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내가 만난 모든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인다면 어떻게 될까…한번쯤 큰 마음을 먹고 결렬된 관계의 복원에 시간을 투자해보자
▣ 최윤 소설가 서강대 프랑스문화학과 교수
지금까지의 짧지 않은 삶에서 내가 만난 모든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인다면 어떻게 될까, 가끔 턱을 괴고 앉아 뜬금없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바로 며칠 전에, 정말 예기치 않게, 갑자기 합류하게 된 어떤 여행 코스에서, 어렸을 때 어른들의 핍박을 받으며 들락거리던 만화방 짝꿍을 만난 것이 계기가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이국에서 난생처음 본 사람들과 하는 여행사 주선 여행에서 이뤄진 이런 만남을 어찌 우연이라고 할 수 있을지.
우리는 그 옛날 우리를 매료시켰던 만화책들과 만화가들의 이름을 들먹거리면서 서로의 기억력 자랑을 했고, 아예 팀에서 떨어져나와 따로 걸으며 오랜만에 회포를 풀었다. 그 친구 생각을 자주 한 것도 아니고, 의식에 떠오를 정도로 그리워한 것이 아니건만 마치 오래전에 멈춘 점선 위에 마침내 직선을 그은 것처럼 마음이 그득했다.
경계를 부수는 ‘외교관’의 역할 요컨대 내가 ‘만난 사람들’이라고 할 때 그저 지나쳤다는 것이 아니라 최소한 서로의 존재의 각인이 이뤄질 정도의 시간을 같이 보낸 그런 사람들과의 관계를 생각한다. 그것이 비록 몇 시간, 단 하루라 할지라도 말이다. 언뜻 떠올려보아도 적잖은 수의 사람들이 들어갈 만한 마땅한 장소가 있을지, 얼굴만 선명히 떠오를 뿐 이름은 생각나지 않는 사람들, 연락이 끊긴 지 오래된 사람들을 어떻게 찾아올지… 진짜 이 일을 성사시킬 작정을 한 사람처럼 구체적인 문제들을 머릿속으로 점검한다. 그러다가 현실적으로 그것이 가능한지 아닌지는 후에 생각하기로 하고 나는 생각을 진행시킨다. 늘 그렇듯이 여전히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사람들에게서보다는 한때는 가까웠으나 지금은 연락처조차 알고 있지 못한 사람들, 한때 모여 깔깔거리고 웃으며 지내다가 어느 날 마치 싸우기라도 한 것처럼 스르르 친구들의 모임에서 유령처럼 사라져버린 사람들에 대해 더 많이 생각이 멈춘다. 여러 상황들에 의해 자연스럽게 만나게 된 사람들에 대해서보다는 상대편에 대한 강한 관심과 의문 혹은 놀라움이나 감동으로 내가 먼저 다가가 말을 걸고 관계를 만들고 유지하는 데 정열을 투자한 사람들에 대한 생각에 오래 머무른다. 그리고 내 잘못으로 인해, 혹은 오해로 인해 내게 서운하다는 말도 못해보고 슬그머니 나를 떠난 사람들에 대해서도. 생각할수록 새록새록 이 모든 사람들을 한자리에 모아 소박한 잔치를 벌이고 싶다는 생각이 강렬하게 나를 사로잡는다. 마치 인생의 어느 지점에서 주기적으로 맺힌 매듭을 풀듯이 이들을 만나 관계의 끈을 다시 잇고 싶은 욕망에 나는 상상과 현실을 잠시 혼동한다. 관계가 끊어지는 것, 관계가 나누어지고 결렬되는 것을 수없이 경험하며 우리는 살아간다. 다른 취향이, 한순간의 불화가, 엇갈리는 이념과 이권이, 삶의 수준이 나이와 문화 같은 차이를 만드는 것들 외에도 관계를 파기케 하는 것들은 많다. 인간과 그 환경은 끊임없이 변하기에 결국은 스러지고 무의미해지는 경계들임에도 한때 이런 것은 나름의 파괴적인 힘을 발휘한다. 만나고 떠나고 또다시 만나지만, 마치 흐려진 어항 물을 미뤄둔다 해도 결국은 어느 날 아침 큰마음을 먹고 물갈이를 해주어야 하듯이, 삶의 어느 시점에 이르러서는 결단의 마음으로, 결렬된 관계, 나누어지고 와해된 관계의 복원에 시간과 마음을 투자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결렬된 것은 수리돼야 한다는 당위에서보다는 그래야지만 새롭게 만나는 사람들과의 관계가 진정한 만남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아주 어릴 적 처음으로 외교관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그즈음 자주 그랬듯이 내 나름대로 그 단어를 정의했다. 