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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지방 촌놈들은 당해도 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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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9-29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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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학규의 ‘수도권 규제 철폐’발언을 되돌아보며 역지사지를 생각하다…‘다름’의 인정에 익숙치 않은 문화, 깨달음이 아닌 기질과 습관의 문제

▣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우리는 사회적 갈등에 대해 ‘객관성’과 ‘공정성’의 가치를 역설할 때가 많다. 그럴 때에 학식이 풍부한 어떤 사람이 나타나 “객관성과 공정성이 도대체 실현 가능한 개념입니까?”라고 물으면 허탈해진다. 우리 사회의 갈등이 많고 심하다고 걱정하는 사람들에게 “갈등은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라고 훈계하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이를 가리켜 ‘우도할계(牛刀割鷄)의 오류’라 부를 수 있겠다.

지난해 11월 정부가 수도권에 국내 대기업 첨단공장 신증설을 허용하기로 하자, 1만여 명의 경북 구미 시민들이 구미공단 운동장에 모여 수도권 규제 완화에 반대하는 범시민 궐기대회를 열었다. (사진/ 구미시청 제공)

대학 강의실에서 하거나 듣던 철학·정치학 강의를 곧장 시장판에 끌고 나와 구체적 현안에 적용하려는 게 소 잡는 칼로 닭 잡으려는 것과 비슷하다는 뜻이다.


손학규와 지방 서민의 처지

정반대로 이론 세계에선 귀한 대접을 받는 게 현실 세계에선 전혀 적용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그게 바로 역지사지(易地思之)다. 싸움을 할 때 자주 쓰이던 말 중 하나가 “입장 바꿔놓고 생각해보라”다. 그런데 요즘 싸움은 의도적으로 역지사지를 하지 않으려는 데 그 특성이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승자 독식주의’ 경향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나는 네 입장은 모르거니와 알고 싶지도 않으니 그건 네가 알아서 할 일이라는 식이다. 수도권 규제 문제를 사례 삼아 살펴보기로 하자.

전 경기도지사 손학규의 ‘100일 민심 대장정’은 많은 이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고 있다. 나 역시 감동한 사람 중 하나다. 그게 설사 ‘생쇼’라도 한국 정치인들 가운데 그렇게 힘든 생쇼를 한 사람은 없었다는 게 감동의 이유다.

사회과학적 마인드가 강한 사람은 중요한 건 정치인의 이념·정책이지 개인적 행태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백번 옳은 말씀이다. 그러나 그건 강의실에서만 옳다. 대중은 이념·정책에 감동하거나 분노하진 않는다. 대박을 터뜨리거나 재앙을 낳는 극단적 경우를 제외하곤 말이다. 대중은 정치인의 개인적 행태에 훨씬 더 큰 영향을 받는다.

나는 손학규의 ‘100일 민심 대장정’을 지켜보면서 내내 궁금한 게 하나 있었다. 잠시 설명이 필요하겠다. 경기도지사 시절 손학규는 경기도의 이익은 물론 국익을 앞세워 수도권 규제 철폐를 공격적으로 부르짖었다. 이제 손학규는 경기도지사가 아니라 대한민국 대통령이 되기 위해 지방을 대상으로 ‘100일 민심 대장정’을 벌이고 있다. 지방 서민의 힘든 삶을 같이 체험하면서 온몸으로 공감했기 때문일까? 손학규는 노무현 정권에 ‘바다이야기’ 사태의 책임을 물으면서 “서민들 팔아 정권 잡고, 그 불쌍한 서민들 피를 빨아먹고 나라를 거덜 내는 이 패륜아들을 어찌해야 하는가”라는 독설을 퍼붓기도 했다. 일부 언론은 이 독설에 대해 거칠다고 지적하면서도 손학규의 진정성만큼은 인정했다. 뼈 빠지게 고생하면서도 희망을 찾을 수 없는 지방 서민의 삶을 직접 겪은 처지에서 나온 진정어린 분노라는 해석이었다. 나의 궁금증은 그런 해석으로 인해 더욱 부풀어올랐다. 내가 궁금해한 건 손학규는 지방 서민의 참담한 현실에 분노하면서도 여전히 수도권 규제 철폐를 부르짖던 경기도지사 시절의 소신을 고수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손학규의 ‘100일 민심대장정’을 보면서 궁금한 것이 있다. 그가 지방 서민의 참담한 현실에 분노하면서도 여전히 수도권 규제 철폐를 부르짖던 경기도지사 시절의 소신을 고수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손학규 관련 기사들을 열심히 읽었지만 나는 그런 질문을 던진 기자를 한 명도 보지 못했다. 내가 미처 보지 못한 다른 곳에 실렸을 수도 있겠지만, 내가 읽은 그 많은 기사들 중 어떤 기자도 그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는 건 참으로 신기한 일이었다.

