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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기억 소멸이 미덕인 도시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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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10-26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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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은 박물관이 되어 쫓겨나고 시청사는 일부 허물어 새로 짓고… 집단기억 안은 건축물은 도시의 영혼, 그 사용‘가치’를 인정해야

▣ 정기용
▣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t@hani.co.kr

오늘 오후 건축과 대학원 과정 세미나의 주제는 ‘집단기억’이었다. 일주일 전 그에 대한 강의가 있고 항상 그 다음주는 강의 주제와 관련해 학생들마다 하나의 이야깃거리를 선정해 발표하고 토론하는 형식의 세미나다.

한 학생이 ‘기억의 회복, 근대 건축물의 재생’이라는 테마로 발표했는데 그 대상 건물이 바로 서울역이었다. 발표 내용은 흥미로웠고 그냥 스치고 지나가기에는 많은 문제를 내포하는 것이었다.

도시의 영혼이라 할 장소성에 대한 의미를 깊이 인식했더라면 지금 서울역은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을 것이라는 상상을 해본다


이를테면 도시의 정체성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을 다루는 이야기야말로 앞으로 우리가 지속적으로, 그리고 진지하게 논의해야 할 주제가 아닌가 싶다. 청계천이 긴 ‘콘크리트 분수’로 변환되면서 사람들이 흥미를 갖고 많이 찾는다는 이유 하나로 진정한 평가와 논의가 유보된 상태에서 최근 새롭게 지어진 서울역사와 또한 지금 고안 중인 서울 시청사를 ‘집단기억’이라는 주제 속에서 생각해볼 적절한 시점인 듯하다.

아들과 아버지에게 완전히 다른 서울역

학생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서울역이나 동아일보사 같은 근대 건물과 북촌 같은 도시형 한옥군은 특별한 장소성을 갖는데 장소성이야말로 서울의 역사이자 정체성을 이루는 요소이며 이것들은 바로 서울에 사는 사람들의 ‘집단기억’으로 자리잡고 있다. 집단기억은 우리가 다시 인위적으로 만들어낼 수 없는 문화적 가치이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를 수선하거나 유지하는 모든 행위 이전에는 깊은 연구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특히 서울역의 경우 옛 서울역 건축물이 가지고 있던 이미지가 새 역사가 옆에 덧붙여 신축되면서 바뀌어 세대 간에 기억의 단절이라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한다. 즉 어린 아들에게 서울역은 신축된 역사를 지칭하며 옛 서울역 건물은 박물관으로 인식되며 그의 아버지에겐 옛 서울역사가 진짜 서울역이고 새로 지은 것은 증축된 대합실 정도의 의미밖에 없다는 것이다. 작은 일이지만 부자지간에는 좁혀질 수 없는 근본적인 대화의 어려움이 있다. 만일 옛 서울역 건물을 어떠한 방법으로든지 잘 활용해 설계할 것을 주문했다면 아마 지금과 같은 대화의 혼선은 예방했을지 모른다. 도시의 영혼이라 할 장소성에 대한 의미를 깊이 인식했더라면 지금 서울역은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을 것이라는 상상을 해본다.

다만 모든 역사들이 재정적 이유로 ‘민자역사’로 전환되면서 공공 영역이 축소되고, 역세권 중의 역세권이라는 상업 공간의 최대 확보야말로 밑지는 장사를 할 리 없는 투자자의 권한이자 욕심임은 두말할 나위 없다. 옛 건물을 목숨을 다한 주검으로 간주하고 그에 걸맞은 ‘박물관’이라는 이름으로 사후를 그나마 지속하게 된 것을 다행으로 여길 수밖에 없는 게 안타까울 뿐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우선해야 했던 것은 사적 자본의 이익 보전 이전에 공공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는 것 아닌가?

최근 한 시민단체에서 수행한 모든 민자역사의 사적 영역과 공공 영역의 정밀조사 결과가 발표됐는지 모르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기존의 역사적 건물들을 대하는 태도이다. 폐기 처분하면 가장 간단하나 여론이 무섭고, 그냥 두자니 애물단지 같아 철거하기보다는 명맥을 유지해주는 것만으로도 만족하라고 명령하는 듯하다. 학생의 말대로 수많은 사람들을 토해내고 받아들이던 옛 서울역 앞은 노숙자들의 아지트가 되었고 그냥 그렇게 쓸쓸하게 서 있다.

