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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김소희] 머나먼 왕진, 환자는 어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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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1-02-27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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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지진지역 의료봉사단 ‘글로벌케어’ 동행기… 치료의 손길 외면해 귀국 전날에야 환자 만나

7박8일의 일정 대부분은 길 위에서 보내야 했다. 아메다바드에서 바차오로 가는 벌판에서 종종 소떼 무리를 만났다.
부옇게 동이 터오고 있었다. 밤새 도로를 내달리는 트럭들의 굉음에 어렵게 잠을 청한 지 얼마나 지났을까. 텐트의 열린 틈이 갑자기 깜깜해졌다. 시커멓고 커다란 돼지 한 마리가 고개를 들이민 것이다. 놀라지 않았다. 새벽녘 여진이 조금 있었지만 그냥 침낭 속에 몸을 웅크렸던 것처럼, 돼지가 아니라 소나 낙타나 말이 들어왔어도 놀라지 않았을 것이다. 인도에 발을 디딘 지 나흘 만에 나는 무척이나 무심해져 있었다. 들판에서 용변을 해결하는 일도, 더러운 물에 얼굴을 씻는 일도 익숙해졌다. 무엇보다 ‘바로 저기’라는 인도인들의 길안내가 서울에서 부산 거리라는 것도 알게 됐다. 인도로 출발하기 전에 했던 현지사정 조사는 말짱 도루묵이었다.

애초 국내의 의료봉사단체 글로벌케어가 인도 지진지역에 의료지원활동을 함께 가자고 제의했을 때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인도는 내게 미지의 땅, 신비의 땅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자원봉사라니 취재고민할 걱정없고 좋은 일도 하고, 금상첨화였다.

신비의 땅으로 가는 험난한 여정


한데 일은 처음부터 꼬이기 시작했다. 32년 만의 폭설 때문이었다. 2월15일 오후 1시로 예정됐던 델리행 비행기가 출발이 늦춰지는 바람에 꼬박 12시간 김포공항 출국대기실에 붙들려 있어야 했다. 우리가 조급해 하는 동안 공항에서 비행기를 기다리는 인도인들은 태평하고 느긋했다. 그들에게는 이 모든 일도 ‘신의 뜻’인 것일까. 2월16일 아침 6시간의 비행 끝에 델리공항에 내렸다. 뒤늦게 짐이 도착하지 않은 걸 알았다. 아시아나항공에서 결빙을 이유로 일부 짐을 내려놓고 김포공항을 이륙한 것이다. 설상가상이었다.

공항을 빠져나오자 냄새가 코를 찔러 왔다. 도시 곳곳에 밴 냄새는 인도 특유의 진향 향신료 내음이 아니라 싸구려 디젤유 냄새였다. 가난한 북델리는 거대한 가스실험실 같았다. 길거리에는 오토바이를 개조해 만든 경운기 모양의 릭샤와 짐수레, 자전거와 버스, 사람과 소들이 뒤엉켜 다녔다. 차가 서면 사방에서 구걸꾼들이 우르르 몰려와 “박시시(적선)”를 외쳐댔다. 차선도 없이 엄청난 속도로 달리는 탈것들은 서로 부딪치지도 않고 용케 제 갈길을 갔다.

길거리 노점에서 산 한 주간지는 지난 1월26일 인도 북서부지역 구자라트주를 강타한 지진의 복구상황을 소개하며 사망자 10만명, 부상자 20만∼30만명, 이재민 200만명으로 피해 규모를 추정하고 있었다. 리히터 규모 7.9의 강진이었다. 호텔에서 텔레비전을 틀었다. 70개가 넘는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다가 뉴스채널을 발견했다. 한 촌부는 차렷자세로 카메라를 쳐다보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판잣집이라서 피해가 적어요. 부자들 집이 다 무너졌어요.” 방송은 영어로 더빙되고 있었다. 자기 아들도 다리를 다쳤다고 말하면서 촌부는 천연덕스레 웃었다. 촌부는 “마자마, 마자마”를 연발했다. 괜찮다는 뜻의 구자라트어다.

