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의 삶에 노우(No)하고 싶을 때를 위해 준비하는 ‘노우’ 자금… 단 떠나는 것보다 쉬운 조금의 여유 ‘예스’ 자금도 잊지 마시길
▣ 최윤 소설가·서강대 프랑스문화학과 교수
나는 시간이 지나갈수록 뒤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없어진다. 대학 시절의 낭만 운운하는 사람들을 보면 내 눈앞에는 비어 있는 황야가 슬쩍 스쳐지나간다. 활기찬 젊음! 하고 누군가 부르짖으면 여기저기 깊음 없는 정열로 뛰어다니던 젊음의 거리들이 허탄하게 줄지어 기억 속을 지나간다. 회상하자면 이렇게 나타나지만 그때는 그때의 것으로 좋았을 것이다. 단순한 사람처럼 나는 늘 지금이 과거보다 좋다. 그래서 그런지 미래 걱정도 별로 하지 않는다.
아는 사람은 알지만 내게는 일종의 낙관주의, 나 자신이 ‘급진적 낙관주의’라고 부르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변 분들이 조언하는 노후 대책이나 그 비슷한 것에는 신경도 쓰지 않고 지낸다. 현재 꾸려가기도 버거운데 앞일까지 벌써 신경을 써서야, 내심 고개를 돌리며 딴청을 부리기 일쑤다.
조촐하지만 힘있는 자금 그러던 중 수년 전에 나는 친구의 입에서 노후 자금이 아니라 ‘노우’(No) 자금에 대해 듣게 되었다. 평범하게 보이는 전업주부였던 친구는 사업이라고 부르기에는 뭣하지만 나름대로 소소한 수입이 들어오는 일을 시작하고 있었다. 그 친구가 일하는 이유가 바로 이 아리송한 노우 자금 마련 때문이라고 했다. 노후 자금이냐고 했더니 친구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강조해서 노우 자금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어느새 인생의 중턱을 바라보고 있던 때이기에 노후가 아닌 그 ‘노우’가 생뚱맞게 들린 것도 사실이었다. 그런데 듣고 보니 발음만 비슷했지 두 자금은 질적으로 한참 차이가 났다. 친구의 생활철학에 의하면 노우 자금이란, 언젠가 남편이 직장에서 혹은 그것이 가족 중의 누구든지 현재 꾸리고 있는 삶에 대해 진심으로 오 노우, 하고 싶을 때 그것을 실천할 수 있도록 준비된 자금이어서 그렇게 부른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놀라운 액수를 머리에 두고 그런 계획을 세우지 않는단다. 친구가 공개한 금액은 다 큰 아이 둘을 둔 부부의 노우 자금으로는 매우 조촐했다고 기억한다. 요컨대 그것은 금액의 고하 여부가 아니다. “나는 비록 주부지만 한국 사회에서 일하는 사람의 고충을 잘 알아” “나는 당신을 신임하고 있으니 정 안 되는 상황이면 언제든지 노(No) 해도 돼. 자금을 준비해두었으니 대안을 찾아보자”라는 매우 힘있는 제안인 것이 중요하다. 그런 부인이 옆에 있는 남편은 행복한 사람임이 틀림없다. 그 이후 나는 이 노우 자금이라는 단어를 자주 떠올려본다. 우리는 어떤 때 “노”라고 말하게 되는가. 상황이 우리가 믿는 진실의 반대 방향으로 진행돼갈 때 그렇게 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불행하게도 우리는 그런 상황에 하도 감염돼 그것이 정상이려니 하고 생각하며 매일매일을 살고 있다. 하루에도 손사래를 치며 “노” 하고 외치고 싶은 순간이 얼마나 많은가. 고매하건 그렇지 않건 인생에 작은 원칙이라도 가지고 살아가노라면 “노” 하는 것이 옳음에도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다. 모두가 꿀꺽 삼킨다. 그렇게 삼켜지는 노가 쌓이면서 우리네 삶 속에는 주름이 잡히고 짜증이 배경의 정조로 자리잡고 서서히 무언가 생생한 것을 시도해보려는 의욕이 사라져가게 된다. 그럴 때 정말 노우 자금은 가뭄의 단비처럼 메마른 가슴을 적셔줄 수도 있다. 설령 당장 있던 자리를 박차고 떠나는 일로 꼭 연결되지 않는다 해도 말이다. 그런데 “이제 더 이상은 노!” 하고 있던 자리를 떠나는 것은 어쩌면 가장 수월한 일이다. 거기에 노우 자금의 한계가 있는지도 모른다. 물론 진실 아닌 것에 대해 “노!” 