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잘 팔린다는 최인호의 소설 <상도>에 이런 얘기가 나옵니다. 조선후기 세도가인 박종경이 하루는 사랑방에 모인 객들에게 수수께끼 같은 문제를 냅니다. 숭례문(지금의 남대문)을 드나드는 사람이 하루 3천이라고도 하고 7천이라고도 하는데, 정확히 몇이냐는 것입니다.
파수하는 군병들조차 잘 모르는 수치여서 다들 어안이 벙벙해 합니다. 그런데 소설의 주인공인 거상 임상옥은 답을 냅니다. 단 두 사람, 이(利)씨 성을 가진 이와 해(害)씨 성을 가진 이뿐이라는 것입니다. 드나드는 숫자가 몇이든 둘로 나누면 대감에게 이로운 사람과 해로운 사람이 될 것이고, 그 나머지는 셀 필요도 없다는 설명입니다. 머릿수를 묻는 물음에 성격으로 답한 것, 곧 양을 질로 전환시켜 간파한 것이 흥미롭습니다.
새로 편집장을 맡게 된 저의 소임이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봅니다. 물론 지금까지 <한겨레21>이 그러해왔듯 인권과 진보, 인간에 대한 희망과 신뢰라는 화두를 부여안고 걸어가야 할 것입니다. 여기에는 이론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작금의 언론현실을 볼 때 이런 원칙만으로 가름할 수 있을지 두렵습니다. 정보의 홍수시대라고 할 만큼 정보가 많은 것 못지않게 그 내용이 무척이나 혼란스럽기 때문입니다.
언론계를 돌아보면 노력하는 기자, 올바른 편집의 한켠에는 권언유착, 상업주의, 편파왜곡 자의적 보도 등이 잠재적 형태로 또는 노골적으로 판을 치고 있습니다. 물론 이것이 느닷없이 최근에 생겨난 일은 아닙니다. 전반적인 경기침체 속에 해묵은 언론계의 곪은 상처가 터지면서 증세가 심해진 것으로 진단됩니다.
오죽하면 할말은 한다는 구호까지 생겨났겠습니까마는, 이보다 더한 문제는 신문·방송·잡지들이 거의 예외없이 할말 못할말 가리지 않고 써대고 떠들어대는 데 더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언론이 사회의 목탁이라는 어구는 한때의 공염불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언론이 문제라면 그 일차적 책임은 종사자에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언론에만 모든 탓을 돌릴 수는 없습니다. 정치·경제·사회 등 언론이 바탕하고 있는 환경이 그대로 반영, 투영됐다고도 할 수 있겠지요. 어쨌든 언론은 수술이 요구되는 실정입니다. <한겨레>나 <한겨레21> 또한 결코 이런 문제에서 독야청청 자유롭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펜은 사회의 칼입니다. 9번을 잘 쓴들, 1번을 엉뚱하게 휘두른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좀더 쉽게, 그리고 몇걸음 물러서서 이런 생각에 다다랐습니다. 임상옥은 박 대감을 기준으로 했지만 우리는 우리 사회에 이씨, 곧 이로운 존재가 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최소한 해씨는 되지 말자. 그렇습니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해악은 절대 끼쳐서는 안 된다.
이와 해라는 양분법으로 언론을 재단할 수 있느냐는 반론도 예상되지만, 이런 정도의 분별력을 견지하는 것도 그리 쉬운 상황이 아니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우선은 이런 잣대와 자세로 신발끈을 매겠습니다. 그리고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것이 진정 이로운 일인가는 독자 여러분께 물어가며 길을 찾겠습니다. 저와 우리 기자들은 우리 사회와 독자 여러분께 하나라도 보탬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한겨레21 편집장 정영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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