아버지의 친구였던 그 외교관이란 분의 어떤 면에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나는 그 일이 경계를 부수고 경계를 넘나드는 괜찮은 일이라고 내 개인사전에 그렇게 정의해두었다. 물론 한두 해가 지나 곧 그 단어의 원래 뜻을 알게 되었지만 어쩌면 정치적 직분이기 이전에 단어의 어의는 그다지 내 상상적 정의에서 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런 면에서 우리 모두는 우리가 관계 맺고 있는 다양한 유형의 타자와의 관계에서 주기적으로, 내가 정의한 대로의 외교관이 될 필요가 있지 않을지. 아직은 아닌가? 왜 자신이 없을까 다시 내 상상 속의 잔치에 대해 생각한다. 어렵기는 해도 만나고 싶은 사람들을 한자리에 모으는 물리적 어려움은 아무것도 아니다. 서로 모르는 그들이 한자리에 모였을 때 다양한 그들이 서로 어울릴 수 있을까 걱정되기도 하지만 그것은 각자의 요량에 맡길 일이다. 그러나 생각이 구체적으로 발전될수록 점점 더 자신이 없어지는 나를 발견한다. 내 인생의 다양한 지점에, 때로는 발설할 수 없는 난처한 상황이나 적나라한 실수의 현장에서 제각기 만난 그 사람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이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은 무엇보다 나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때로는 이율배반적이며 때로는 서로 연관이 없는 듯한 나, 어떤 면으로는 너무 변해 나조차도 알아볼 수 없을 뿐 아니라, 자주 자신도 설명할 수 없는 행동을 한 내 모든 모습을 있는 그대로 인정할 수 있는가. 나는 자문했고 불편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내게는 아직 그런 솔직함과 투명함의 용기가 없었던지 어느새 나는, 지금까지 몰두했던 이 생각의 끈을 슬쩍 놓고, 턱에 괸 손을 빼고 얼굴을 한번 쓸어내린다. 그리고 서서히 창가에서 일어나 멀어진다. 아직은 아닌 모양이다. 상상 속의 잔치가 다시 한 번 내 마음을 두드릴 때까지. 그래도 완전히 잊어버린 몇 얼굴이 떠오르는 것은 큰 수확이다. 오래전에 멈춘 그 점선에 직선을 긋는 일, 그것은 시작할 만하다.
내가 알던 사람들을 한자리에 모으면 어떨까. 생각할수록 새록새록 이 모든 사람들을 한자리에 모아 소박한 잔치를 벌이고 싶다는 생각이 강렬하게 사로잡는다. 사진은 구인사에서 개최한 효도 큰잔치에 모인 충북 단양군 단양읍 900여명의 노인들.
경계를 부수는 ‘외교관’의 역할 요컨대 내가 ‘만난 사람들’이라고 할 때 그저 지나쳤다는 것이 아니라 최소한 서로의 존재의 각인이 이뤄질 정도의 시간을 같이 보낸 그런 사람들과의 관계를 생각한다. 그것이 비록 몇 시간, 단 하루라 할지라도 말이다. 언뜻 떠올려보아도 적잖은 수의 사람들이 들어갈 만한 마땅한 장소가 있을지, 얼굴만 선명히 떠오를 뿐 이름은 생각나지 않는 사람들, 연락이 끊긴 지 오래된 사람들을 어떻게 찾아올지… 진짜 이 일을 성사시킬 작정을 한 사람처럼 구체적인 문제들을 머릿속으로 점검한다. 그러다가 현실적으로 그것이 가능한지 아닌지는 후에 생각하기로 하고 나는 생각을 진행시킨다. 늘 그렇듯이 여전히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사람들에게서보다는 한때는 가까웠으나 지금은 연락처조차 알고 있지 못한 사람들, 한때 모여 깔깔거리고 웃으며 지내다가 어느 날 마치 싸우기라도 한 것처럼 스르르 친구들의 모임에서 유령처럼 사라져버린 사람들에 대해 더 많이 생각이 멈춘다. 여러 상황들에 의해 자연스럽게 만나게 된 사람들에 대해서보다는 상대편에 대한 강한 관심과 의문 혹은 놀라움이나 감동으로 내가 먼저 다가가 말을 걸고 관계를 만들고 유지하는 데 정열을 투자한 사람들에 대한 생각에 오래 머무른다. 