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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엿으로 바꾼 ‘노동인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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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1-03-06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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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별기업 복수노조 설립 유예한 노동법 개정안… 노조전임자 임금 챙기고 비정규직 단결권 방치

사진/복수노조 유예 조처의 가장 큰 피해자는 전체 노동자의 53%에 해당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다.(이용호 기자)
국회는 지난 2월28일 본회의를 열어 복수노조 설립을 2006년 말까지 5년 동안 유예하는 것을 뼈대로 하는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이날 함께 본회의를 통과한 한·미주둔군지위협정(SOFA) 개정안에 대한 비준동의안은 반대의견과 함께 찬반표결까지 벌어졌던 데 비해 복수노조 유예 법안에 대해서는 여야 의원들이 한마디 이의제기조차 하지 않았다.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위원장 단병호)은 3월2일 프랑스로 출국한 ‘김우중 체포결사대’를 통해 국제노동기구(ILO)에 “한국 정부가 결사의 자유를 보장한 국제노동기구 협약 87조를 위반했다”고 제소했다. 국제노동기구 산하 ‘결사의 자유위원회’가 이 안건을 채택해 논의를 진행할 경우 ‘시정 권고’ 결정이 내려질 가능성이 크다. 만약 그렇게 되면 한국은 이 문제로 10번째 시정권고를 받는 ‘기록’을 남기게 된다. 1991년 국제노동기구에 가입한 이래 ‘노동인권의 후진국’이라는 불명예가 10년째 계속되는 셈이다.

자본과 정부의 논리에 한국노총 맞장구


사진/노사정위원회의 복수노조 허용 유예 결정은 정부, 재계, 한국노총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내린 담합이었다.(강창광 기자)
애초 노사정위원회에서 이같은 합의가 이뤄진 것은 2월9일이었다. 정부와 재계, 한국노동조합총연맹(한국노총·위원장 이남순)이 ‘노조 전임자 임금지급 중지’와 ‘복수노조 허용’을 다함께 5년씩 늦추기로 결정한 것이다. 노동계 안팎의 비난은 한국노총에 집중됐다. 조직의 이해관계인 노조전임자 임금을 얻기 위해 노동기본권의 핵심인 단결권을 내준 결정은 반역사적·반노동자적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전임자 임금문제’는 법적인 강제가 아니라 노사 자율에 맡겨야 할 사항이며 이를 법적으로 금지·처벌하도록 규정한 나라가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단위노조에 복수노조가 생기는 상황을 두려워한 자본과 정부의 논리에 맞장구쳤다는 점도 그랬다.

복수노조 금지 조항(단일노조 강제조항)은 박정희 정권의 쿠데타기관인 국가재권최고회의에서 신설한 것으로, 민주노조운동을 정면으로 부정해온 역사를 지니고 있는 독소조항이다. 1997년 정리해고를 반대하는 총파업 이후 이뤄진 노동법 개정과정에서 이 조항은 폐지됐으나, 그 시행은 기업(사업장) 단위는 5년, 초기업(상급단체) 단위는 3년 동안 미뤄졌다. 이에 따라 상급단체인 민주노총은 3년이 지난 2000년 법외단체의 기나긴 역사에 종지부를 찍었지만, 개별기업에서는 이번 개정으로 결국 1997년부터 2006년까지 10년 동안이나 노조 설립의 자유를 빼앗기는 꼴이 됐다.

이 때문에 노동계에서는 이번 법 개정이 노동운동의 엄청난 후퇴를 가져올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파견용역 노동자 노동권 쟁취와 간접고용 철폐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파견철폐 공대위)의 윤애림 집행위원은 “이번 개정은 1980년대 이후 노동운동이 쌓아놓은 성과를 원점으로 돌릴 수 있을 만큼 심각한 것”이라며 “2007년이면 차기정권의 말기가 되는 시점이어서 복수노조 허용 여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고 우려했다.

넋을 잃은 쪽은 노조 설립의 기회를 눈앞에서 놓친 노동자들이다. 유령노조나 어용노조로 노동운동을 막아온 재벌그룹에서 민주노조를 만들어온 노동자들은 난관에 부닥쳤다. 노동계의 한 인사는 “실제 삼성그룹과 LG그룹은 이번 법 개정에 가장 많은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었다”며 “복수노조 허용 유예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를 예상해 상당한 대비를 했다는 소문이 무성했다”고 말했다. 삼성에스원의 경우 지난해 5월 노조를 결성한 뒤 서울 중구청에 노조설립신고서를 냈지만, 이들에 앞서 정체불명의 노조가 이미 강남구청에 노조설립신고서를 낸 상태여서 복수노조 금지 규정에 해당해 노조를 만들지 못했다. (주)새한 노조, 인천 길병원 노조 등도 비슷한 처지에 놓여 있다. 포항제철 역시 서류상으로만 존재하는 노조가 있을 뿐이다.