다음날인 17일 델리에서 국내선 비행기를 타고 아메다바드로 향했다. 공항에 내리자 현지인들이 낯선 이방인들을 구경하기 위해 몰려들었다. 모여든 이들 중 한 사내가 한국말이 “치키치키 참참”하다고 말했다. 별뜻없는 의성어로 들린다는 이야기였다.

남한 면적의 33배에 이르는 인도는 28개 주로 나뉘어 있다. 각각의 주는 각각의 나라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인도의 대표언어는 힌디어지만 수백개의 언어가 존재하고 정부가 인정한 주요언어만도 15개에 달한다. 지진지역 의료봉사를 하러 왔다는 설명을 듣고는, 몰려든 이들이 앞다투어 자기가 겪은 일들을 이야기했다. 이름을 물으면 주소까지 적어주려 들고 가족의 안녕을 물으면 사돈의 팔촌이야기까지 줄줄이 늘어놓았다. 어쨌거나 “모든 게 끝났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말끝에 계속 웃음을 달았다. 한달 전에 있었던 지진보다는 낯선 얼굴의 이방인이 더 관심을 끄는 대상이었다.

안내 의사는 보이지 않고 환자가 없다네

구자라트주 잠나가 근처의 한 지진 피해 마을. 멀리 서 있는 이는 초등학교 교사로 자신도 이재민이라고 말했다.
지진지역까지 일행을 안내해주기로 한 인도인 의사는 조금 늦는다고 하더니 하루종일 기다려도 오지 않았다. 대신 구자라트 주정부 소속 의료공무원이 호텔로 찾아왔다. 드네쉬라는 이름의 스물여섯살된 그 공무원은 길거리에서 만난 수많은 인도인들과는 달리 깔끔한 복장에 굳은 얼굴 표정이었다. 그는 우리 일행에게 “더이상의 환자는 없다. 우리에겐 의사도 많고 약도 많다”며 돌아갈 것을 종용했다. 사실 그가 준 정보는 나중에 대부분 사실로 드러났지만, 계급적 자부심이 지나친 그의 태도는 도무지 신뢰가 가지 않았다. 드네쉬는 우리가 식사를 같이 하자고 ‘모시지’ 않은 것에 삐쳤다. 그리고 “운전사와 단둘이 마주보면서는 밥을 먹을 수 없다”며 마침 식사를 마치고 로비에 앉아 있던 나에게 함께 식당에 가달라고 요청했다. 드네쉬를 태우고 온 주정부 차량의 운전사는 눈도 맞추지 못할 만큼 그를 어려워했다.

우리나라에는 인도가 4대 계급사회로 알려져 있지만, 그 4대 계급에도 끼지 못하는 불가촉천민(언터처블)이 있다. 전체 인구의 16%에 달하는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각 주정부는 고용의 일정량 이상을 이들로 채우도록 정책화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의 생활조건은 도저히 구제되지 않는다. 드네쉬는 내 직업이 기자라는 걸 알고는, 자격증이 있냐, 돈은 얼마나 버냐, 집에 하인은 몇명이냐며 계속 물었다. 슬슬 피곤해지기 시작했다. 이틀이나 지났지만 의료봉사는커녕 의료봉사할 곳도 정하지 못한 상태가 아닌가. 호텔(우리나라 여인숙 수준)비용이 싼 것은 천만다행이었다. 좋은 방은 1만5천원, 싼 방은 9천원 수준이었다.