경기도지사로서 수도권 규제 철폐를 부르짖는 건 이해할 수 있다. 국익을 생각하면 수도권 규제 철폐가 옳다는 주장에 동의할 순 없을망정 논의해볼 만한 가치는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논의가 제대로 이루어지면, 국익에 치여 희생되는 지방 서민들의 이야기가 대두될 것이고, 수도권 규제를 철폐하는 대신 지방 서민을 살릴 수 있는 다른 국가적 차원의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는 합의가 가능해질 것이다.

‘수도권-지방’넘어 계급갈등으로

그러나 손학규는 경기도지사의 역할에만 몰두한 나머지 지방 서민의 처지에 대해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손학규의 최종 목표가 경기도지사였다면 문제될 게 없겠지만, 그는 대통령이 되겠다고 나서질 않았는가. 이제 손학규는 무어라 말할 건가?

미리 노파심에서 말씀드리자면, 행여 손학규가 수도권 규제 철폐가 궁극적으론 지방에도 이익이 된다는 주장은 하지 않으면 좋겠다. 그렇게 말씀하시면 수도권 규제를 유지하라고 심지어 삭발 투쟁까지 했던 그 수많은 지방 사람들에게 “당신들은 자신의 이익도 모르는 바보 멍텅구리”라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노 정권을 향해 독설을 퍼붓던 절박한 심정으로 철저히 지방 서민의 입장에서 자신의 진심을 말해주면 좋겠다.

손학규 이야기를 꺼낸 건 손학규의 당시 주장에 역지사지가 없었다는 점을 지적하기 위해서였다. 이제 또 다른 주장들을 살펴보자.

지난 9월7일 서울 중구 명동 은행연합회관에선 한국규제학회 주최로 ‘수도권 규제개혁, 모두 잘사는 길’이라는 학술대회가 열렸다. 이 학술대회에서 서강대 경제학과 교수 김경환은 ‘수도권 규제에 대한 재인식’이란 주제발표를 통해 “수도권 정책의 전제에 오류가 있다”며 “인구와 산업의 수도권 집중으로 발생하는 사회적 비용은 과대평가된 반면 집중의 이익은 과소평가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서울이 너무 크다는 시각은 단순한 편견이며 수도권 규제가 지방 경제 성장에 기여한다는 증거가 없기 때문에 수도권 규제를 통해 지방 육성이 가능하다는 생각도 잘못된 것”이라고 했다.

이 주장을 존중한다. 그러나 이 주장에도 역지사지는 없다. 수도권 규제를 통해 지방 육성이 가능하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일 수 있지만, 수도권 규제 철폐를 통해 지방 육성이 가능하다는 생각은 훨씬 더 잘못된 것이라는 게 지방 사람들의 생각이다. 어쩌면 지방 사람들은 뾰족한 답이 없는 상황에서 최악을 피해 차악이라도 지키기 위한 투쟁에 임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그런 상황에서 차악도 악이기 때문에 최악을 막을 이유가 없다고 말하는 건 너무 잔인한 게 아닐까?

