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의 한국거리 ‘중싱지에’의 한국 출신 화교집단, 그들이 품은 그리움과 서러움
“Do you know Korea street?”
중년의 대만 택시기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타이베이 역전에서 출발해 15분쯤 달렸을까? 타이베이 외곽의 중정치아오(中正橋)를 건너자 용허시(永和市)의 팅시(頂溪)역이 나왔다. 번화한 역을 끼고 돌아가자 흩뿌리는 빗줄기 사이로 낯익은 한자들이 눈에 들어온다. 韓達行(한달행), 新韓商行(신한상행), 順興韓食堂(순흥한식당), 仁川服飾(인천복식)…. 이름부터 한국 냄새를 물씬 풍기는 간판들은 이곳이 대만의 한국거리 중싱지에(中興街)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요금을 내고 내리는 순간, 택시기사가 웃으며 한마디 던진다. “Korea street is famous.” 한국시장에서 옷을 떼다 파는 가게들
가는 빗줄기가 아열대의 더위를 식혀주던 지난 3월9일 오후 3시. 상가가 200m 넘게 늘어선 한국거리의 첫 집 ‘한달행’의 문을 열었다. 여기저기 널린 옷가지를 정리하느라 세 아주머니의 손놀림이 바쁘다. “안녕하세요”하고 인사를 건네자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한 아주머니가 “네. 한국에서 오셨어요?”라며 반색을 한다. 한국에서 태어나 18년 전 결혼하면서 대만으로 건너온 이 가게 주인이다. 심드렁한 표정으로 다시 옷정리에 골몰하는 나머지 두 아주머니. 주인은 눈짓으로 두 사람을 가리키며 “다들 한국에서 살다온 사람들”이라며 “여기서도 한국 출신 화교들은 가깝게 지낸다”고 전한다. 몇년 전 ‘한화(韓華)협회’를 만들어 정기적인 모임을 갖고 있다. 사방으로 화사한 블라우스들이 진열된 가게 한켠에 고춧가루, 다시다, 인삼 등속이 쌓여 있다. 그는 웃으며 “여기서도 다 김치 담궈 먹는다”며 “우리집 애들도 된장, 고추장을 잘 먹는다”고 전한다. 아주머니의 남편은 한국 음식점을 운영하고 있다. 타이베이에서 옷가게를 하던 ‘한달행’ 주인이 중싱지에에 정착한 때는 15년 전으로 거슬러올라간다. 한국거리가 형성되기 시작한 지 몇해 지난 시점이다. ‘한달행’ 주인 아주머니는 “원래 대만의 친척들에게 한국옷을 선물한 것이 시초”라고 말한다. 그 당시 전자산업 위주였던 대만에 비해 한국은 일찍이 섬유산업이 발달했다. 특히 남대문, 동대문시장의 옷은 저렴한 가격에 디자인과 색상이 다양해 인기가 좋았다. 이재에 밝은 화교들은 70년대부터 보따리장사를 시작했고, 80년대 중반 대만의 전면 수입개방이 시작되면서 아예 한국옷 밀집 상가를 세웠다. 한적한 골목이었던 중싱지에가 번화가로 변모한 것이다. 처음 20여개로 시작된 중싱지에의 옷가게는 현재 80여개에 이른다. 이중 절반 이상을 한국 출신 화교들이 운영하고 있다. 여전히 한국시장에서 옷을 떼다 파는 가게들은 대만 전국에 옷을 공급하는 도매상 역할도 한다. ‘한달행’을 나와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맞으며 걷다보니 어느새 중싱지에의 끄트머리에 다다랐다. “한국 토산품”이라고 크게 쓴 ‘금등상행’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꾸벅꾸벅 졸던 추쉐웨이(44·初學緯)가 인기척에 눈을 뜬다. “아직 반팔 옷이 안 들어와 한가하다”며 겸연쩍은 첫 마디를 건네는 추. 한국에서 태어난 그는 오랜만에 만난 한국 사람이 반가운 듯 서소문에서 보낸 어린 시절 이야기며 화교학교 시절의 추억을 끊임없이 쏟아낸다. “친구들하고 학교 가다 한국 애들을 만나면 ‘짱꼴라 짱꼴라’ 하는 놀림도 많이 받았지. 그러면 우린 ‘바가지 바가지’라고 놀리고. 싸우기도 했지만 그리워…. 고등학교 때 아버지 따라 대만으로 왔는데 처음엔 적응하기 힘들었어.” “박정희 정권 시절 너무 힘들었어요”
줄곧 화교학교를 다녔지만 학교 분위기와 수업방식이 다른 탓에 대만 학교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다는 추쉐웨이. 중싱지에 거리의 터주대감인 추의 가족사는 한화(韓華) 유민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산둥성 출신인 추의 아버지는 가난을 피해 일제시대에 한국으로 건너왔다. 인천을 거쳐 서울에 정착한 추의 아버지는 서소문에 중국 음식점을 열었다. 가게는 늘 손님으로 붐볐지만 사업을 일으키기에 한국은 너무 척박한 곳이었다.
