남계리의 장학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그것으로 그만이었다. 주민대표로 청와대 관계자를 면담했던 장원재 군의원은 “사기당한 꼴이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장 의원은 “지금 생각해보니 아마도 이듬해 있는 국회의원 선거 때문에 선심을 썼는지도 모른다”며 “군부 때는 무서워서 말 못 하고 문민 때는 속기만 했으니 역대 권력자들에게 우롱만 당한 꼴”이라고 분통을 터뜨렸다. 청남대를 둘러싸고 벌어졌던 일련의 일들은 지난 20년 정치사의 압축판이라는 것이다.
주민들이 겪은 일은 개발제한으로 소득원이 없어졌다는 생계형 문제만이 아니다. 심리적 배신감도 크다. 국민의 정부가 들어서며 주민들에게 남은 마지막 한가닥 기대는 청남대 개방이었다. 전국에서 관광객이 오면 주변지역에 관광소득도 생기고 지역발전도 되리라는 소박한 기대이기도 했다. 97년 대선 전 당시 김대중 대통령 후보도 대전·신탄진 유세 때 청남대를 개방하겠다고 약속한 터였다.
기자단 팔아 개방 반대 논리 세워
하지만 지난 2월 청와대에서 주민들에게 보내온 민원답변서를 보면 권부가 민권을 우롱하는 처사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임을 짐작할 수 있다. 경호실 명의의 답변서는 “대통령님의 공약사항인 청남대 개방이 아직까지 완전하게 시행되지 못하고 있음에 대해 미안하게 생각합니다”로 시작한다. 그리고 99년 지역신문 기자단과 청와대 출입기자단을 대상으로 1차 개방을 실시해 의견을 수렴한 결과 개방은 어렵다는 입장을 밝히며, 대신 청남대 주변 지역주민을 대상으로 제한적 개방을 실시하는 방안을 대통령 비서실과 함께 검토중이라고 쓰여 있다. ‘검토중’이라는 말은 이 지역 주민들이 역대 권부한테서부터 늘 들었던 말이었다.
99년 청와대 출입기자단이 다른 지방에 세미나를 가는 길에 잠깐 청남대에 들린 일은 있으나 구경삼아 들른 것일 뿐 개방을 주제로 논의를 한 적은 없다. 당시 청와대를 출입했던 한 기자는 “경호실에서 답변이 궁색하니 기자단을 팔아 핑계를 댄 것 같다”며 “상식적으로 이런 방식으로 경호실의 입장을 대변할 기자가 어디 있겠느냐”고 꼬집었다.
<한겨레21>은 청와대 경호실에 사실확인을 했다. 경호실 관계자는 “기자들은 청남대가 매우 조용하고 공기가 맑고 수목관리가 잘돼 있으므로 대통령님께서 자주 들르셔서 휴식을 취하시며 국정구상을 하시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이었으며, 그런 맥락에서 청남대의 일반 개방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분위기였던 것으로 알고 있다”고 완곡하게 해명했다. 부분개방에 대한 <한겨레21>의 질의에는 두 가지 이유를 들어 개방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답변했다. “소규모 단순건물로 볼거리가 못 된다”는 것과 “진입로가 협소하고 주차공간이나 화장실 등 관광객 편의시설이 없다”는 것이다.
대청호 주변의 산꼭대기에는 빠짐없이 경비초소가 있다. 청남대는 너른 대청호 유역 어디에서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 요새 중 요새였다. 대청댐 바로 옆 산의 중턱에 위치한 현암사에 올라서자 청남대의 주변 풍광이 한눈에 잡혔다. 하지만 이곳에서도 청남대를 볼 수는 없었다. 취재진을 안내했던 문의면 번영회장 김홍기씨는 “청남대는 레이더망에도 안 잡히는 요새라고 들었다”며 “제대로 경호를 하기 위해서라도 구역을 줄이는 게 차라리 좋지 않겠느냐”고 반문했다.
주민들은 규제하면서 청남대는 멋대로?
