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 있는 선계의 오두막집, 동천다려(洞天茶廬) 강제윤 시인이 사는 풍경
그 섬에 가고 싶다!
어느 날, 온 몸을 파고 든 생각…. 마침내 그는 그 섬으로 향했다. 20여년 만에 오른 고향길이었다. 하지만 그 섬에서 그는 고향을 발견하지 못했다. ‘귀향이란 애초부터 불가능한 시도였는지 모르겠다’는 게 나중에 내린 그의 결론이었다.
‘고향이란 결코 물리적 공간만을 의미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고향이란 내가 자란 시간까지도 포함하는 개념입니다. 그러므로 고향은 실재하는 곳이 아니며 귀향이란 이루어질 수 없는 꿈에 불과합니다.’(‘사람은 돌아오기 위해 고향을 떠납니다’ 중에서)
“이상한 놈”
“고향을 찾아 되돌아온 그 순간부터 그는 다시 낯선 시공간 속에 던져진 자신”을 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도시와 세상살이, 그리고 사람한테 지쳐서였나. 아니면 “섬의 비바람이, 평온을 꿈꾸어 온 저녁의 시간이, 그도 아니면 그 어떤 그리움”이 그를 이 섬으로 데려왔을까? 결국 그는 그 섬에 둥지를 텄다. 섬마을을 둘러보다 설핏 본 울창한 대숲. 그 앞에 곧 쓰러질 듯 위태로이 서 있는 빈 집 두채. 그는 그곳을 샀다. “밤이면 왈칵 머리카락 산발한 귀신이 나올 것같이 폐허같은 집을 사서 뭐 하려고 하는지.” 고향사람이라고 하지만 사실상 낯선 이방인에 불과한 그에 대해 마을사람들은 “이상한 놈”이라고 잔뜩 경계를 했다. 하지만 그는 그 집을 동네 목수(상일이 형)와 함께 하나하나 일궜다. 쓰러져가는 서까래를 손수 바로 세우고 벽지를 바르고 돌담을 입히고 지붕에는 띠대를 둘렀다. 마당에 비파와 매화, 배나무와 오얏나무 포도나무까지 욕심나게 심었다. 새로 일군 둥지에 그는 이름을 붙였다. 동천다려(洞天茶廬). 동천은 선계를, 다려란 차가 있는 오두막을 뜻한다. 하여, 차가 있는 선계의 오두막집이라고나 할까. 다려 옆에 새로 흙집도 지었다. 그는 지금 섬을 찾는 관광객들에게 차를 팔고 그 흙집에 민박을 친다. 그리고 시를 쓴다. 지난 3월15일. 서울 강남고속터미널에서 버스를 타고 무려 7시간에 가까운 긴 여정끝에 한반도 내륙의 최남단 땅끝(土末)에 다다랐다. 그곳에서 다시 막배를 타고 또 40여분을 가서야 겨우 그 섬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남해의 아름다운 섬, 보길도. 고산 윤선도가 머물렀던 곳으로 널리 알려진 보길도는 특히 여름과 겨울에는 관광객들이 발디딜틈 없이 몰려드는 유명한 관광지로 바뀐 지 오래다. 아직은 초봄이라 여행객은 한산한 편. 하지만 온 산과 들, 그리고 마을에 선홍빛 동백꽃이 꽃망울을 활짝 피운데다 길게 누워 마을을 안고 있는 자못 웅장하기 그지없는 적자산, 쪽빛 바다, 공룡알 해변 등 아름다운 자태는 객을 붙잡기에 충분하고도 남았다. 그 섬의 선착장인 청별항에서 그를 만났다. 보길도 시인 강제윤(38)씨다. 그는 검은 한복바지에 수수한 점퍼차림으로 취재진을 맞았다. 그와 함께 대숲으로 둘러싸인 그의 거처 동천다려로 들어서니 은은한 풍경소리와 함께 요란한 개소리가 객을 반갑게 맞는다. 봉순이, 꺽정이, 그리고 부용이다. 봉순이의 집에는 최근에 태어난 4마리의 새끼들이 새근새근 잠을 자고 있다. 모두 강씨의 가족이다. “족보있는 진돗개들로 웬만한 사람보다 영리하다”고 강씨가 자랑했다. 강제윤씨는 지난 88년 <문학과 비평>이란 잡지를 통해 등단을 했다. 하지만 그가 세상에 알려진 건 지난해부터 인터넷신문 ‘오마이뉴스’에 연재한 글 때문이었다. ‘∼합니다’라는 산문체로 보길도 생활과 세상에 대한 생각을 담은 그의 편지는 매우 정겨우면서도 진솔해 많은 네티즌들의 사랑을 받았다. 혁명의 열정을 불태웠던 ‘사노맹’
입으로 입으로 전해진 보길도 시인 강제윤의 유명세는 마침내 지난해 말, <보길도에서 온 편지>(이학사 펴냄)란 책을 상재하도록 했다. 그로 인해 고산 윤선도의 보길도는 이제 시인 강제윤의 보길도로 사람들에게 점차 새롭게 기억되고 있다.