한국노총 산하의 철도·체신·전력노조 등에서 노조민주화추진위원회 조직을 통해 민주노조 설립을 추진중인 노동자들도 막막하기는 마찬가지다. 철도민주노조추진위의 한 관계자는 “지난해 한국노총은 민주노조를 만들려는 철도노조 조합원들의 요구를 무시하고 현 어용집행부를 비호해왔다”며 “이제 와서 자신들의 결정에 대해 ‘노동운동 발전을 저해하려는 책동이거나 이에 악용될 소지가 있다’는 적반하장격의 뻔뻔스러운 자기변명을 하는 것을 보면 말이 나오지 않는다”고 꼬집었다.

정규직의 아량을 기대할 수밖에 없나

사진/"비정규직 차별 철폐"를 외치며 전국버스투어를 벌인 한국여성노동자협의회와 전국여성노동조합 소속 여성노동자들.(이용호 기자)
노동계에서는 복수노조 금지조항의 가장 큰 피해자는 뭐니뭐니해도 전체 노동자의 53%로 추산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라고 입을 모으고 있다.

“정리해고와 함께 정규직의 비정규직화가 대규모로 이뤄지는 현재의 양상에서 복수노조 금지는 비정규직들이 생존권을 지켜낼 최후수단인 노조결성이라는 무기를 완전히 잃어버리는 결과를 가져오고 있어요. 노조에 가입해 있는 정규직 노동자들은 비정규직들의 불안을 이해하기 힘들죠. 여성노동자를 비롯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현재 완전한 무권리 상태로 빠져들고 있습니다. 정규직 노조와의 연대활동이나 정규직 노조의 선의에 기대지 않는 한 자유로운 노조 설립은 거의 불가능해졌어요.” 한국비정규노동센터’(www.workingvoice.net)의 박영삼 정책기획국장의 분석이다.

국철과 각 철도역에는 홍익회에서 운영하는 ‘홍익매점’이 있다. 여기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그동안 노조결성이나 가입이 회사쪽의 반대로 번번이 무산됐다. 열차 안에서 물품을 파는 직원들이 철도노조 홍익지부에 가입해 활동하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최근 홍익매점 판매노동자들은 홍익매점노조를 결성하고 서울 강서구청에 노조설립신고서를 냈으나, 구청쪽은 복수노조라는 이유로 반려처리했다. 기존 노조에서는 강 건너 불보듯 하고 있다.

홍익매점 노조처럼 기존 노조와 조직대상이 겹치다는 이유로 노조설립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노조는 쉐라톤워커힐호텔 외부사업부 ‘명월관’ 노조와 전국학습지산업노조 대교교사 지부, SK텔레콤 상담원 노조 등 수없이 많다.

복수노조 설립금지가 비정규직 노동자에게 미치는 악영향은 민주노총이 1999년 12월부터 두달 동안 전국 137개의 산하 노조를 상대로 한 설문조사 결과(그래픽 참조)에서도 확인된다. 이에 따르면 노조 규약에서 비정규직을 가입대상으로 명시하는 곳은 10.8%에 불과한 데 반해 단체협약이나 규약에서 비정규직을 제외하고 있는 노조는 51.5%에 달했다. 또 규약이나 단체협약에 비정규직의 노조원 자격을 부여할 계획이 있는 곳이 40%인 데 반해 계획이 없는 노조는 56%였다.

정규직 노조가 이기적인 태도 버려야

비정규직의 단결권 문제가 특히 문제가 될 수 있는 곳은 규약에 비정규직의 노조원 자격을 부여할 계획이 없는 노조들이다. 또 비정규직의 조합원 자격 여부를 모호하게 규정하고 있는 절반에 가까운 노조에서도 비정규직의 단결권 행사는 순탄치 않을 전망이다. 한국통신 계약직 노조의 경우 정규직 노조의 이기적인 태도 때문에 8개월 동안이나 노조 설립이 늦춰지기도 했다.

민주노총의 손낙구 교육선전실장은 “정규직 노동자들이 규약을 개정해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내걸고 함께 파업을 벌여 승리한 롯데호텔 노조나 사내에 들어와 있는 하청기업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노조설립과정에 동참한 대우캐리어 노조의 예에서 보듯이 정규직 노동자들의 각성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김창석 기자 kimc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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