한밤중에 도착한 인도인 의사는 자기도 사정을 잘 모른다고 했다. 그리고는 계속 그냥 가보라고만 말했다. 유일하게 믿었던 그에게서 아무런 도움을 받을 수 없게 되자 난감해졌다. 결국 일행 11명 중 7명은 아메다바드에 남고 가이드를 포함한 선발대 4명은 6∼7시간 걸린다는 지진지역에 직접 들어가기로 결정했다. 일요일인 2월18일 새벽 툴툴대는 공무원 드네쉬를 달래서 차량을 빌려 탔다. 남은 사람은 차를 렌트해 하루 뒤에 따라오기로 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구호약품이 아니었다

광활한 벌판을 달렸다. 모랫바람이 계속 밀려들었다. 소떼와 양떼들이 도로를 점거한 채 걷고 있었고 사람들은 짐짝처럼 트럭에 실려가고 있었다. 지진지역에 가까워진 모양이다. 무너진 다리며 갈라진 땅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간디가 태어난 구자라트주는 목화농사를 짓는 이들이 태반인 가난한 지역이다. 사막의 바람이 불어오고 작물이 자라지 않으면 사람들은 술로 시름을 달래려 했다. 그래서 간디가 내린 결단은 금주령. 지금도 구자라트주에서는 술을 사고파는 게 금지돼 있다.

중간중간 휴게소에 들렀다. 전화는 어디서든지 연결이 안 됐고, 화장실을 물으면 모두들 들판을 가리켰다. 구자라트주에서는 94년에도 페스트환자가 발생한 일이 있다. 한국을 떠나기 전 말라리아 예방약을 먹고 장티푸스 주사를 맞았지만 마음이 놓이진 않았다. 드네쉬는 자기네 물은 소독이 돼서 괜찮다고 했다. 그러면 뭐 하는가. 수도관이 깔린 곳이 많지 않은데.

오후 3시 바차오에 도착했다. 지진 피해가 가장 컸다는 부지에서 차로 2시간 가까이 떨어진 도시이다. 온통 무너져버린 벌판에 난민촌이 형성돼 있었다. 인도 전역에서 온 나무들이 쌓여 있었다. 나무를 실어다 부려놓으면 난민들 스스로 자르고 세워 집을 짓는다고 한다. 흙탕물이 흘러가듯 사람들은 느리게 움직이고 있었다.

바차오에서 의료활동을 하는 이들은 힌두교계의 시민단체와 적십자사 관계자, 군인들이었다. 병원은 텅텅 비어 있었다. 대부분의 인도인들은 으깨지고 부러지지 않는 한, 병원을 찾지 않는다고 한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약이 아니라 밥과 물과 집이었다. 특히 구자라트주는 전통적으로 힌두교 강세지역이다. 인도 인구의 80%를 차지하는 힌두교도들은 죽음을 덤덤히 맞는다. 한국의 의료봉사팀 글로벌케어가 뒤늦게 이곳을 찾은 이유는 구호손길을 기다리는 사람들을 찾아서 돕기 위해서였지만, 현지 사정은 기대와 완전히 딴판이었다. 천막촌 탁자에 앉아 있던 주정부의 관료들은 거친 영어발음으로 계속 “노 페이션트”라고 말했다. 환자가 없다는 것이다.

아, 이러다가 먼지바람에 날아갈 건가

인도 도착 엿새 만에 의료활동을 할 수 있었다. 지진 후유증을 앓고 있던 빔카타 마을 사람들은 의료진들을 환영했다.
저녁 7시가 되자 사방이 캄캄해졌다. 당장 잘 곳이 없었다. 숙소가 다 해결돼 있다고 장담하던 드네쉬는 맨땅에 지붕만 쳐져 있는 약품보관용 천막을 가리키며 이곳에서 묵으라고 말했다. 그리고 자기 임무는 끝났다면서 떠나버렸다.

