훔치고 싶을 정도로 부러운 인생이 있다면 그건 김청조의 인생… 아들이 연출한 <소풍>의 극본을 써 거짓말같이 환갑에 데뷔했다네
▣ 김선주 전 <한겨레> 논설주간·칼럼니스트
어떤 사람의 인생이 훔치고 싶을 정도로 부럽다면… 그런 친구가 있다. 극작가이고 연출가인 김청조다.
20대의 우리들은 주로 청진동에서 찌그러진 주전자에 든 막걸리를 마시며 예술과 사회와 우리의 미래에 대해, 떠들어댔다. 열정적이었던 김청조의 옆에는 언제나 조용한 양문길씨가 있었다. 그 둘은 이미 부부였고 대학시절에 신춘문예니 하는 곳에 화려하게 데뷔를 한 작가들이었다. 나는 신출내기 문학담당 기자였다. 가난했던 우리는 청진동에서 가구점을 하고 있던 친구 부부네 가게에 죽치고 앉았다가 누군가 돈이 있으면 술집으로 향하곤 했다.
그러나 생계를 위해 가구점을 차렸던 그 부부가 장사가 안 돼 이민을 가고 나자 우리의 아지트도 없어졌다. 각기 아이들을 낳고 생업에, 먹고사는 일에 허우적거리며 흩어졌다. 20대의 그 시절 같았다, 친구는… 사람이 누군가를 알게 된다는 것은 정신 속에 그 사람이 지문으로 남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무런 지문도 남기지 못하고 간 사람이 있는가 하면 우연히 길거리에서 본 어떤 중년의 피곤한 얼굴이 두고두고 마음에 남아 있기도 하다. 단 한 번 만났을 뿐 다시는 만날 일이 없는 사람인데도 정신의 어느 갈피엔가 간직되어 있다가 문득문득 나의 삶에 어떤 중대한 발언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기도 한다. 김청조도 나한테 그런 사람이다. 청조가 왜 소설을 안 쓰지, 왜 희곡을 안 쓰지, 아이들은 어떻게 컸는지 가끔 생각하면서 세월은 흘러갔다. 텔레비전 문학관에서 그가 극본을 써서 좋은 평가를 받은 것을 보았고 최승희를 드라마화한 것을 열심히 보기도 했다. 열심히 먹고사는구나 싶었다. 남편 양문길씨는 작품은 접었는지 출판사에 다닌다는 소식을 들었다. 10여 년쯤 김청조와 양문길 선생이 직장으로 찾아왔다. 아, 청조도 나를 기억하고 있구나 싶었다. 청조는 열정적으로 작품 계획을 토로했다. 열아홉에 영화감독이 되어 서른 살까지 여섯 편의 영화를 남기고 간 김유영의 일생을 쓰고 싶다고 했다. 그의 옆에서 양 선생은 여전히 조용히 앉아 있었다. 아들과 연극을 한다고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아들과 연극을 하면서 아파트를 날리고 양평의 골짜기로 들어가 있던 시절이었다. 그동안 양 선생은 세상을 뜨고 아들 양정웅은 극단 ‘여행자’ 대표로 국내는 물론 세계 연극계에서 주목받는 연출가가 되어 있었다. 아들의 작품을 엄마가 연출하거나 배우로 출연하기도 하고 엄마의 작품을 아들이 연출하고 배우도 하고 있었다. 며칠 전 아주 더운 날 우리는 대학로에서 만났다. 역사도 오래된 학림다방에서. 몇십 년의 세월을 건너뛰었다. 이야기는 끝이 없었다. 점심시간이 지나가고 있었다. 배가 고팠다. 점심을 먹으러 나섰다. 청조가 그랬다. 어디 가서 술 한잔 할까. 우리는 저녁이 이슥하도록 술을 마셨다. 20대 때의 우리의 모습과 같았다. 내가 그런 것이 아니고 청조가 그랬다. 30대에 그는 지옥 같은 세월을 보냈다고 한다. 그래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여자들이 결혼하고 아이 낳고 또 가족이란 구조 속에서 이리저리 치이다 보면 그건 지옥이지, 나는 다시 직장이란 장으로 튀어나왔는데 너는 어떻게 지옥의 세월을 보냈지 물었다. …아직도 안 늦었다, 안 늦었다 하며 살았지. 마르그리트 뒤라스는 50대에 <히로시마 내 사랑>을 썼고 65살에 <연인>을 썼거든. 그리고 새롭게 연애를 시작한 것이 여든 살이었어. 