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들이 살던 집이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경축하는 나라 … 임시적인 삶, 시간이 되면 모두 떠날 준비를 하는 유목민들
▣ 정기용 건축가
며칠 전 인테리어와 관련된 잡지사의 젊은 기자가 사무실로 찾아와 인터뷰를 했다. ‘건축가들이 생각하는 주택과 주생활’이란 고정란에 싣는다고 했다.
나는 지금 이 순간 ‘주택’에 대해서 말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자문해가며 답하려 애쓰고 있었다. “좋은 집이란 어떤 것입니까?” “지금까지 설계하신 집 중에서 어떤 것이 제일 마음에 드십니까? 그리고 이유는 무엇인지요?” 이런 식의 질문에 갑작스레 답하자니 궁색하기도 하고 느닷없어 보이기도 하여 답을 주저하다 결국 나는 내가 내 입으로 쏟아내는 답변들에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런 비슷한 질문에 대해 한두 번 말로 한 것이 아니기에 거의 자동적으로 튀어나온 대답들이 공허하게 들렸기 때문이다. 나는 대답했다. “좋은 집이란 거주하는 사람의 삶의 흔적이 서서히 누적되어 그 사람의 향기가 배어나오는 그런 집이지요”라고. 상투적인 나의 대답은 주택건축에 대한 형태나 양식, 외관에 대한 것이 아니라 집 속에 거주하는 사람의 삶에 대해서 이야기한 것으로 기자가 원할 것 같은 집의 모양새에 대해서는 답을 거부한 셈이었다. 그래선지 나는 즉각적으로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런데 말이죠 집을 이야기할 때 사실은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거주할 줄 알게 되어서야 비로소 집을 지었고 집을 지은 다음 비로소 인간이 되었다는 말을 깊이 새겨야 합니다”라고. 거주하는가 대기하는가 그러면 거주할 줄 안다는 것은 무슨 말이며 집을 지을 줄 알아야 비로소 인간이 된다는 것은 도대체 무슨 말인가. ‘거주할 줄 안다’는 말은 한 사회의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혼자 생존하는 것이 아니라 이웃과 더불어 살며, 이런 공동성의 원리 안에서 가족과 화목한 삶을 영위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한 가족이 한 지붕 아래 살며 서로를 보살피고 의지하며, 이런저런 가족사에 대해 공통의 기억으로 결속될 때 비로소 인간다운 인간이 된다는 이야기다. 다분히 현상학적이고 실존적인 인간의 모습을 집과 연관해 말할 수 있는 적절한 표현일 수 있다. 그런데 이런 말 뜻이 지금 이 시대 한국 땅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것인가? 전 국민의 60~70%가 거의 획일적인 아파트에 거주하고 있을 뿐 아니라 핵가족의 변형이 다양하며 정주시대의 삶의 환경이 완전히 뒤바뀌어 도시 유목민 시대가 도래한 지금 우리의 거주 모습은 어떠한가? 우리가 선택한 것이라기보다 지금까지 성공의 신화를 누리는 아파트는 언제쯤 우리의 변화하는 다양한 삶을 담아내며, 더 인간적인 얼굴을 할 것인가? 지금이 아마도 이제는 더 늦출 수 없는 우리 모두의 문제인 듯싶다. 거주에 대한 얄팍한 시장조사에는 응했는지 모르지만 우리가 좋은 환경에서 거주할 주거권을 포기한 채 말없이 아파트에 사는 것으로 끊임없이 아파트 공급자들에게 수동적으로 동조해온 ‘공범’자로부터 언제나 우리는 탈출할 수 있는가? 아니 그럴 자세는 되어 있는가 물어야만 한다. 거주의 가치보다는 부동산의 가치에 집착하고 인간적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면적’을 위해서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이런 상황을 우리는 언제까지 묵과할 것인가? 주택의 사용가치보다는 교환가치가 훨씬 우월한 사회에서 공동체는 살아남을 수 없는 것은 아닌가? 모든 시민들이 살기 위해 아파트에 거주하는 것이 아니라 팔기 위해 아파트를 구입한다는 것은 늘 이사갈 준비를 하는 것을 의미하며 이것은 ‘이웃과 더불어 살’ 시간과 공간을 포기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은 사는 것이 아니라 대기하는 것이다. 거주하는 집을 ‘대합실’처럼 활용하는 것이다. 싸잡아 거칠게 얘기하자면 이 나라 사람들은 집 속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 대합실에서 ‘대기‘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대기하는 대합실 속에서의 삶이란 ‘임시적‘이며 ’즉흥적‘이고 연속성이 없다. 