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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엄마들의 맞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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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7-06-21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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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지선 기자 sun21@hani.co.kr

“우리 엄마 요즘에 밥도 잘 안 해주시잖아. 몇 년 새 많이 변하셨더라고.” 친구는 고등학교 때 유학을 떠나 대학까지 마치고 얼마 전 귀국했다. 그는 형제가 많은 편이라 언니 둘에 남동생 하나가 있지만 언니 둘도 모두 유학을 가거나 외국에서 직장을 잡았고 남동생은 군복무 중이다. 부동산 임대업을 해 재력이 있는 부모님은 아이들의 교육에 돈을 아끼지 않으셨다. 자식들은 다들 20살을 전후로 유학을 떠났고 부모님만 집에 남았다. 시끌벅적하던 집에 찾아온 적막감 때문이었을까. 언젠가부터 엄마는 컴퓨터 앞에 앉았다. 그리고 ‘온라인 맞고’의 세계에 빠지셨다. 하루 종일 친구의 어머니는 ‘맞고’를 치신다고 한다. 그럼 아버지는 무얼 하시느냐고 물었더니 다른 방에서 다른 컴퓨터로 ‘맞고’를 하신단다. 그러나 두 분이 같이 ‘맞고’를 하진 않으신다고.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너네 엄마도 그러시냐. 우리 엄만 가족이 거실에서 TV 볼 때도 혼자 방에 들어가셔서 ‘고스톱’ 하셔. 그거 하는 시간이 제일 마음 편하대.” 다른 친구도 맞장구친다. 고부간의 갈등이 심해 쉰을 넘긴 나이에도 시어머니를 모시며 고생을 하고 계신다는 친구 어머님은 저녁 설거지를 마치면 친구방에 쓱 들어가 컴퓨터를 켜신단다. 돈을 다 잃으면 충전을 거듭하니 몇 시간도 거뜬하다고. 감정의 기복이 없는 편인 줄 알았던 엄마가 ‘온라인 고스톱’으로 200만원(사이버 머니)을 따던 날 어찌나 기뻐하시던지 뭔가 죄송한 마음까지 들더란다. 딸로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고스톱’ 하는 엄마 뒤에 서서 “엄마, 이거 먹어!” “엄마, 고! 고!” 하는 정도. 그나마도 직장일이 바빠지면서 늦게 들어가는 날이 많이져 요즘엔 못해드린단다.

게임포털 사이트 피망(www.pmang.com)의 게임 장르별 유저층 비율을 분석해보니 역시 다른 게임에서는 낮은 비율로 나타나는 40대 이상 여성 유저들이 유독 ‘고스톱’에서는 강세를 보였다. 이 사이트의 온라인 고스톱 이용자는 40대 이상이 59%, 여성 이용자가 49%다(2007년 3월 기준). 드라마 <내 남자의 여자>의 첫 장면도 ‘국민 언니’라는 40대의 은수가 온라인 고스톱을 치며 전화로 신세한탄을 하는 장면이었니, 어느새 이런 모습은 적나라한 ‘현실의 풍경’이 된 셈이다. 공부하라며 자녀가 지나치게 컴퓨터 오락에 열중하는 것을 막아야 하는 ‘엄마의 일’이 끝난 엄마들이 다시 컴퓨터 오락, 그중에서도 친숙한 ‘맞고’나 ‘고스톱’ 앞으로 모여드는 것은 아닐까. 자녀가 공부다 직장이다 결혼이다 떠나간 자리에 덩그러니 남은 것은 그들이 쓰다 간 PC 한 대뿐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오랜만에 그 공간에 돌아온 딸내미들이 엄마의 달라진 모습에 놀라든지 한숨짓든지 간에 그동안 엄마 곁을 지켜온 것은 PC뿐인 셈이니 할 말이 뭐 있으랴.


“또 모르지. 하루 종일 ‘맞고’ 치시다 보면 우리 엄마랑 너네 엄마가 같은 방에서 만나지 않았을까?” 오프라인에서 한 번 만나게 해드린 뒤 앞으론 시간 맞춰 온라인에서 만나 같이 ‘치게’ 해드려야겠다고 말하며 웃다가 조용해진다. “그런데 말이야. 우리 엄마들, 말할 수도 없고 말할 상대도 없는 외로움과 심난함을 ‘맞고’에서 삭히고 계신 건 아닐까? 그 공간이 딸내미들보다 나은 거 아니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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