화교들의 경제권 장악을 우려한 한국 정부는 해방 직후부터 차별 정책을 실시했다. 이승만 정권 시절에는 중국 음식점에 높은 세율을 매기고, 음식값을 통제하는 방식으로 화교들의 경제권을 압박했다. 박정희 정권이 들어서면서부터는 한국에 발붙이기조차 어려울 정도였다. 60년 ‘외국인 토지소유 금지법’이 제정됐고, 70년 시행된 ‘외국인 토지취득 및 관리에 관한 법’에 따라 화교들에게는 1가구·1주택·1점포 소유만이 허용됐다. 그나마 집은 200평 이하, 점포는 50평 이하로 제한되었고, 남에게 임대조차 할 수 없었다. 더구나 2세들이 커감에 따라 교육문제까지 겹쳤다. 한국 정부가 화교학교를 정규 중·고교 과정으로 인정하지 않아 검정고시를 거쳐야만 한국 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다. 외국인 특례 입학이 있기는 했지만 그나마 인원이 제한됐다. 신분도 불안했다. 영주권 제도가 없어 만년 외국인으로 2년마다 비자를 갱신해야 했던 것이다.
이런 상황이다보니 추가 고등학생이 되던 73년 아버지는 어렵게 닦은 생활기반을 버리고 이주를 결심했다. 추의 집안뿐 아니라 화교들의 이민 행렬은 70년대 내내 이어졌다. 60년대 말 4만명이 훨씬 넘었던 화교 인구는 80년대 초 2만여명 선으로 줄어들었다. 70년대에만 2만명가량이 차별을 피해 미국, 오스트레일리아, 대만 등지로 떠난 것이다. 역설적으로 차별에 밀려 한국을 떠난 화교들이 하나둘 중싱지에로 모여들어 오늘날 대만의 한국거리가 형성됐다.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그립다”고 했던 추는 이내 “한국은 화교들이 살기 어려운 나라”라며 양면적 감정을 드러냈다.
추의 회한을 뒤로 하고 다시 중싱지에를 되돌아 올라갔다. 갑자기 굵어진 빗줄기를 피하려고 건물 안으로 뛰어들자 한국 달력을 걸어놓은 가게가 눈에 띈다. 이불을 주로 파는 중싱지에 33호 ‘금옥’(金玉)이다. 한참을 우두커니 서서 가게 안을 들여다보자 주인 아주머니가 나와 “커피라도 한잔 하고 가라”며 손을 잡아끈다. 커피를 타내오며 “남대문시장에서 파는 커피를 너무 좋아한다”고 말을 붙이는 주인 아주머니. “여기 커피는 그런 맛이 안 난다”고 덧붙이는 그의 말 속에 그리움이 묻어난다. 한국에서 태어난 이들 부부는 70년대 대만으로 왔다. 올해 쉰셋인 주인 아저씨는 화교학교를 졸업하고 타이베이대학을 다녔고, 아주머니는 수도여자사범대학을 졸업한 엘리트였다. 하지만 어렵게 한국 대학에 진학한 아주머니는 한국에서 자리잡기가 어려웠다. 애초 한국 학교에서 교편을 잡는 것은 불가능했고, 잠시 화교학교 선생님을 한 것이 교사 경력의 전부다. 주인 아저씨는 “한국에선 대학을 나와도 음식 장사밖에 갈 길 없을 것 같아” 대만으로 유학왔다. 명문 타이베이대학 토목학과를 나와 건설회사에 근무하던 그는 약 10여년 전 중싱지에로 들어왔다.