시간이 되면 모두 떠날 준비가 되어 있는 유목민들의 모습이다. 이런 도시에서 ‘공동체’니 ‘이웃관계’니 하는 이야기들은 성립하지 않으며 난센스같이 들린다. 그렇다고 우리가 각자 돌아가서 사는 실제의 모습은 또한 어떠한가? 낯선 가구들 틈새에서 가구들이 군림하도록 우리는 작아져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어느 집이나 비슷한 우글쭈글한 바로크식 소파가 거실을 차지하고 6인용 8인용 식탁은 손님 올 때나 쓰고 사람들은 앉은뱅이 상에다 차려서 퍼질러 앉아서 편안하게 라면을 끓여먹고 있는 것은 아닌가. 침실은 더 가관이다. 좁은 방에 침대가 24시간 주인이고 사람들은 요리조리 피해다니다 모퉁이에 정강이를 다친다. 거실에는 나폴레옹 코냑병과 여행과 삶의 전리품들이 전시되어 있고 벽에는 터무니없이 큰 TV가 허한 눈짓을 하고 있다. 어느 것 하나 우리의 삶이 배어나온 흔적은 드물다. 삶의 기억은 지저분한 것처럼 치워버리고 늘 깨끗하고 번질거리는 새것 같은 것만이 대접을 받는다. 이런 광경이 어느 집이나 비슷한 것은 사는 모습이나 태도가 비슷해서 그러기도 하거니와 사는 목적이 남들에 뒤지지 않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의 소산은 아닌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우리 신체는 아직 좌식 생활의 DNA를 가지고 있으며 강요되는 현대생활을 온전히 수용하기를 거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한마디로 우리는 사는 연습을 수십 년 강요당하고 있을 따름이다. 그래선지 그래도 가족끼리 오순도순 살던 집을 재건축이란 이름으로 때려부술 때는 이를 경축하는 사람들이 된다. 아파트 정문에 “경축! 재건축, 안전진단 통과”라는 프랭카드는 한국에서만 보는 진풍경이다. 자신들이 살던 집이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경축하는 나라는 지구상에 대한민국밖에 없을 것이다. 아파트 분양에 당첨되기 위해 새벽부터 줄을 서고, 나라는 이를 방관하고 지속하도록 내버려두는 나라가 대한민국 말고 또 어디 있겠는가? 옆동네에 임대아파트가 지어진다고 “우리 동네 임대아파트가 웬 말인가”라는 플래카드는 또 얼마나 우리를 서글프게 하는가! “경축! 재건축, 안전진단 통과” 8월23일이면 행정복합도시의 ‘첫마을’ 계획안이 세계의 여러 나라 건축가들로부터 답지할 것이다. 9월1일 당선안을 발표한다고 한다. 이 설계 경기는 아마도 우리의 주생활을 변화시킬 수 있는 중요한 계기를 마련할지도 모른다. 우리가 진정으로 거주할 줄 안다면 모두 관심을 가지고 지켜볼 일이다. 이제 더는 미룰 수 없는 우리의 자유로운 거주권을 위해서 말이다.
살기 위해 아파트에 거주하는 것이 아니라 팔기 위해 아파트를 구입한다. 우리네 삶은 임시적이고 즉흥적인 것으로 변해간다.(사진/ 한겨레 탁기형 기자)
왜냐하면 그런 비슷한 질문에 대해 한두 번 말로 한 것이 아니기에 거의 자동적으로 튀어나온 대답들이 공허하게 들렸기 때문이다. 나는 대답했다. “좋은 집이란 거주하는 사람의 삶의 흔적이 서서히 누적되어 그 사람의 향기가 배어나오는 그런 집이지요”라고. 상투적인 나의 대답은 주택건축에 대한 형태나 양식, 외관에 대한 것이 아니라 집 속에 거주하는 사람의 삶에 대해서 이야기한 것으로 기자가 원할 것 같은 집의 모양새에 대해서는 답을 거부한 셈이었다. 그래선지 나는 즉각적으로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런데 말이죠 집을 이야기할 때 사실은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거주할 줄 알게 되어서야 비로소 집을 지었고 집을 지은 다음 비로소 인간이 되었다는 말을 깊이 새겨야 합니다”라고. 거주하는가 대기하는가 그러면 거주할 줄 안다는 것은 무슨 말이며 집을 지을 줄 알아야 비로소 인간이 된다는 것은 도대체 무슨 말인가. ‘거주할 줄 안다’는 말은 한 사회의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혼자 생존하는 것이 아니라 이웃과 더불어 살며, 이런 공동성의 원리 안에서 가족과 화목한 삶을 영위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한 가족이 한 지붕 아래 살며 서로를 보살피고 의지하며, 이런저런 가족사에 대해 공통의 기억으로 결속될 때 비로소 인간다운 인간이 된다는 이야기다. 다분히 현상학적이고 실존적인 인간의 모습을 집과 연관해 말할 수 있는 적절한 표현일 수 있다. 그런데 이런 말 뜻이 지금 이 시대 한국 땅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것인가? 