그런데 귄터 그라스가 <양철북>으로 세계적인 작가가 되었을 때 어떤 외국 신문의 평을 보니까 ‘투 영’이라고 썼더라구. 그게 기억나더라니까. 아마 우리 나이로 마흔이었을 거야. 그래 마흔은 무얼 하기엔 너무 젊어, 아니 너무 어려 이렇게 되뇌었지. 60에 데뷔한들 늦는 것은 아니야. 그래서 인생의 목표를 이렇게 정했단다. 60에 데뷔해서 여든다섯에 전성기를 누리겠다고…. 마흔은 너무 젊어, 아니 너무 어려 그런데 거짓말처럼 그는 60에 데뷔를 했다. 지난해 천상병 시인의 일생을 그린 <소풍>이란 작품을 쓰고 아들이 연출을 했다. 그리고 그 작품이 극본상을 탄 것이다. 화려한 데뷔다. 자신의 작품이 각광까지 받고 보니 여든다섯에 전성기를 누리겠다는 계획이 너무 빨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가 두려워지기까지 했다고 웃는다. 그는 상금을 받았고 그걸 털어 촬영기자재를 샀다. 독립영화협의회에서 그는 촬영을 배웠다. 영상을 알아야 할 것 같아서. 젊은 사람들도 힘들다는 과정을 소화했다. 써야 할 게 너무 많아. 1930년대의 이야기들을. 그는 열정적으로 말했다. 왜 <고요한 돈강>이나 <닥터 지바고> 같은 작품을 우리는 갖지 못하는 거지. 당시의 우리 선조들은 정말 정열적으로 살았어. 60살에 독립운동에 투신해 연해주로 떠났던 친척 할아버지의 전설 같은 이야기를 쓰고 싶어. 내 마음속에 간직한 이야기지. 그걸 쓸 거야. <토지>도 안 읽고 <장길산>도 안 읽었어. 영향받을까봐. 김유영도 써야지. 그런데 그의 작품이 스틸 몇 점만 남아 있고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거야. 그래서 고민이야. 그런데 너는 무얼 먹고사니 물었다. 음 양 선생 연금이 삼십 몇만원 나오고 독일에서 비교문학을 공부하는 딸이 아르바이트하며 가끔 용돈도 보내주고… 음 사위는 독일인 요리사거든… 아주 괜찮은 친구야. 그리고 아들이 요새 좀 잘나가잖니… 용돈 줘. 아들이 잔소리 심해. 하루에 여덟 시간은 일을 하라고 하거든…. 그는 거나하게 취한 채로 좀 늦었다 하며 독립영화 하는 젊은 친구들과 시나리오 읽는 모임으로 총총히 사라졌다.

지난해 천상병 시인의 일생을 그린 <소풍>이란 작품으로 친구 김청조(오른쪽)는 데뷔를 했다. <소풍>을 연출한 아들 양정웅과 함께한 사진.
그러나 생계를 위해 가구점을 차렸던 그 부부가 장사가 안 돼 이민을 가고 나자 우리의 아지트도 없어졌다. 각기 아이들을 낳고 생업에, 먹고사는 일에 허우적거리며 흩어졌다. 20대의 그 시절 같았다, 친구는… 사람이 누군가를 알게 된다는 것은 정신 속에 그 사람이 지문으로 남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무런 지문도 남기지 못하고 간 사람이 있는가 하면 우연히 길거리에서 본 어떤 중년의 피곤한 얼굴이 두고두고 마음에 남아 있기도 하다. 단 한 번 만났을 뿐 다시는 만날 일이 없는 사람인데도 정신의 어느 갈피엔가 간직되어 있다가 문득문득 나의 삶에 어떤 중대한 발언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기도 한다. 김청조도 나한테 그런 사람이다. 청조가 왜 소설을 안 쓰지, 왜 희곡을 안 쓰지, 아이들은 어떻게 컸는지 가끔 생각하면서 세월은 흘러갔다. 텔레비전 문학관에서 그가 극본을 써서 좋은 평가를 받은 것을 보았고 최승희를 드라마화한 것을 열심히 보기도 했다. 열심히 먹고사는구나 싶었다. 남편 양문길씨는 작품은 접었는지 출판사에 다닌다는 소식을 들었다. 10여 년쯤 김청조와 양문길 선생이 직장으로 찾아왔다. 아, 청조도 나를 기억하고 있구나 싶었다. 청조는 열정적으로 작품 계획을 토로했다. 열아홉에 영화감독이 되어 서른 살까지 여섯 편의 영화를 남기고 간 김유영의 일생을 쓰고 싶다고 했다. 