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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괴물이 뛰노는 산과 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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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11-23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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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괴물>에 쏠린 1천만 관객과 그 대척점에 선 한 감독의 선언…전부 아니면 전무, 그 사이의 무수한 가능성은 어디로 사라져버렸나

▣ 김진송 목수·문화평론가

인류 역사상 전무한 문화적 현상이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사회가 있다. 인구 5천만에 불과하지만 결코 적지 않은 그 사회의 구성원들이 일시에 이리저리 몰려다니는 현상이 그것이다. 문화적 현상? 그것은 분명 문화적이다. 애꿎게 양은 냄비를 빌려 근성이란 말을 뒤에 붙이거나 도박용어인 ‘올인’을 사용하지 않더라도 한꺼번에 쏠리는 현상들을 딱 부러지게 몇 가지의 사회문화적인 설명으로 말하기 어렵다.

영화를 볼 수 없는 거의 모든 사람, 1천만


얼마 전 <괴물>이란 영화가 보여주는 괴물 같은 현상도 그렇다. 괴물은 한강에서 출몰하여 도시를, 전국을 휩쓸고 바다를 건너갔다. 1천만 명이 넘는 사람들은 괴물에 쫓기듯 아니 홀린 듯 영화관으로 몰려들었다. 그런데 그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라 몇 차례씩 반복되고 있다. 그게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따지고 들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자체가 문제가 될 리도 없다.

투여의 결과가 100 아니면 0이기에 문화상품에 ‘올인’이라는 도박용어가 자연스럽다. 남김없이 괴물에게 먹히기 전에 할 수 있는 일은 무얼까.

누구 말대로 시장의 규모가 커지는 것은 문화적이든 경제적이든 낙관적이고 긍정적인 현상으로 이해되면 그뿐이다. 그러나 짐작건대 영화를 볼 수 있는 거의 모든 사람들을 모아야 1천만이라는 관객 수가 나온다. 한마디로 도무지 설명이 불가능할 정도로 비일상적인 현상이다. 그런 일들이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현상이 난감할 뿐이다.

그즈음엔가 다른 한편에서 꽤 영화를 잘 만든다고 국제적으로 알려진 감독 하나가 이 땅에서는 영화를 보이지 않겠노라고 선언했다. 그 속사정이야 문외한인 나로서는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단지 1천만 관객이 쏠리는 현상의 대척점에 그가 서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가늠할 뿐이다.

영화든 문화든 그것이 상업적이든 예술적이든 그걸 만든 사람이 꿈꾸는 것은 궁극적으로 소통이다. 나의 이야기를 모두의 이야기로 만들고 싶은 바람을 누구나 가지고 있다. 흥행에 성공한다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건 그 이야기를 듣고 보고 싶은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그건 작품의 성공과 실패에 관계없이 기분 좋은 일이다. 그러나 몇 개의 이야기만 통하는 세상의 다른 한편에서는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은 사람들이 그 꿈을 접는다. 때로 몇 사람의 청중이나 관객을 위해서 기꺼이 자신의 이야기를 만들어줄 용의가 있는 사람도 있다. 그들이 꿈꾸는 것은 엄청난 흥행의 대박도 아니고 대중들의 인기도 아니다. 단지 최소한 이야기를 들어주고 말해줄 공간이 어딘가에 필요할 뿐이다. 그러나 그들의 여지가 줄어들고 있다. 극단적으로 쏠리는 문화적 현상이 그들에게는 소통의 단절과 다름없다. 자신의 이야기가 차단되었을 때 느끼는 고독감이나 좌절감은 자신에 대한 자괴감과 절망으로 되돌아온다.

어찌 영화뿐인가? 공연이나 출판 시장의 상황도 다르지 않다. 엄청난 물량을 투입한 공연에 사람이 몰려들 때 수년 동안 준비한 공연장에 텅 빈 객석을 바라보아야 하는 배우가 있다. 수십만의 베스트셀러 옆에는 초판 1천 부가 나가기만을 바라는 인문학 서적이 초라하게 놓여 있다. 괴물의 잔등에 올라타지 못한 자들의 푸념을 들어줄 사람은 이제 아무 데도 없는 듯하다. 어쩌면 시장이라는 거대한 괴물 앞에서 이러한 현상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문제는 괴물을 제어할 수 있는 길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괴물이 그렇듯이 괴물적인 현상은 늘 예측할 수 없이 갑작스럽고 느닷없이 나타난다.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뿐 아니라 문화산업에 발을 담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노력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에 대해 알 수 없어한다. 느닷없이 나타나는 행운을 기다릴 뿐이다. 노력한 만큼의 대가를 꿈꾸는 천진한 사람도 더러는 있지만 대개는 투여의 결과가 100이 아니면 0이 될 것임을 모르지 않는다. 전시든 공연이든 출판이든 문학이든 음악이든 전부와 전무 사이에 존재하는 무수히 많은 가능성의 폭은 간데없이 사라져버렸다. 이런 문화현상은 도박게임과 비슷하다. 그래서 올인이라는 도박용어가 자연스럽게 쓰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제 이야기니 소통이니 하는 천진난만한 말을 접고 ‘바다이야기’에서 훈련된 감각으로 문화적 생산과 수요를 말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보편적 정서’가 누락된 이야기들의 운명

으레 그렇듯이 괴물은 늘 비슷한 모습을 하고 나타난다. 괴물은 늘 공포감과 불안의 쾌감을 선사한다. 얼굴과 모습이 다를 수는 있어도 괴물이 주는 감각과 의미와 감동의 장치들은 엇비슷하다. 문화상품들이 대형의 물량공세에 실어 보내는 감동의 도출 공식이 비슷해지는 것은 모두들 괴물의 출현을 꿈꾸기 때문이다. 이른바 기획 상품에 길들여진 관객들은 이미 비슷한 감동을 받을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다. 가장 많이 팔린 책이나 영화에는 ‘보편적 정서’라고 부를 만한 감동의 서사가 펼쳐진다. 그러나 그 보편적 정서가 누락된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는 기회는 괴물이 남긴 발자국에서만 간신히 찾을 수 있을 뿐이다.

영화 <괴물>이 보여주는 현상과 한 영화감독이 보여주었던 현상은 동일한 문화적 현상이다. 산이 높을수록 골이 깊다고 했던가? 골을 메우기 위한 정책적 배려와 몇 사람의 균형 잡힌 노력으로도 그 현상은 쉽사리 메워질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이러한 문화현상을 설명하는 데 드는 노력의 여지조차 괴물 같은 문화 현상은 잠식해버렸다. 설사 그 원인을 명쾌하게 풀어냈다고 해서 이런 문화적 현상은 사라질 것 같지 않다. 왜냐하면 지금은 누구나 비일상적인 현상이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현상을 즐기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게 이 사회에서 살아가는 혹은 생존하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을 뼛속까지 체득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수천만이 이리저리 쏠리는 동안 적지 않은 수의 사람들은 어디로 갈지 몰라 당혹스러워하거나 자신과 멀어지는 군중을 보고 망연해하는 현상도 역시 똑같이 발생할 것이다.

그들이 남김없이 괴물에게 먹혀버리기 전에 세워야 할 대책은 도대체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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