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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건축계의 불행한 침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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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7-27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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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TO 결정으로 이미 시범 개방된 서비스업 ‘건축설계’의 위기… 정부·학교·단체의 방관에 유예기간 끝나고 허약체질로 FTA 맞아

▣ 정기용 건축가
▣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최근 10여 년 동안 우리는 영어 이니셜로 조합된 말이 연속해서 등장하는 것을 보며 살아왔다.

‘IMF’(국제통화기금), ‘WTO’(세계무역기구) 그리고 최근에는 ‘FTA’라는 말이 신문, 잡지, 방송에 끊임없이 나오고 있다. 이제는 왠지 영어 약자가 일반명사처럼 떠돌면 불안한 느낌이 든다. 왜냐하면 IMF라는 말이 세상에 떠돌더니 급기야 구조조정의 바람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직장을 잃는 사태를 체험했기 때문이다. 경제 성장에 취해온 한국인들에게 ’IMF 사태‘는 세상이 뒤집히는 듯한 큰 충격이었고 그 후유증은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다.

WTO의 결정에 따라 올해부터 일부 공공 건축물은 국제 입찰에 부쳐지도록 되어 있다. 자생력을 키우지 못했지만 전쟁은 시작됐다.


요새는 또다시 ‘한미 FTA’라는 새로운 용어가 등장해서 우리에게 의구심과 궁금증을 불러일으킨다. 내 일이 아니라고 못 들은 척 할 수도 있지만 조금이라도 한미 FTA가 우리 생활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들여다보면 그 여파가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어느 누구도 피해갈 수 없음을 알게 된다. 지금은 이 거대한 폭풍의 실체가 무엇인지 잘 모르는 사람들이 훨씬 많기 때문에 몇몇 전문가들의 ’전유물‘처럼 보일 따름이다. 오늘은 단지 폭풍 전야의 고요함일 뿐이다.

국제적 수준과 너무 먼 한국 건축사 제도

사실을 이야기하자면 내가 속한 건축계에는 이미 10여 년 전부터 깊고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사’(士)자가 붙은 직업 중에 ‘건축사’의 직업이 어떤 위기에 처해 있는지는 건축사 자신들도 모르는 이가 더 많은 듯한데 그 이유는, 적어도 오늘만큼은 지금까지처럼 매일매일이 순조로운 듯 지나고 있기 때문이다. 서비스 업종의 충격과 변화는 한미 FTA를 준비하는 정부가 목적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건축설계 시장의 개방은 이미 1994년 세계무역기구(WTO) 체제로 전환된 시점부터 예고됐다. 그러나 문제는 건축서비스 시장이 그냥 개방되는 게 아니라 상호 시장을 개방할만큼 각국의 ‘건축사’ 수준이 균질해져야 한다는 조건이 대두되면서부터였다. 2001년 ‘도하 어젠다’에서 서비스업과 농수산물을 시범사업으로 개방하기로 결정했고, 건축설계가 일종의 ‘서비스업’으로 분류되면서 모든 문제는 시작됐다.

서비스업 중 변호사와 회계사들은 이미 국제 간에 대체로 서비스 양허 기준이 마련돼 있었으나 건축사와 기술사는 전혀 그런 준비가 안 돼 있었다. 그래서 WTO는 국제건축가연맹(UIA)에게 건축서비스업과 관련한 국제 간 양허 기준을 마련토록 위임했다. 우선 UIA는 베이징회의에서 각국마다 동일 수준의 양과 질로 건축교육을 이수받아야 한다는 원칙을 세우고 이를 검증할 국제공인 인증원 제도를 마련하기로 결정했다. 국제적으로 공인된 건축교육 과정을 이수해야만 건축사 시험에 응시할 자격을 가질 수 있게 됐다. 그리고 우리는 건축사 시험문제도, 건축사 등록제도도 국제 수준으로 새로이 정립해야 하는 부담을 안게 됐다. 미국이나 영국과 같은 선진국이 기준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한국은 모든 조건에서 부적격 판정을 받고 준비유예 기간을 갖게 됐다. 그러나 건축 3단체(건축사협회·건축학회·건축가협회)는 논의만 하다 허송세월을 보내고 말았다. 부랴부랴 몇 년 전부터 대학들이 건축교육 4년제를 5년제로 바꾸고 절대 교육량을 늘렸을 뿐 올해 겨우 인증원이 만들어지고 서울대, 서울시립대 등이 이제야 인증 절차를 예시적으로 받기 시작한 것이다. 야심찬 중국은 유예기간을 앞당겨 시장 개방에 대비한 모든 준비를 2000년께에 완료했다. 16개 대학이 이미 미국 대학에서 인증 절차를 마쳤고, 2000년부터는 건축사시험을 영어로 보기 시작했다.