그의 옆에서 양 선생은 여전히 조용히 앉아 있었다. 아들과 연극을 한다고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아들과 연극을 하면서 아파트를 날리고 양평의 골짜기로 들어가 있던 시절이었다. 그동안 양 선생은 세상을 뜨고 아들 양정웅은 극단 ‘여행자’ 대표로 국내는 물론 세계 연극계에서 주목받는 연출가가 되어 있었다. 아들의 작품을 엄마가 연출하거나 배우로 출연하기도 하고 엄마의 작품을 아들이 연출하고 배우도 하고 있었다. 며칠 전 아주 더운 날 우리는 대학로에서 만났다. 역사도 오래된 학림다방에서. 몇십 년의 세월을 건너뛰었다. 이야기는 끝이 없었다. 점심시간이 지나가고 있었다. 배가 고팠다. 점심을 먹으러 나섰다. 청조가 그랬다. 어디 가서 술 한잔 할까. 우리는 저녁이 이슥하도록 술을 마셨다. 20대 때의 우리의 모습과 같았다. 내가 그런 것이 아니고 청조가 그랬다. 30대에 그는 지옥 같은 세월을 보냈다고 한다. 그래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여자들이 결혼하고 아이 낳고 또 가족이란 구조 속에서 이리저리 치이다 보면 그건 지옥이지, 나는 다시 직장이란 장으로 튀어나왔는데 너는 어떻게 지옥의 세월을 보냈지 물었다. …아직도 안 늦었다, 안 늦었다 하며 살았지. 마르그리트 뒤라스는 50대에 <히로시마 내 사랑>을 썼고 65살에 <연인>을 썼거든. 그리고 새롭게 연애를 시작한 것이 여든 살이었어. 그런데 귄터 그라스가 <양철북>으로 세계적인 작가가 되었을 때 어떤 외국 신문의 평을 보니까 ‘투 영’이라고 썼더라구. 그게 기억나더라니까. 아마 우리 나이로 마흔이었을 거야. 그래 마흔은 무얼 하기엔 너무 젊어, 아니 너무 어려 이렇게 되뇌었지. 60에 데뷔한들 늦는 것은 아니야. 그래서 인생의 목표를 이렇게 정했단다. 60에 데뷔해서 여든다섯에 전성기를 누리겠다고…. 마흔은 너무 젊어, 아니 너무 어려 그런데 거짓말처럼 그는 60에 데뷔를 했다. 지난해 천상병 시인의 일생을 그린 <소풍>이란 작품을 쓰고 아들이 연출을 했다. 그리고 그 작품이 극본상을 탄 것이다. 화려한 데뷔다. 자신의 작품이 각광까지 받고 보니 여든다섯에 전성기를 누리겠다는 계획이 너무 빨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가 두려워지기까지 했다고 웃는다. 그는 상금을 받았고 그걸 털어 촬영기자재를 샀다. 독립영화협의회에서 그는 촬영을 배웠다. 영상을 알아야 할 것 같아서. 젊은 사람들도 힘들다는 과정을 소화했다. 써야 할 게 너무 많아. 1930년대의 이야기들을. 그는 열정적으로 말했다. 왜 <고요한 돈강>이나 <닥터 지바고> 같은 작품을 우리는 갖지 못하는 거지. 당시의 우리 선조들은 정말 정열적으로 살았어. 60살에 독립운동에 투신해 연해주로 떠났던 친척 할아버지의 전설 같은 이야기를 쓰고 싶어. 내 마음속에 간직한 이야기지. 그걸 쓸 거야. <토지>도 안 읽고 <장길산>도 안 읽었어. 영향받을까봐. 김유영도 써야지. 그런데 그의 작품이 스틸 몇 점만 남아 있고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거야. 그래서 고민이야. 그런데 너는 무얼 먹고사니 물었다. 음 양 선생 연금이 삼십 몇만원 나오고 독일에서 비교문학을 공부하는 딸이 아르바이트하며 가끔 용돈도 보내주고… 음 사위는 독일인 요리사거든… 아주 괜찮은 친구야. 그리고 아들이 요새 좀 잘나가잖니… 용돈 줘. 아들이 잔소리 심해. 하루에 여덟 시간은 일을 하라고 하거든…. 그는 거나하게 취한 채로 좀 늦었다 하며 독립영화 하는 젊은 친구들과 시나리오 읽는 모임으로 총총히 사라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