나는 이 순간 마음을 비웠다. 폼나는 인도 지진지역 의료봉사기를 쓰고자 했으나 안 되는 일은 안 된다. 기사는 좌충우돌 인도여행기 혹은 의료봉사 실패기가 될 것 같았다. 너무 인도에서 오래 머무르지 말라던 부장의 지시와, 해외취재간 김에 가능한하면 다른 것도 취재해오라던 팀장의 얼굴이 떠올랐다. 인샬라. 전화도 안 되는데 무슨 수로 비행기 티켓을 앞당겨 예약하나. 아니 그보다 이곳을 벗어날 수 있을지부터 의문이었다.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복통으로 쓰러지거나 소발굽에 채이거나 먼지바람에 날아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유언장이라도 써놓고 올 것을. 모든 것을 신의 뜻에 맡기기로 하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별이 쏟아질 것 같았다.

우두망찰하던 우리는 한 기독교봉사단체 차량을 발견했다. 그들이 숙소로 삼고 있는 텐트에서 하룻밤 끼어 자기로 했다. 그 텐트가 바로 돼지가 들어온 텐트이다.

아침에 이들의 차량을 얻어타고 또다른 피해도시인 간디담으로 갔다. 이곳에도 환자는 없었다. 시장통에서 유일하게 무너지지 않은 호텔을 찾아 일행을 기다렸다. 호텔 종업원이 한 소년을 데리고 들어오더니 바닥에 엄청나게 소독약품을 발랐다. 오후 3시께. 침대에 누워 있는데 몸이 흔들렸다. 여진이었다. 호텔 밖으로 뛰어나오니 사람들이 모두 몰려나와 있었다. 잠시 뒤 누군가 소리를 치자 사람들은 다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거리에 나와 있는 동안 시장통의 꼬마들은 내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그뒤를 소와 개들이 따랐다.

다종교, 다언어, 다인종의 국가 인도를 지탱시켜주는 힘은 방종에 가까운 자유와 철저한 계급구분이다. 그리고 그들의 삶은 생존과 씨름하는데 다 소비되는 듯했다. 도시에는 궁전 같은 집들과 쓰레기더미 같은 슬럼이 나란히 있고, 시골은 거지와 주민이 구별되지 않았다. 10억 인구의 60%가 절대빈곤에 시달린다니, 기막힌 운명이다.

밤에 후발대 일행이 도착했다. 여기저기 전화통화를 한 결과, 남서쪽으로 수백킬로미터 떨어진 도시 잠나가의 군인병원에 아이들이 많이 실려와 있다는 정보를 들었다. 대안이 없던 우리는 밤새 불빛 하나 없는 지방도로를 내달렸다. 운전석 바로 뒤에 앉았던 나는 졸음을 쫓기 위해 운전사와 힌두교 신들 이야기를 했다.

신의 분노를 받아들이는 가난한 사람들

인도 북서부 지역을 강타한 지진은 수많은 이재민들을 만들어 냈다. 난민촌 소녀.
파괴와 재창조를 관장하는 시바신은 최고의 신이다. 시바신의 성전에는 항상 남자와 여자가 성기를 결합하고 있는 부조가 새겨져 있다. 비슈르는 유지의 신이고 시바의 아들인 가네쉬는 부의 상징이다. 가게마다 붙어 있는 코끼리 형상의 신이 바로 가네쉬다. 시바가 말 안 듣는 아들 가네쉬의 머리를 베어버리자 엄마 칼라는 아들의 몸에다 코끼리 머리를 붙여 그를 살려냈다고 한다. 운전사들이 즐겨 신봉하는 크리슈나는 지혜의 여신으로 비슈르의 화신이다. 운전사 곰샴(42)은 이번에 인도를 강타한 지진은 신의 분노라고 말했다. 그리고 “인도에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정부에서도 큰 걱정을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새벽녘에 잠나가에 도착했다. 곧장 군병원을 방문했으나 이곳에도 환자는 없었다. 이틀 전에 이미 떠나버렸다는 것이다. 인도에 온 지 벌써 닷새가 지났다. 일행은 서울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기운없이 짐을 싸고 있는 동안 눈이 퉁방울처럼 생긴 호텔 매니저가 다가와 자꾸 말을 시켰다. 건성으로 대꾸하다가 순간 귀가 번쩍 뜨였다. 잠나갈 근처에 조그마한 지진피해 마을이 많은데 너무 시골이라 구호손길이 미치지 않는다는 이야기였다. 마지막으로 속는 셈치고 길을 나섰다.