어디에도 정을 못 붙이는…
문을 닫은 건너편 가게를 가리키며 “요즘엔 중싱지에 장사도 많이 떨어졌다”고 푸념하는 주인 아저씨. 침체된 대만 경기 탓인지 요즘 장사가 신통치 않다. 5년 전 100집까지 늘며 절정에 달했던 가게 수가 최근 80여집까지 줄어들었다. 그는 “한국의 인건비가 비싸지면서 물건값이 올라간 것도 한 원인”이라고 말한다. 최근에는 한국 대신 인건비가 저렴한 중국에서 옷을 들여오는 가게가 늘고 있다.
점점 장사가 어렵다며 푸념을 늘어놓던 끝에 그는 “첫째 고향은 중국 본토, 둘째 고향은 한국, 대만은…”이라며 말꼬리를 흐렸다. 옆에서 쏟아지는 빗줄기를 보며 “대만은 덥고 습해서 싫다”고 되뇌는 아주머니의 말에서 어디에도 정붙이지 못하는 ‘유민’의 처량함이 전해졌다. 우연히 ‘금옥’에 들른 중싱지에의 유일한 한국인 최근화(50·신한상행)씨는 “대만 사람들은 돌아온 화교들을 ‘와이셩런’(外省人)이라고 부르며 온전한 중국인으로 여기지 않는다”고 귀띔한다. 한국에서는 중국인으로 차별받았던 이들이 대만에서는 ‘반쯤’ 한국인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돌아갈 수 없는 뿌리인 중국과 태를 묻었으나 밀려난 한국, 차별을 피해 스며든 대만, 그 어디도 이들에게 안온한 고향은 못 된다.
손님을 맞이하다 잠시 짬을 내 앉은 주인 아주머니는 “그래도 요즘은 참 좋아졌다”며 “한국에 있는 우리 조카들은 다 대기업에 다닌다”고 자랑한다. 그의 말처럼 차별의 벽은 서서히 무너지고 있다. 98년 외국인 부동산 소유제한 철폐로 예전보다 경제활동이 자유로워진 것이 대표적인 예다. 하지만 여전히 이들의 처지는 한국이 항상 “차별받는다”며 항의하는 재일동포의 처지와 비슷하다. 참정권을 보장받지 못하고, 영주권 제도가 없어 5년마다 장기체류(F2)비자를 갱신해야 하는 불안한 신분이 그렇다. 우리 안의 차별을 없애야 ‘항의’도 떳떳한 법이다. 비에 젖은 중싱지에를 벗어나며 든 생각이다.
타이베이=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사진/70년대 한국 화교들이 차별에 밀려 재이민을 떠나면서 형성된 대만의 한국거리 중심지에 익숙한 한자 간판에서 유민의 역사를 읽을 수 있다.