군부정권이 만든 각종 관행과 보호막으로 겹겹이 싸인 청남대는 그동안 정권과 국민 사이의 거리를 드러내주는 장소이기도 했다. 국민의 정부 출범 이후 대통령 경호실은 ‘국민과 함께하는 경호’를 모토로 내걸었다. 낮시간 중 청와대 주변 통행을 자유화하고 각종 바리케이드를 화단형으로 교체한 것도 경호실의 변화를 증명하는 사례이다. 집권 첫해인 98년 9월 김대중 대통령이 충북도청을 방문했을 때, 청남대로 인한 주민불편을 줄이기 위해 보호지역을 반경 4km에서 주요시설 500m 이내로 줄였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미 김영삼 대통령 시절 평상시에 제2검문소까지는 이미 개방했으므로 국민의 정부 들어서 피부에 와닿는 변화는 없었다. 청남대의 규모와 접근거리가 비공개된 상태이고 외곽은 군부대가 관리하므로 경호반경의 변화를 느끼거나 확인할 수 없는 셈이다.
국가연수원이 들어선다는 이유로 땅과 집을 내줬던 주민들은 20년 세월이 지난 지금 마음이 완전히 돌아선 상태다. 정직한 답변을 하거나 양해를 구하지 않은 채 “법대로”를 강조하는 청와대쪽에 도리어 “법대로”를 외치기도 한다. 현행 수도법은 상수원보호구역 내에 공장이나 숙박시설, 음식점, 축산시설, 양식장, 골프장 등 어떤 형태의 오염원도 들어설 수 없도록 행위를 규제하고 있다. 그렇다면 상수원보호구역에 속해 있는 청남대 역시 골프장을 둘 수 없다. 청와대의 답변처럼 상수원보호구역으로 지정된 뒤에 청남대가 들어선 것이라면 불법을 저지른 셈이다. 지난 99년 대전참여자치시민연대 등 대전과 청주지역의 시민사회단체는 청남대 골프장의 관리실태에 대한 정보공개를 요청한 일이 있다. 청와대 경호실은 “93년 이후부터 골프장 시설이 아닌 일반 잔디밭 수준으로 관리하고 있고 그 규모는 1만6500평 정도”라고 답변하며 “연간 농약 사용량은 ha당 5.5kg으로 11종 66kg”라고 밝혔다. 그러나 대전시민환경기술센터 유병로 소장(한밭대 환경공학과 교수)은 “ha당 5.5kg을 사용한다면 일반 민간골프장 수준이거나 조금 적게 쓰는 수준”이라고 지적했다. 대전참여자치시민연대와 대전환경련 등은 청남대를 방문해 실태를 조사하게 해달라고 요청했으나 “외부전문기관이 다 알아서 하고 있으니 걱정말라”는 이유로 거절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청와대 경호실은 또한 청남대 개방에 대한 <한겨레21>의 질의에 “캠프 데이비드(미국), 소치별장(러시아), 하야마궁(일본) 등 외국의 어느 나라도 국가원수의 휴양시설을 일반인의 관광대상으로 하는 나라는 없다”고 답변했다. 그러나 빼놓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외국의 국가원수는 아주 자주 휴양지를 찾는다는 것이다. 대통령학을 전공한 고려대 함성득 교수는 “미국의 경우 거의 주말마다 대통령이 휴양지로 간다”며 “주말 집무장소이자 회담장소로 쓰이는 곳과 일년에 두세 차례 방문해서 쉬는 장소를 단순비교하는 것은 무리”라고 지적했다. 함 교수는 또한 “이미 세계적으로 국가원수의 이미지가 인간화, 대중화, 민주화되는 추세이고 경호개념 또한 방위적 경호, 과학적 경호로 돌아선 지 오래”라며 “청남대가 국민들과 가까운 장소가 되면 그만큼 대통령과 국민의 거리가 줄어들 것”이라고 덧붙였다.
더이상 권부의 상징으로 남길 수 없다
주민들은 한때 청남대 폐쇄까지 주장했으나, 이젠 대통령도 사람인 이상 쉴 곳이 한 군데쯤은 있어야 한다는 데에는 큰 이견이 없다. 게다가 국민이 손수 뽑지 않은 대통령이 우격다짐으로 만든 별장을 국민이 손수 뽑은 대통령이 사용하는 건 기쁘고도 반가운 일일 수도 있다. 하지만 청남대가 단순한 대통령의 휴식처인지, 막강한 권부의 상징으로 존재하는지는 더 늦기 전에 되새겨봐야 할 것이다. 국민의 눈에서 눈물을 닦아주겠다던 김대중 대통령이 다른 것도 아닌 대통령의 별장 때문에 20년간 눈물을 흘린 문의면 주민들을 무시하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
청원=글 김소희 기자 sohee@hani.co.kr
사진 이용호 기자 yhlee@hani.co.kr

사진/대청댐 옆 산 현암사에서 바라본 청남대 주변 풍광. 대청호 너머 요새처럼 움푹 팬 곳에 청남대가 들어서 있다.