“나의 70년대는 말이 봉인된 시대, 그의 80년대는 잊어서는 안 되는 피로 인한 분출의 시대였다. 자신의 젊은 날을 격렬하게 분출했던 강제윤에 대한 나의 믿음은 깊고도 크다. ” 소설가 최성각씨의 글이다.
동천다려를 찾은 많은 손님들은 그저 맘씨 좋은 젊은 시인 정도로만 알고 있지만 강씨는 소설가 최씨의 말처럼 80년대, 세상의 불의에 대해 치열하게 저항하던 젊은이였다. 90년대 초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이른바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사노맹)사건. 강씨는 바로 사노맹의 일원이었다.
당시 사노맹은 사회적 불평등에 대한 그의 치열한 저항의 터전이었다. 이 일로 그는 90년부터 3년2개월 동안 춘천교도소에서 옥살이를 해야 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보길도에서 인천으로 이사한 우리 집은 조그마한 자장면 집을 했어요. 나는 일찍부터 고된 자장면 배달일을 했는데, 그때 많은 가난한 사람들을 가까이서 보게 됐습니다. 한끼 먹으려고 버둥대는 많은 사람들. 그때 우리 사회의 불평등 구조를 처음으로 깊이 생각하게 됐습니다.”
“이 사회는 왜 누구는 잘살고 누구는 못살까. 이런 의문을 일찍부터 가졌지요. 그 해답을 찾기 위해 중3 때 가출을 하고 고교시절에는 ‘자신의 한몸을 던져 사회를 구하겠다”며 바다에 몸을 던지기도 하고, 해인사로 출가하는 등 굴곡진 파란을 겪었습니다.”
그러다 검정고시를 거쳐 한양대 철학과(85학번)에 진학한 그는 대학에서 시를 만났다고 한다. 하지만 80년대 그 시절 그는 시인의 길보다 혁명가의 길을 자처하며 사노맹의 일원이 됐다. 치열했던 그날의 칼날 같은 이성은 보길도 주민이 된 지금도 그의 몸에 배어 있다.
그래서 보길도를 비롯해 노화도, 소안도 등 섬은 그에게 뭍에 사는 사람들처럼 동경의 땅이나 노스탤지어나 로맨티시즘을 자극하는 곳이 아니었다. 그에게 섬은 “반역 죄인들의 유배지인 동시에 도망나온 노비, 미천한 신분의 수군 등 사회의 하층민들이 때를 기다리며 숨죽여 살던 곳”이며 때로는 “소비자본주의가 기승한 세상과 고립된, 단절의 안온한 공간이자 이젠 그 자본주의가 침투하고 있는 불안의 거처”이기도 한 것이다.
필요 이상의 소유는 죄악이다
“아주 오랫동안 인간은 길의 주인이었습니다.…그러나 이제 더이상 이 땅의 어떠한 길도 인간의 것은 아닙니다. 지방으로 갈수록 국도로 갈수록 길로부터 인간의 소외는 더욱 커집니다. 속도지상주의로 치달아 온 산업화가 남긴 재앙이지요.”(‘길 위의 생각’ 중에서)
강씨의 동천다려를 다녀간 손님들은 지금까지 수천여명. 강씨의 다실에 차곡차곡 쌓여있는 방명록에는 그들의 사연과 단상이 소복이 기록돼 있다. 강씨는 특히 그들에게 손님들과 지나칠 정도로 허물없는 주인으로 기억되고 있으리라. 동천다려에서는 손님이 밥을 해 주인의 상을 차리기도 하고, 주인과 손님이 구별 없이 밤새 취하도록 마시는 일도 다반사이다.
벌면 버는 대로 그들과 함께 먹고 마시며 자본에 대한 집착을 애써 떨쳐버리려 한다는 보길도 시인 강제윤씨는 세상사람들에게 또 이렇게 설파한다.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최소한 돈에 대한 욕심마저 버리라는 충고는 무책임할 뿐만 아니라 무자비하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부자가 되지 말라는 충고는 충분히 설득력이 있습니다.”
“…꽉 쥐면 쥘수록 더욱 미끄러운 게 재물이니 재물이야말로 메기 같은 물고기라고 할까?… 나는 여전히 필요 이상으로 소유하는 것은 여유로움이 아니라 거의 죄악이라는 믿음을 떨쳐 버릴 수가 없습니다.”
차를 타고 함께 보길도를 둘러보던 중 그가 말했다. “세상을 주유하는 방물장수처럼 살고 싶다.”