중년의 대만 택시기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타이베이 역전에서 출발해 15분쯤 달렸을까? 타이베이 외곽의 중정치아오(中正橋)를 건너자 용허시(永和市)의 팅시(頂溪)역이 나왔다. 번화한 역을 끼고 돌아가자 흩뿌리는 빗줄기 사이로 낯익은 한자들이 눈에 들어온다. 韓達行(한달행), 新韓商行(신한상행), 順興韓食堂(순흥한식당), 仁川服飾(인천복식)…. 이름부터 한국 냄새를 물씬 풍기는 간판들은 이곳이 대만의 한국거리 중싱지에(中興街)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요금을 내고 내리는 순간, 택시기사가 웃으며 한마디 던진다. “Korea street is famous.” 한국시장에서 옷을 떼다 파는 가게들
가는 빗줄기가 아열대의 더위를 식혀주던 지난 3월9일 오후 3시. 상가가 200m 넘게 늘어선 한국거리의 첫 집 ‘한달행’의 문을 열었다. 여기저기 널린 옷가지를 정리하느라 세 아주머니의 손놀림이 바쁘다. “안녕하세요”하고 인사를 건네자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한 아주머니가 “네. 한국에서 오셨어요?”라며 반색을 한다. 한국에서 태어나 18년 전 결혼하면서 대만으로 건너온 이 가게 주인이다. 심드렁한 표정으로 다시 옷정리에 골몰하는 나머지 두 아주머니. 주인은 눈짓으로 두 사람을 가리키며 “다들 한국에서 살다온 사람들”이라며 “여기서도 한국 출신 화교들은 가깝게 지낸다”고 전한다. 몇년 전 ‘한화(韓華)협회’를 만들어 정기적인 모임을 갖고 있다. 사방으로 화사한 블라우스들이 진열된 가게 한켠에 고춧가루, 다시다, 인삼 등속이 쌓여 있다. 그는 웃으며 “여기서도 다 김치 담궈 먹는다”며 “우리집 애들도 된장, 고추장을 잘 먹는다”고 전한다. 아주머니의 남편은 한국 음식점을 운영하고 있다. 타이베이에서 옷가게를 하던 ‘한달행’ 주인이 중싱지에에 정착한 때는 15년 전으로 거슬러올라간다. 한국거리가 형성되기 시작한 지 몇해 지난 시점이다. ‘한달행’ 주인 아주머니는 “원래 대만의 친척들에게 한국옷을 선물한 것이 시초”라고 말한다. 그 당시 전자산업 위주였던 대만에 비해 한국은 일찍이 섬유산업이 발달했다. 특히 남대문, 동대문시장의 옷은 저렴한 가격에 디자인과 색상이 다양해 인기가 좋았다. 이재에 밝은 화교들은 70년대부터 보따리장사를 시작했고, 80년대 중반 대만의 전면 수입개방이 시작되면서 아예 한국옷 밀집 상가를 세웠다. 한적한 골목이었던 중싱지에가 번화가로 변모한 것이다. 처음 20여개로 시작된 중싱지에의 옷가게는 현재 80여개에 이른다. 이중 절반 이상을 한국 출신 화교들이 운영하고 있다. 여전히 한국시장에서 옷을 떼다 파는 가게들은 대만 전국에 옷을 공급하는 도매상 역할도 한다. ‘한달행’을 나와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맞으며 걷다보니 어느새 중싱지에의 끄트머리에 다다랐다. “한국 토산품”이라고 크게 쓴 ‘금등상행’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꾸벅꾸벅 졸던 추쉐웨이(44·初學緯)가 인기척에 눈을 뜬다. “아직 반팔 옷이 안 들어와 한가하다”며 겸연쩍은 첫 마디를 건네는 추. 한국에서 태어난 그는 오랜만에 만난 한국 사람이 반가운 듯 서소문에서 보낸 어린 시절 이야기며 화교학교 시절의 추억을 끊임없이 쏟아낸다. “친구들하고 학교 가다 한국 애들을 만나면 ‘짱꼴라 짱꼴라’ 하는 놀림도 많이 받았지. 그러면 우린 ‘바가지 바가지’라고 놀리고. 싸우기도 했지만 그리워…. 고등학교 때 아버지 따라 대만으로 왔는데 처음엔 적응하기 힘들었어.” “박정희 정권 시절 너무 힘들었어요”

사진/한국에서 태어나 고등학교까지 마치고 대만으로 돌아온 추쉐웨이. 남대문에서 여성의류를 떼다 파는 옷가게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