일주일 뒤인 9월 14일 전경련은 정례 회장단 회의를 개최한 뒤 발표한 성명에서 수도권 규제가 완화될 경우 13조원의 투자 증대 효과가 있을 것이라는 조사 결과를 공개하면서 정부에 규제 완화를 강력 촉구했다.

이 주장 역시 존중하지만, 역지사지가 없다는 건 마찬가지다. 기업이 지방 걱정까지 해야 할 필요는 없겠지만, 자신들의 주장이 실현되는 걸 가로막는 걸림돌을 넘어서기 위해서라도 역지사지를 해보면서 다른 대안 제시까지 하면 안 되는 걸까? 지방이 죽는 건 필연이라고 보기 때문에 지방 문제는 피해가려고 하는 걸까?

나는 오래전 <지방 촌놈들은 당해 싸다>라는 자극적인 제목의 책을 썼지만 출간하진 않았다. “내가 무슨 ‘독수리 5형제’라고!” 하는 자기 냉소 때문이었다. 그 책의 핵심 요지는 이런 것이었다.

지방 사람들이 지방 이익을 지킬 수 있는 좋은 방법이 있다. 수도권 규제 철폐를 공격적으로 부르짖는 보수 신문들을 구독하지 않으면 된다. 그러나 지방 사람들은 그런 식으로 대응하지 않는다. 이들은 너무도 국가와 민족을 사랑하는 나머지 지방의 이익에 연연하지 않는다. 그래서 수도권 규제 철폐를 외치는 보수 신문들을 열심히 구독하며 그런 주장을 하는 정당이나 정치인에게도 아무런 불이익을 주지 않는다. 그래서 내 주장인즉슨, “당신들은 당해 싸다”는 것이다.

서로 딴말하기 경연대회

그러나 한 꺼풀 벗겨보면 사정은 의외로 복잡하다는 걸 알게 된다. 과연 수도권 규제를 둘러싼 갈등이 ‘수도권-지방’의 갈등일까? 그런 점도 있지만, 더욱 중요한 건 계급 갈등이다. 지방에서 웬만큼 사는 사람들은 자식을 서울로 유학을 보내며, 더 잘사는 사람들은 수도권에 집 한 채 정도는 갖고 있다. 서울 강남 아파트 값이 뛴 것도 속사정을 들여다보면 투자할 곳을 찾지 못해 헤매던 지방의 돈이 몰린 탓이다.

역지사지 없이 양산된 비판은 그 누구에게도 타격을 주지 못한다. 2002년 ‘참여정부 두 달을 말한다’에 출연한 노무현 대통령.

물론 머릿수로 보자면 그런 사람들은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들은 지방에서의 발언권을 독점한 지방 상층 계급이다. 이들이 침묵하면 있던 일도 없는 게 되고, 이들이 발언하면 없던 일도 있는 게 된다. 수도권 규제가 풀릴 때마다 지방에선 항의 시위가 벌어지지만 오래가진 않는다. 그건 전체 지방민들의 이목이 있어 벌이는 행사일 뿐, 지방 상층 계급은 사실상의 수도권 주민이기도 하기 때문에 ‘수도권-지방’의 문제에 대해 분노하지 않는다.

지방 언론도 마찬가지다. 언론 모니터를 하는 사람들은 지방 언론이 지역 이기주의와 더불어 지역감정을 부추기는 보도를 한다고 비판하지만, 그건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말씀이다. 그런 기사를 자세히 살펴보시라. 실명 비판이 없다. 아무에게도 책임을 묻지 않는다. 지방 특유의 연고와 정실 때문에 실명 비판을 회피한다. 허공에 대고 총을 쏘는 격이다.

지식인도 다를 바 없다.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실력 있고 원기 왕성한 지방대 교수들의 꿈은 서울 소재 대학으로 직장을 옮겨가는 것이기 때문에 지방 문제에 신경쓸 겨를도 없거니와 신경을 써도 안 된다. 괜히 자기 발목에 족쇄를 채울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논점으로 복귀하자. 수도권 규제 문제만 그런 게 아니다. 우리 사회의 주요 갈등에 대해 쏟아지는 담론을 자세히 살펴보시라.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역지사지가 없다. 내 생각만 한다. 상대편 때리기다. 승자 독식주의다. 그렇게 해서 어느 한쪽이 확실하게 승리한다면 국가적 차원의 효율은 기대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게 그렇지 않다. 어느 한쪽이 우세하더라도 일단 대결 구도를 형성한 이상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패배하지는 않는다. 끝없는 소모적 갈등이 일어나게 돼 있다.