남쪽의 청와대란 뜻으로 이름붙여진 청남대는 1983년 12월에 만들어졌다. 그뒤로 줄곧 대통령 휴양지로 사용되고 있다. 대통령이 이곳을 찾는 횟수는 한해에 많으면 서너 차례, 적으면 한두 차례이다. 김대중 대통령도 역대 대통령처럼 개각이나 남북회담 등 굵직한 일을 앞뒀을 때마다 청남대를 찾아 이른바 ‘청남대 구상’을 하곤 했다. 사람들은 대통령이 명절이나 휴가철에 어떤 책을 들고 갔는지는 알아도 청남대가 어디 있는지, 어떻게 생겼는지는 기실 잘 알지 못한다. 대통령의 별장이 들어설 정도로 공기좋고 물좋은 곳이라 자부심을 가질 법도 하건만, 청남대가 위치한 문의면 일대 주민들은 청남대를 고운 눈으로 보지 않는다. 심지어 “청남대 때문에 한이 맺혔다”고 말한다. 왜 그럴까. 청남대는 이들에게 단순한 ‘물리적 성역’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주민들과 청남대의 ‘악연’은 20여년을 거슬러올라간다. 75년 대청댐 개발계획이 세워지면서 일대는 국민휴양단지로 설계됐다. 주민들은 장밋빛 꿈으로 부풀어 올랐다. 전국에서 최고도시로 만들어주겠다는 관의 약속이 이런 꿈을 부추기기도 했다. 호반도시로 탈바꿈하면 관광소득을 올리리라는 기대로, 350여 가구에 이르던 수몰민들은 가구당 300만원에서 500만원씩 이주비만 받은 채 윗마을로 올라왔다. 이들이 십시일반 모은 돈으로 땅을 사서 만든 마을이 지금의 미천리, 면소재지이다. 사람들은 앞다퉈 은행빚을 얻어 집도 지었다. 대로변의 집들은 2층으로 올리고, 구락별로 지붕색깔까지 통일하라고 지시할 정도로 관에서도 적극적이었다. 한데 이 모든 것은 80년 전두환 전 대통령의 말 한마디로 완전히 물거품이 됐다. 이주대책추진위원이었던 장원재(59·현 청원군 의원)씨는 그 배경을 이렇게 설명한다. “80년 11월이 댐 준공식이었죠. 그때 막 전두환씨가 권력을 잡았을 때 아닙니까. 준공식에 대통령이 주변경관을 보더니 ‘아, 이런 데 별장이나 하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어요. 그뒤로 한마디 설명도, 사과도 없이 모든 계획을 하루아침에 취소시켜버린 거예요. 그렇게 들어선 게 청남대입니다.” 이미 허가를 받아 대청호에 모터보트도 띄우고 유람선도 운항하고 있던 중이었다. 그러나 휴게소 건설도 중단되고 빚을 내어 집을 짓거나 보트를 샀던 사람들은 빚더미에 올라앉았다. 북적대던 선착장은 20년이 지난 지금도 을씨년스런 모양으로 남아 있다. 지금은 대청호의 상류를 전망하는 곳으로 쓰이고 있다. 1만3천여명에 이르던 문의면 인구도 6천여명 남짓으로 줄었다. 배 띄우고 낚시도 할 수 없는데다 수몰지역이라 농지도 적어 먹고살 방도가 도무지 없기 때문이다. 현재 이곳은 상수원보호구역으로 지정돼 있다. 이 지역의 개발이 제한되고 있는 공식적인 이유도 바로 ‘상수원보호구역’이기 때문이다. 명분은 상수원 보호, 실제는 청남대 통제

사진/5공 시절에는 청남대에서 수킬로미터 떨어진 제1검문소까지 군인들이 철통경비를 했다(위).문민정부 때부터 제2검문소까지는 일반일이 들어올 수 있게 됐다(아래).

사진/청남대가 들어서기 전 모터보트와 유람선을 띄웠던 미천리 선착장. 을씨년스런 모습으로 남아 있다.

사진/20년 전 수몰민이주대책추진원이었던 청원군의원 장원재씨는 “역대 권부에 우롱만 당해왔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사진/지난 2월5일 청와대 경호실에서 문의면 주민들에게 보낸 민원답변서. 기자단의 여론을 핑계삼아 개방이 어렵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사진 이용호 기자 yhlee@hani.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