그렇게 언제까지 서 있을지 모르는 옛 서울역사는 그래도 격동기를 살아온 많은 사람들에게 ‘서울의 관문’이라는 상징적 의미를 지니며 한 집단의 기억 속에 보존될 것이다. 그것은 일제의 잔재라는 오명보다 근대 유산이라는 또 다른 가치를 부여받고 서울에 흔치 않은 영혼의 한 조각으로 소임을 다할 것이다. 알로이 리글이라는 미학자는 19세기에 현대 유적 또는 기념물들의 가치를 세 가지로 분류한 적이 있다. ‘오래된 가치’ ‘역사적 가치’와 ‘현재적 가치’로 말이다. 서울역사가 이 세 가지 중 어디에 더 속하는지를 따져묻기보다 오히려 ‘집단기억’으로서의 가치를 말하는 것이 지금은 더 시급해 보인다.

전문가 말고 시민에게 먼저 물어라

지금 여기 한국 땅은 어떻게 해서든 기억을 소멸시키는 것을 미덕으로 알고 있다. 옛것은 다 낡은 것이고 낡은 것은 가차 없이 쓸어버려야 직성이 풀리도록 관습화된 백성들에게 ‘ 역사’와 ‘문화’ ‘기억’은 거추장스럽고 부담스런 존재다. 특히 도시 속에서 건설은 무조건 깡그리 밀어버리고 새롭게 짓는 것이어야 하고 바로 그럴 때만 아름다운 것이라고 인식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우리는 해방 이후 일제가 소멸시킨 것보다 더 많은 양의 것들을 파괴하고 지워버렸다. 역사의 흔적을 지우고 기억을 망각으로 대치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야만족이라고 부른다. 가족끼리 오순도순 살던 집을 때려부수는 것을 ‘경축’하는 나라는 세계에서 우리밖에 없을 것이다.

이제 우리가 만일 진정으로 문화입국을 원한다면, 우리가 야만족으로 살기보다 집단기억이 보존되는 문명인으로 살기를 원한다면, 유럽의 도시는 근사한데 왜 우리나라는 이 모양이냐고 투덜대는 사람들이 있다면, 삶과 삶의 기억이 보존되는 의미 있는 건축물들에 대해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사용‘가치’를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건물’ 그 자체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나아가서는 건물을 에워싼 일정한 영역의 풍경까지를 고려해야만 한다. 이는 우리가 건축물이 형성하는 장소성으로까지 확장해 해석하는 것까지를 포함하는 것이다.

최근 서울 시청사를, 기존 시청사의 일부를 허물고 지으려는 계획안이 진행 중이다. 가끔 신문에 계획안이 그림으로 등장하는 것을 보고서야 시민들은 무엇인가 새로운 시청사가 지어지는가 보다 할 뿐 왜 그 자리에 그렇게 큰 규모로 이상한 형태를 하고 서 있어야 하는지 묻는 사람들이 없다. 기존 시청의 얼굴은 보존했으니 근대 유적에 대한 예는 갖추었다는 식이다. 그러나 이런 질문은 남는다. 덕수궁과 같은 역사문화재를 보호하려는 문화재 보호규정인 앙각 27˚는 유지했으니 나머지는 건축법대로 하면 된다는 해석이 과연 큰 의미에서의 경관적 해석으로도 옳은 것인지 말이다. 현대 유적으로 보존하려는 옛 시청사를 서울역사처럼 죽이는 일은 아닌지 말이다. 시 스스로가 ‘집단기억’의 장소성을 말살하기 전 이제는 시청의 주인인 시민들에게 물어볼 일이다. 소속 전문가들에게만이 아니라 서울에 사는 다수의 집단에게.

**‘정기용의 종이비행기47’은 이번호로 막을 내립니다. 그동안 사랑해주신 독자 여러분 감사합니다. 다음을 이어 철도노동자 황하일씨가 집필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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