전 국민의 60~70%가 거의 획일적인 아파트에 거주하고 있을 뿐 아니라 핵가족의 변형이 다양하며 정주시대의 삶의 환경이 완전히 뒤바뀌어 도시 유목민 시대가 도래한 지금 우리의 거주 모습은 어떠한가? 우리가 선택한 것이라기보다 지금까지 성공의 신화를 누리는 아파트는 언제쯤 우리의 변화하는 다양한 삶을 담아내며, 더 인간적인 얼굴을 할 것인가? 지금이 아마도 이제는 더 늦출 수 없는 우리 모두의 문제인 듯싶다. 거주에 대한 얄팍한 시장조사에는 응했는지 모르지만 우리가 좋은 환경에서 거주할 주거권을 포기한 채 말없이 아파트에 사는 것으로 끊임없이 아파트 공급자들에게 수동적으로 동조해온 ‘공범’자로부터 언제나 우리는 탈출할 수 있는가? 아니 그럴 자세는 되어 있는가 물어야만 한다. 거주의 가치보다는 부동산의 가치에 집착하고 인간적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면적’을 위해서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이런 상황을 우리는 언제까지 묵과할 것인가? 주택의 사용가치보다는 교환가치가 훨씬 우월한 사회에서 공동체는 살아남을 수 없는 것은 아닌가? 모든 시민들이 살기 위해 아파트에 거주하는 것이 아니라 팔기 위해 아파트를 구입한다는 것은 늘 이사갈 준비를 하는 것을 의미하며 이것은 ‘이웃과 더불어 살’ 시간과 공간을 포기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은 사는 것이 아니라 대기하는 것이다. 거주하는 집을 ‘대합실’처럼 활용하는 것이다. 싸잡아 거칠게 얘기하자면 이 나라 사람들은 집 속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 대합실에서 ‘대기‘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대기하는 대합실 속에서의 삶이란 ‘임시적‘이며 ’즉흥적‘이고 연속성이 없다. 시간이 되면 모두 떠날 준비가 되어 있는 유목민들의 모습이다. 이런 도시에서 ‘공동체’니 ‘이웃관계’니 하는 이야기들은 성립하지 않으며 난센스같이 들린다. 그렇다고 우리가 각자 돌아가서 사는 실제의 모습은 또한 어떠한가? 낯선 가구들 틈새에서 가구들이 군림하도록 우리는 작아져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어느 집이나 비슷한 우글쭈글한 바로크식 소파가 거실을 차지하고 6인용 8인용 식탁은 손님 올 때나 쓰고 사람들은 앉은뱅이 상에다 차려서 퍼질러 앉아서 편안하게 라면을 끓여먹고 있는 것은 아닌가. 침실은 더 가관이다. 좁은 방에 침대가 24시간 주인이고 사람들은 요리조리 피해다니다 모퉁이에 정강이를 다친다. 거실에는 나폴레옹 코냑병과 여행과 삶의 전리품들이 전시되어 있고 벽에는 터무니없이 큰 TV가 허한 눈짓을 하고 있다. 어느 것 하나 우리의 삶이 배어나온 흔적은 드물다. 삶의 기억은 지저분한 것처럼 치워버리고 늘 깨끗하고 번질거리는 새것 같은 것만이 대접을 받는다. 이런 광경이 어느 집이나 비슷한 것은 사는 모습이나 태도가 비슷해서 그러기도 하거니와 사는 목적이 남들에 뒤지지 않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의 소산은 아닌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우리 신체는 아직 좌식 생활의 DNA를 가지고 있으며 강요되는 현대생활을 온전히 수용하기를 거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한마디로 우리는 사는 연습을 수십 년 강요당하고 있을 따름이다. 그래선지 그래도 가족끼리 오순도순 살던 집을 재건축이란 이름으로 때려부술 때는 이를 경축하는 사람들이 된다. 아파트 정문에 “경축! 재건축, 안전진단 통과”라는 프랭카드는 한국에서만 보는 진풍경이다. 자신들이 살던 집이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경축하는 나라는 지구상에 대한민국밖에 없을 것이다. 아파트 분양에 당첨되기 위해 새벽부터 줄을 서고, 나라는 이를 방관하고 지속하도록 내버려두는 나라가 대한민국 말고 또 어디 있겠는가? 옆동네에 임대아파트가 지어진다고 “우리 동네 임대아파트가 웬 말인가”라는 플래카드는 또 얼마나 우리를 서글프게 하는가! “경축! 재건축, 안전진단 통과” 8월23일이면 행정복합도시의 ‘첫마을’ 계획안이 세계의 여러 나라 건축가들로부터 답지할 것이다. 9월1일 당선안을 발표한다고 한다. 이 설계 경기는 아마도 우리의 주생활을 변화시킬 수 있는 중요한 계기를 마련할지도 모른다. 우리가 진정으로 거주할 줄 안다면 모두 관심을 가지고 지켜볼 일이다. 이제 더는 미룰 수 없는 우리의 자유로운 거주권을 위해서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