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관의 과잉
등록 : 2000-08-08 00:00 수정 :
하마평이란 말은 애초 하마비(下馬碑)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예전에는 성문이나 궁성 앞에는 말에서 내려야 하는 표지가 있었는데 이것이 하마비입니다. 말의 주인이 하마비 앞에서 말에서 내려 궁 안으로 들어가면 하인들은 그곳에서 기다리게 됩니다. 그때 무료한 하인들끼리 주인들의 신상을 둘러싼 소문에 대해 이런저런 입방아를 찧는 일이 많았는데, 이 말이 인사를 앞두고 높은 분들의 자리이동을 점치는 하마평이라는 말로 뜻이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이번 8·7개각을 앞두고서도 언론에서는 언제나처럼 하마평이 무성했습니다. 하마평의 대상이 된 당사자의 입장에서 보면 언론의 ‘지상발령’에 그쳐 ‘좋았다 말았을’ 경우도 있을 것이고, 다행히 ‘낙점’으로 이어져 입각의 기쁨을 누린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하마평이란 다른 말로 바꾸어보면 언론을 통한 사전검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누구는 개혁성은 뛰어난데 조정능력은 미지수라거나 누구는 반대로 개혁성은 뒤지지만 팀워크 능력은 기대된다, 또는 누구는 전문성은 점수를 줄 만하지만 참신성이 뒤처지고, 다른 누구는 참신한 얼굴이긴 하지만 부처장악 능력이 미지수라거나 하는 식들입니다. 한쪽이 차면 다른 한쪽은 기우는 것이 세상사의 이치입니다. 모든 면에서 100% 만족스러운, 입에 딱 들어맞는 떡이란 없는 법입니다.
인사권자인 대통령도 이런 하마평을 충분히 접했으리라 생각합니다. 실제 하마평이라는 것도 인사권자가 마음에 두고 있는 사람들을 언론을 통해 띄워놓고 여론을 한번 떠보는 성격이 강합니다. 이런 속에서 최종적인 ‘판단과 선택’은 대통령의 몫입니다. 그것이 잘된 판단이든 잘못된 선택이든 그 책임이 인사권자에게 돌아가는 것도 물론입니다.
뚜껑을 연 개각 내용을 보면 김대중 대통령의 선택이 무엇이고, 요즘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가 어렴풋이 드러나는 듯합니다. 우선 경제팀 경질과 관련해 추론해볼 수 있는 것은 김 대통령이 현재의 상황을 너무 낙관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점입니다. 그것은 경제문제에 대한 김 대통령의 자신감과도 연결됩니다. 지금 경제가 잘 돌아가고 있고, 자신이 경제를 훤히 꿰뚫고 있으므로 굳이 각료들의 개혁성 여부를 따지기보다는 자신의 뜻을 원활히 ‘집행’할 사람이면 충분하다는 생각을 한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듭니다. 김 대통령이 가끔 “경제는 직접 챙기겠다”는 말을 해온 것도 그런 추론을 뒷받침합니다.
한국 경제의 앞날을 놓고는 설왕설래가 오가지만, 개혁을 더욱 가속화하지 않으면 자칫 큰코 다칠 수 있다는 데는 별다른 이견이 없는 듯합니다. 구조조정 마무리 작업도 첩첩산중을 넘어야 하고, 경기가 하강국면에 들어갈 조짐도 보입니다. 집권 후반기에 여러 문제가 한꺼번에 터져나오면 돌이킬 수 없는 사태가 오리라는 경고음도 들립니다.
그래서 문제는 바뀐 각료들의 면면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어차피 각료들은 대통령의 뜻을 잘 받들어 모시기에도 능력이 부쳐 허덕대온 것이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니까요. 오히려 경계해야 할 것은 대통령의 지나친 낙관과 자신감, 또는 그동안의 성과에 안주해 수성(守城)에 치중하고 싶은 유혹일 수도 있습니다. 안정도 좋고, 국민들의 개혁피로감에 대한 배려도 좋지만, 집권 후반기 최상의 수비는 공격이라는 점을 상기시키고 싶습니다.
한겨레21편집장 김종구
kjg@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