인터넷에서 대접받는 논객을 보라. 훌륭한 논객도 많지만, 상대편을 약 올리고 모욕하는 재주로 인기를 얻는 논객도 많다. 역지사지는 후련한 느낌을 주지 못한다. 카타르시스에 굶주린 우리 시대의 대중은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짓누르는 데에서 쾌감을 느낀다. “아이고 시원해라!”

한국 사회의 주요 논쟁은 ‘친북좌파’ 대 ‘수구꼴통’의 대결 구도다. ‘친북좌파’와 ‘수구꼴통’이 그렇게 많은가? 아니다. 상대편에게 압승을 거두기 위한 전략·전술 차원에서 부풀려진 허깨비다. 역지사지가 필요 없었던 군사독재 정권 시절의 유산이다. ‘전부 아니면 전무’였던 투쟁의 습속이 생체 권력으로 살아남아 작동하기 때문이다.

역지사지는 새로운 시대정신

역지사지를 하자는 건 모든 걸 화기애애하게 풀어갈 수 있다거나 그렇게 하자는 게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다. 역지사지 없이 양산된 비판은 그 누구에게도 타격을 주지 못한다. 역지사지 없는 논쟁이란 어차피 서로 딴말하기 경연대회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역지사지를 해본 이후의 비판이 진짜 비판이고 힘을 갖는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만, 그 어느 쪽이든 ‘꼴통’을 인내하는 건 고역이다. 감정의 폭발을 보이기 십상이다. 그러나 꼴통은 특별한 사람이 아니다. 굴곡 많고 한 많은 사회에 꼴통이 많은 건 당연하다. 그 누구건 어떤 점에선 다 꼴통이다. 꼴통을 참지 못하는 나의 혐오도 꼴통 행태다. 문제는 누군가가 꼴통이냐 아니냐에 있는 게 아니라 꼴통을 상대하는 방식에 있다.

바로 여기서 한국인의 사회문화적 동질성이 문제가 된다. 동질성과 잔인성은 상호 친화적이다. 동질적이지 않은 사람은 쉽게 인내하거나 용서할 수 있어도 동질적인 사람에겐 그런 여유가 발휘되지 않는다. 이게 바로 근친증오(近親憎惡)와 근린증오(近隣憎惡) 현상이 자주 일어나는 이유다. 역지사지에 인색해 한국 사회의 갈등이 곧잘 증폭되는 이유도 바로 그런 동질성에 힘입은 바 크다. 꼴통에 대한 혐오도 ‘다름’의 인정에 익숙하지 않은 탓이다.

역지사지는 이해나 깨달음의 문제가 아니라 기질과 습관의 문제다. 한국 사회 전반의 담론 제시 방식에 일대 변화가 필요하다. 어떤 주장을 할 때 역지사지의 결과도 같이 제시하게끔 하는 습관을 정착시킬 필요가 있다. 예컨대, 수도권 규제 철폐를 주장하려면 그것에 반대하는 지방민들의 입장도 고려하고 배려하면서 그 입장을 압도할 수 있는 논리를 개발해달라는 것이다. 그건 괜한 수고가 아니다. 오히려 그렇게 하는 게 주장의 설득력을 높일 수 있다.

언론은 모든 이해당사자들이 그런 식으로 주장하게끔 유도하는 힘을 갖고 있다. 오히려 문제는 언론이 역지사지에 가장 게으르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젠 너무도 비생산적인 사회적 갈등의 양산 체제에 염증을 낼 때도 되지 않았는가? 역지사지가 새로운 시대정신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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