하는 결단만큼 중요한 것은 없지만 그것은 무책임한 도피자들도, 혹은 더 나은 이권을 따라가는 모리배도 할 수 있다. 더 어려운 것, 더 의미 있는 것은 어쩌면 남아 있는 일이다. 남아서 ‘노’ 하는 일, 그것을 위해서는 어쩌면 떠나는 것보다 훨씬 적은 자금과 훨씬 작은 대가를 치르는 것으로 충분할지도 모른다. 시민으로서, 가정에서, 일터에서 우리는 우리의 권리를 요구하는 데 매우 민감하다. 민주사회의 시민이며 납세자이니 그건 당연하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시간과 자금을 조금 투자하면, 요구하는 데 걸리는 시간보다 더 빨리, 요구해서 얻어지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주어지는 것을 잊은 듯하다. 이 조금의 여유를 ‘예스’ 자금이라고 명명하면 어떨지. 노우 자금보다 발음도 어의도 더 낫지 않은가. 만들어놓고 보니 썩 마음에 든다. 시중은행의 히트상품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이 좀 흠이지만. ‘노’ 앞에서 ‘예스 자금’을 투자할 사람은 예스 자금의 또 다른 좋은 점은 늘 현재형이라는 것이다. 또 복잡하게 자금화해서 쌓아놓을 필요도 없다. 얼마나 좋은가. 필요할 때마다 그날그날 투자하면 된다. 조금 모자라면 스타벅스 커피 한 잔 안 마시면 된다.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각 신문의 기사에 생중계의 긴장이 감도는 때가 되었다. 선거철은 왜 이토록 빨리 돌아오는지. 아니면 나만 그렇게 느끼는 건지. 오래전부터 모든 선거에서 유권자로서의 내 기준은 늘 동일하고 단순했다. 지원자 중 누가 더 진실에 가까이 있는가. 물론 그것이 정치판에서는 거의 불가능한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기준을 이렇게 한 단계 낮추었다. 어떤 지원자가 진실의 문제에 가장 덜 둔감한가. 거기에 한 가지 더 덧붙여본다. 대통령 자리에서 자신의 그 드높은 권리를 요구하기보다는, ‘노’할 만한 문제 앞에서 자신의 예스 자금을 선뜻 투자할 뜻이 있는 그 누구, 그런 사람이면 좋겠다. 너무 소박한가. 그러나 대통령 자리가 원래 소박한 이상을 원대하게 이루는, 소박하고 진실한 드리머들의 팀워크로 이루어져야 하는 자리 아니던가. *‘최윤의 종이비행기47’은 이번호로 마칩니다. 그동안 사랑해주신 여러분 감사합니다. 다음부터는 목수 김진송씨가 종이비행기를 날려보내게 됩니다.
살아가노라면 “노” 하는 것이 옳음에도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다. 그렇게 삼켜지는 노는 쌓여서 우리 삶의 주름이 된다. 그럴 때 ‘노우 자금’은 든든한 힘이다. 자리를 박차고 떠나지 않더라도 말이다.(사진/ 한겨레)
조촐하지만 힘있는 자금 그러던 중 수년 전에 나는 친구의 입에서 노후 자금이 아니라 ‘노우’(No) 자금에 대해 듣게 되었다. 평범하게 보이는 전업주부였던 친구는 사업이라고 부르기에는 뭣하지만 나름대로 소소한 수입이 들어오는 일을 시작하고 있었다. 그 친구가 일하는 이유가 바로 이 아리송한 노우 자금 마련 때문이라고 했다. 노후 자금이냐고 했더니 친구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강조해서 노우 자금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어느새 인생의 중턱을 바라보고 있던 때이기에 노후가 아닌 그 ‘노우’가 생뚱맞게 들린 것도 사실이었다. 그런데 듣고 보니 발음만 비슷했지 두 자금은 질적으로 한참 차이가 났다. 친구의 생활철학에 의하면 노우 자금이란, 언젠가 남편이 직장에서 혹은 그것이 가족 중의 누구든지 현재 꾸리고 있는 삶에 대해 진심으로 오 노우, 하고 싶을 때 그것을 실천할 수 있도록 준비된 자금이어서 그렇게 부른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놀라운 액수를 머리에 두고 그런 계획을 세우지 않는단다. 친구가 공개한 금액은 다 큰 아이 둘을 둔 부부의 노우 자금으로는 매우 조촐했다고 기억한다. 