너른 들녘이 서서히 붉게 물들고 있었다. 목동들은 소떼를 몰고 가고 사리를 입은 여인네들은 물동이를 이고 갔다. 2시간 시골길을 달려 도착한 마을의 이름은 빔카타. 빨간 모간벨 꽃을 단 나무가 제일 먼저 눈에 띄었다. 우리가 찾던 바로 그런 곳이었다! 700명가량의 주민이 사는 빔카타 마을은 1월26일 오전 8시45분께 불과 1분15초 동안의 지진으로 전쟁터처럼 허물어졌다. 세명이 죽었지만 마침 공화국창건 기념일 행사 때문에 학교에 있던 아이들은 모두 무사했다고 한다.

사람들은 무너진 집터 주변에 천막을 치고 살고 있었다. 비록 집은 무너졌지만 마을은 평화로운 부락공동체의 원형을 보존하고 있었다. 아이들은 맨발로 뛰놀고 있었고, 공터 옆 힌두사원과 학교, 손님접대용건물(게스트하우스)은 지붕만 조금 허물어진 채 서 있었다.

2월21일 수요일 아침 드디어 의료봉사를 시작했다. 어른들은 타박상, 골절상을 비롯해 지진 후유증을 앓고 있었고 아이들은 호흡기질환과 각막질환에 시달리고 있었다. 3분의 1가까운 아이들은 중이염을 앓는 중이었다. 피부질환을 앓는 이들이 무척 많았다. 물이 더럽고 모랫바람이 심하게 부는 탓이다. 나는 항생제를 물에 타거나 상처부위 먼지를 소독해주는 일을 거들었다.

123명의 환자 돌보며 가난을 배웠다

무너진 마을 우물에서 물을 긷던 소녀.
사람들이 하나둘 늘어나 길게 줄을 이었다. 어른이나 아이나 눈이 마주칠 때마다 몸을 꼬며 부끄러워했다. 눈이 감염된 한 아이의 눈에 약을 발라주자, 엄마가 더러운 손으로 아이의 눈을 문질렀다. 그러지 말라고 몇번을 말해도 또 그랬다. 아이들의 영양상태는 비교적 양호했다. 그래도 이 마을은 농사를 짓는 곳이라 하루에 한끼씩은 밥을 먹는다고 했다. 몇몇 할머니가 완강하게 주사를 거부해 애를 먹은 걸 빼곤 진료는 순탄하게 이뤄졌다. 특히 잠나가의 호텔 매니저와 그 친구들이 몽땅 몰려와 통역을 도와준 덕분에 일은 빨리 진행될 수 있었다. 모래바람이 몰아오면 이불을 가져다 약을 덮었다.

게스트하우스를 지키며 마을의 허드렛일을 도맡아 하는 마차(51)가 접시에 차를 따라 한국에서 온 방문객들을 대접했다. 붉은 물이 나는 찻잎과 우유와 설탕을 섞어 만든 인도의 차는 이들에게 점심식사 대용이기도 했다. 마차는 마을사람들에게 인기가 많았고 남을 돕는 걸 행복해 했다.

의료봉사팀이 진료하는 동안 걷잡을 수 없이 피로가 몰려들었다. 마차의 부엌 창가에는 낡고 더러운 침대가 놓여 있었다. 그 침대에 누워 달고 긴 낮잠을 잤다. 인도에서 처음으로 편하게 잔 잠이었다. 어디선가 훈풍이 불어왔다. 가난과 궁핍이 모욕적이지 않다는 걸 난생 처음 느꼈다. 어쩌면 치료를 받은 쪽은 그들이 아니라 나 자신인지도 몰랐다.

구자라트주 잠나가= 글 · 사진 김소희 기자 soh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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