하지만 그가 보길도를 쉽게 떠날 수 없는 것은 그 자신 스스로 잘 알고 있으리라. 그래서 보길도를 찾는 여행객들은 그곳에서 그를 쉽게 찾을 수 있으리라. 검은 한복차림에 육체노동을 좋아해 일부러 선착장에서 집까지 지게에 쌀을 잔뜩 지고 길을 걷는 한 보길도 주민의 모습을, 김치를 담그기 위해 무덤가에 지천으로 돋은 달래를 캐는 젊은 청년을, 그리고 밤이면 아궁이에 불을 지피며 시를 짓는 시인을….
글 이창곤 기자 goni@hani.co.kr
사진 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사진/강제윤 시인은 맘이 답답할 때 보길도 공룡알 해변을 즐겨 찾는다.
“고향을 찾아 되돌아온 그 순간부터 그는 다시 낯선 시공간 속에 던져진 자신”을 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도시와 세상살이, 그리고 사람한테 지쳐서였나. 아니면 “섬의 비바람이, 평온을 꿈꾸어 온 저녁의 시간이, 그도 아니면 그 어떤 그리움”이 그를 이 섬으로 데려왔을까? 결국 그는 그 섬에 둥지를 텄다. 섬마을을 둘러보다 설핏 본 울창한 대숲. 그 앞에 곧 쓰러질 듯 위태로이 서 있는 빈 집 두채. 그는 그곳을 샀다. “밤이면 왈칵 머리카락 산발한 귀신이 나올 것같이 폐허같은 집을 사서 뭐 하려고 하는지.” 고향사람이라고 하지만 사실상 낯선 이방인에 불과한 그에 대해 마을사람들은 “이상한 놈”이라고 잔뜩 경계를 했다. 하지만 그는 그 집을 동네 목수(상일이 형)와 함께 하나하나 일궜다. 쓰러져가는 서까래를 손수 바로 세우고 벽지를 바르고 돌담을 입히고 지붕에는 띠대를 둘렀다. 마당에 비파와 매화, 배나무와 오얏나무 포도나무까지 욕심나게 심었다. 새로 일군 둥지에 그는 이름을 붙였다. 동천다려(洞天茶廬). 동천은 선계를, 다려란 차가 있는 오두막을 뜻한다. 하여, 차가 있는 선계의 오두막집이라고나 할까. 다려 옆에 새로 흙집도 지었다. 그는 지금 섬을 찾는 관광객들에게 차를 팔고 그 흙집에 민박을 친다. 그리고 시를 쓴다. 지난 3월15일. 서울 강남고속터미널에서 버스를 타고 무려 7시간에 가까운 긴 여정끝에 한반도 내륙의 최남단 땅끝(土末)에 다다랐다. 그곳에서 다시 막배를 타고 또 40여분을 가서야 겨우 그 섬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남해의 아름다운 섬, 보길도. 고산 윤선도가 머물렀던 곳으로 널리 알려진 보길도는 특히 여름과 겨울에는 관광객들이 발디딜틈 없이 몰려드는 유명한 관광지로 바뀐 지 오래다. 아직은 초봄이라 여행객은 한산한 편. 하지만 온 산과 들, 그리고 마을에 선홍빛 동백꽃이 꽃망울을 활짝 피운데다 길게 누워 마을을 안고 있는 자못 웅장하기 그지없는 적자산, 쪽빛 바다, 공룡알 해변 등 아름다운 자태는 객을 붙잡기에 충분하고도 남았다. 그 섬의 선착장인 청별항에서 그를 만났다. 보길도 시인 강제윤(38)씨다. 그는 검은 한복바지에 수수한 점퍼차림으로 취재진을 맞았다. 그와 함께 대숲으로 둘러싸인 그의 거처 동천다려로 들어서니 은은한 풍경소리와 함께 요란한 개소리가 객을 반갑게 맞는다. 봉순이, 꺽정이, 그리고 부용이다. 봉순이의 집에는 최근에 태어난 4마리의 새끼들이 새근새근 잠을 자고 있다. 모두 강씨의 가족이다. “족보있는 진돗개들로 웬만한 사람보다 영리하다”고 강씨가 자랑했다. 강제윤씨는 지난 88년 <문학과 비평>이란 잡지를 통해 등단을 했다. 하지만 그가 세상에 알려진 건 지난해부터 인터넷신문 ‘오마이뉴스’에 연재한 글 때문이었다. ‘∼합니다’라는 산문체로 보길도 생활과 세상에 대한 생각을 담은 그의 편지는 매우 정겨우면서도 진솔해 많은 네티즌들의 사랑을 받았다. 혁명의 열정을 불태웠던 ‘사노맹’

사진/ 보길도 시인 강제윤씨가 진돗개 봉순이와 새끼들을 어루만져 주고 있다.
사진 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