요컨대 그것은 금액의 고하 여부가 아니다. “나는 비록 주부지만 한국 사회에서 일하는 사람의 고충을 잘 알아” “나는 당신을 신임하고 있으니 정 안 되는 상황이면 언제든지 노(No) 해도 돼. 자금을 준비해두었으니 대안을 찾아보자”라는 매우 힘있는 제안인 것이 중요하다. 그런 부인이 옆에 있는 남편은 행복한 사람임이 틀림없다. 그 이후 나는 이 노우 자금이라는 단어를 자주 떠올려본다. 우리는 어떤 때 “노”라고 말하게 되는가. 상황이 우리가 믿는 진실의 반대 방향으로 진행돼갈 때 그렇게 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불행하게도 우리는 그런 상황에 하도 감염돼 그것이 정상이려니 하고 생각하며 매일매일을 살고 있다. 하루에도 손사래를 치며 “노” 하고 외치고 싶은 순간이 얼마나 많은가. 고매하건 그렇지 않건 인생에 작은 원칙이라도 가지고 살아가노라면 “노” 하는 것이 옳음에도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다. 모두가 꿀꺽 삼킨다. 그렇게 삼켜지는 노가 쌓이면서 우리네 삶 속에는 주름이 잡히고 짜증이 배경의 정조로 자리잡고 서서히 무언가 생생한 것을 시도해보려는 의욕이 사라져가게 된다. 그럴 때 정말 노우 자금은 가뭄의 단비처럼 메마른 가슴을 적셔줄 수도 있다. 설령 당장 있던 자리를 박차고 떠나는 일로 꼭 연결되지 않는다 해도 말이다. 그런데 “이제 더 이상은 노!” 하고 있던 자리를 떠나는 것은 어쩌면 가장 수월한 일이다. 거기에 노우 자금의 한계가 있는지도 모른다. 물론 진실 아닌 것에 대해 “노!” 하는 결단만큼 중요한 것은 없지만 그것은 무책임한 도피자들도, 혹은 더 나은 이권을 따라가는 모리배도 할 수 있다. 더 어려운 것, 더 의미 있는 것은 어쩌면 남아 있는 일이다. 남아서 ‘노’ 하는 일, 그것을 위해서는 어쩌면 떠나는 것보다 훨씬 적은 자금과 훨씬 작은 대가를 치르는 것으로 충분할지도 모른다. 시민으로서, 가정에서, 일터에서 우리는 우리의 권리를 요구하는 데 매우 민감하다. 민주사회의 시민이며 납세자이니 그건 당연하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시간과 자금을 조금 투자하면, 요구하는 데 걸리는 시간보다 더 빨리, 요구해서 얻어지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주어지는 것을 잊은 듯하다. 이 조금의 여유를 ‘예스’ 자금이라고 명명하면 어떨지. 노우 자금보다 발음도 어의도 더 낫지 않은가. 만들어놓고 보니 썩 마음에 든다. 시중은행의 히트상품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이 좀 흠이지만. ‘노’ 앞에서 ‘예스 자금’을 투자할 사람은 예스 자금의 또 다른 좋은 점은 늘 현재형이라는 것이다. 또 복잡하게 자금화해서 쌓아놓을 필요도 없다. 얼마나 좋은가. 필요할 때마다 그날그날 투자하면 된다. 조금 모자라면 스타벅스 커피 한 잔 안 마시면 된다.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각 신문의 기사에 생중계의 긴장이 감도는 때가 되었다. 선거철은 왜 이토록 빨리 돌아오는지. 아니면 나만 그렇게 느끼는 건지. 오래전부터 모든 선거에서 유권자로서의 내 기준은 늘 동일하고 단순했다. 지원자 중 누가 더 진실에 가까이 있는가. 물론 그것이 정치판에서는 거의 불가능한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기준을 이렇게 한 단계 낮추었다. 어떤 지원자가 진실의 문제에 가장 덜 둔감한가. 거기에 한 가지 더 덧붙여본다. 대통령 자리에서 자신의 그 드높은 권리를 요구하기보다는, ‘노’할 만한 문제 앞에서 자신의 예스 자금을 선뜻 투자할 뜻이 있는 그 누구, 그런 사람이면 좋겠다. 너무 소박한가. 그러나 대통령 자리가 원래 소박한 이상을 원대하게 이루는, 소박하고 진실한 드리머들의 팀워크로 이루어져야 하는 자리 아니던가. *‘최윤의 종이비행기47’은 이번호로 마칩니다. 그동안 사랑해주신 여러분 감사합니다. 다음부터는 목수 김진송씨가 종이비행기를 날려보내게 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