그리고 내 잘못으로 인해, 혹은 오해로 인해 내게 서운하다는 말도 못해보고 슬그머니 나를 떠난 사람들에 대해서도. 생각할수록 새록새록 이 모든 사람들을 한자리에 모아 소박한 잔치를 벌이고 싶다는 생각이 강렬하게 나를 사로잡는다. 마치 인생의 어느 지점에서 주기적으로 맺힌 매듭을 풀듯이 이들을 만나 관계의 끈을 다시 잇고 싶은 욕망에 나는 상상과 현실을 잠시 혼동한다. 관계가 끊어지는 것, 관계가 나누어지고 결렬되는 것을 수없이 경험하며 우리는 살아간다. 다른 취향이, 한순간의 불화가, 엇갈리는 이념과 이권이, 삶의 수준이 나이와 문화 같은 차이를 만드는 것들 외에도 관계를 파기케 하는 것들은 많다. 인간과 그 환경은 끊임없이 변하기에 결국은 스러지고 무의미해지는 경계들임에도 한때 이런 것은 나름의 파괴적인 힘을 발휘한다. 만나고 떠나고 또다시 만나지만, 마치 흐려진 어항 물을 미뤄둔다 해도 결국은 어느 날 아침 큰마음을 먹고 물갈이를 해주어야 하듯이, 삶의 어느 시점에 이르러서는 결단의 마음으로, 결렬된 관계, 나누어지고 와해된 관계의 복원에 시간과 마음을 투자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결렬된 것은 수리돼야 한다는 당위에서보다는 그래야지만 새롭게 만나는 사람들과의 관계가 진정한 만남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아주 어릴 적 처음으로 외교관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그즈음 자주 그랬듯이 내 나름대로 그 단어를 정의했다. 아버지의 친구였던 그 외교관이란 분의 어떤 면에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나는 그 일이 경계를 부수고 경계를 넘나드는 괜찮은 일이라고 내 개인사전에 그렇게 정의해두었다. 물론 한두 해가 지나 곧 그 단어의 원래 뜻을 알게 되었지만 어쩌면 정치적 직분이기 이전에 단어의 어의는 그다지 내 상상적 정의에서 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런 면에서 우리 모두는 우리가 관계 맺고 있는 다양한 유형의 타자와의 관계에서 주기적으로, 내가 정의한 대로의 외교관이 될 필요가 있지 않을지. 아직은 아닌가? 왜 자신이 없을까 다시 내 상상 속의 잔치에 대해 생각한다. 어렵기는 해도 만나고 싶은 사람들을 한자리에 모으는 물리적 어려움은 아무것도 아니다. 서로 모르는 그들이 한자리에 모였을 때 다양한 그들이 서로 어울릴 수 있을까 걱정되기도 하지만 그것은 각자의 요량에 맡길 일이다. 그러나 생각이 구체적으로 발전될수록 점점 더 자신이 없어지는 나를 발견한다. 내 인생의 다양한 지점에, 때로는 발설할 수 없는 난처한 상황이나 적나라한 실수의 현장에서 제각기 만난 그 사람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이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은 무엇보다 나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때로는 이율배반적이며 때로는 서로 연관이 없는 듯한 나, 어떤 면으로는 너무 변해 나조차도 알아볼 수 없을 뿐 아니라, 자주 자신도 설명할 수 없는 행동을 한 내 모든 모습을 있는 그대로 인정할 수 있는가. 나는 자문했고 불편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내게는 아직 그런 솔직함과 투명함의 용기가 없었던지 어느새 나는, 지금까지 몰두했던 이 생각의 끈을 슬쩍 놓고, 턱에 괸 손을 빼고 얼굴을 한번 쓸어내린다. 그리고 서서히 창가에서 일어나 멀어진다. 아직은 아닌 모양이다. 상상 속의 잔치가 다시 한 번 내 마음을 두드릴 때까지. 그래도 완전히 잊어버린 몇 얼굴이 떠오르는 것은 큰 수확이다. 오래전에 멈춘 그 점선에 직선을 긋는 일, 그것은 시작할 만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