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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외교비화와 쓸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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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1-03-27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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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외교안보팀이 3·26개각을 통해 경질됐습니다. 최근 언론재단 초청 정책포럼에서 한-미, 한-러 정상회담의 비화를 공개한 뒤 집중포화를 받았던 이정빈 외교통상부 장관도 ‘예상대로’ 자리를 물러났습니다. “막후외교 공개 파문” “외교수장의 가벼운 입” “털어놓지 않아야 할 극비교섭 사안” 등의 비난이 한꺼번에 쏟아졌을 때부터 이미 그의 낙마는 기정사실이나 다름없었습니다.

물론 외교관례상 막후비화를 공개한 것을 잘했다고 칭찬하기는 어렵습니다. 상대국에 꼬투리를 잡힐 빌미가 될 수 있다는 지적도 백번 지당한 말씀입니다. 하지만 꼭 그런 것일까요?

첫째, 당사자는 가만히 있는데 우리 언론이 먼저 발끈해 떠들어대는 태도입니다. 이 전 장관의 발언이 문제였다면 항의를 할 쪽은 미국입니다. 그래야 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당사자인 미국은 가만히 있는데 우리 언론이 미국을 대신해서 총대를 멘 꼴입니다. 참고로, 워싱턴 주미대사관에 확인한 결과 지금까지 이 문제와 관련해 미국쪽이 항의표시를 해오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하기야 한국 언론이 알아서 먼저 떠들어주는데 미국이 구태여 나설 일도 없었겠지요.

둘째, 이 문제를 ‘파문’ 차원에서만 접근하다보니 정작 ‘진실’에 대한 관심은 뒷전으로 밀려나고 말았다는 점입니다. 이 전 장관의 발언은 미국의 군사주의적 대한반도 정책의 구체적 실상, 그리고 국가미사일방어(NMD) 문제를 둘러싼 미국·러시아 등 열강의 물밑 각축전이 얼마나 치열한가를 생생히 보여주는 예였습니다. 이 전 장관이 곧바로 자신의 발언을 취소했지만 그것이 일종의 ‘히트 앤 런’ 수법이라는 것은 웬만한 사람은 알 수 있었습니다. 사실 미국이 정상회담에 앞서 한국쪽에 보내온 합의문 초안은 거의 “항복문서”에 가까웠다고 합니다. 따라서 ‘파문’을 비난하는 힘의 절반이라도 기울여 문제의 본질에 접근하려는 노력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말바꾸기’를 나무라는 목소리만 높았습니다. 본말이 전도돼도 한참 전도됐다고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

세번째, 같은 외교비화를 공개해도 미국과 다른 나라를 대하는 태도가 전혀 다르다는 점입니다. 만약 이 전 장관이 이날 정책포럼에서 한-러 정상회담 막후만 공개했다면 언론이 그런 집중포화를 퍼부었을까요. 사실 외교통상부는 이미 한-러 정상회담 결과를 설명하면서 러시아가 탄도탄요격미사일(ABM)조약과 관련해 강력한 표현을 요구했으나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비화를 공개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잠잠 했습니다. 여기서도 대미 사대주의적 인식의 일단이 확인됩니다.

최근 한상진 교수는 조선일보 김대중 주필의 글을 비판하면서 용미당쟁(用美黨爭)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바 있습니다. 미국을 국내정치에 끌어들이는 행태를 설명하는 매우 적절한 표현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전 장관의 발언을 둘러싼 소용돌이에서도 용미당쟁의 냄새가 물씬 풍겨납니다.


한반도를 둘러싼 격동하는 정세 속에서 우리가 진정으로 고민해야 할 것은 어쩌면 용러항미(用露抗美)나 용중제미(用中制美)의 문제일지도 모릅니다. 물론 우리의 국력이나 현실 여건상 자칫 그런 섣부른 시도는 화를 불러올지도 모릅니다. 다만 중요한 것은 그런 정신이 아닐까 합니다. 미국 일변도의 시각에서 벗어나 우리가 주체적으로 한반도의 운명을 결정해나가겠다는 기개 말입니다. 그런 기개와 쓸개를 잃어버린 현실, 여기에 비극이 있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한겨레21 편집장 김종구 kj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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