격변하는 세계화의 흐름을 숙지하지 못한 채 우물 안 개구리처럼 지내던 건축계는 큰 혼란에 빠진 것이다. 이렇게 유예기간을 허송하고 국제 건축설계 시장의 파고를 이겨낼 자생력을 키우기도 전에 다시 한미 FTA를 맺는 순간 한국 건축계는 큰 위기에 직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참으로 딱한 노릇이다. 건축사 또는 건축가가 한국 사회에서 떳떳하고 책임 있는 전문직업인으로 자리잡기도 전에 한국 건축은 세계의 건축설계 및 디자인 분야에서 30% 이상을 점유하고 있는 미국의 영향권에 편입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지금 한국은 세계 시장에서 미미하게 0.3%를 차지하고 있다. 더군다나 건축은 스크린쿼터를 사수해온 영화계보다 자생력이 턱없이 모자라는 형편이다. 특히 건축설계 교육의 황폐화는 명약관화한 일로 다가오고 있다.

박정희 정권 이후 오랫동안 건축과 교수는 설계 실무를 할 수 없게 족쇄를 채웠고, 건축교육은 1년이 더 늘어났으나 실력 있는 교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형편인 것이다. 건축교육의 문제를 더 자세히 알게 되면 다수가 통탄해 마지않을 것이다.

골리앗과 싸우기도 전에 다윗은 죽는가

부끄러운 일이다. 건축교육조차 제 궤도에 못 올려놓은 한국이 공룡과 같은 큰 미국과 건축설계는 물론 엔지니어링 서비스업에서 경쟁을 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이미 올해부터 건축설계 시장이 개방돼 IMF로 20만달러 이상(한화 2억~2억5천만원 정도)의 공공 건축물은 국제 입찰에 부쳐지도록 되어 있다. 전쟁은 시작된 것이다.

한 건축가는 요즘의 한국 건축계를 조선이 멸망하던 ‘구한말’로 비유한다. 외세는 서로 한국을 삼키려 하는데 집안에서는 ‘수구’와 ‘보수’가 싸움박질만 하는 꼴이라고. 이제 세계 시장에 발가벗긴 채 내동댕이쳐진 한국 건축계는 가만히 앉아서 조용한 아침의 나라의 오랜 평화를 빼앗길 것이다. 이 모두가 자업자득이란 생각도 든다.

한미 FTA가 지속되면서, WTO 체제가 가져올 서비스업의 변화를 예견하면서도 속수무책으로 넋놓고 있는 건축계는 물론, 1300명의 건축사와 직원들의 생계가 달려 있고 나아가서는 수많은 협력업체와 한국 건축문화를 살찌워야 할 정책 당국자들 또한 침묵으로 일관한다. 농수산업이나 금융업보다 종사하는 인구나 교역에 미칠 액수가 비교될 수 없을 만큼 작아서 거론할 가치가 없다면 할 말이 없다. 우는 아기 떡 하나 더 준다고 침묵하고 있는 건축계는 문제가 없다고 한다면 더욱 할 말이 없다. 그러나 이것을 알아야 한다. 이제 우리가 낸 세금으로 미국 건축설계 회사를 먹여살려야 할 때가 당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다윗이 골리앗과 경쟁할 힘을 빨리 키울수록 우리나라 서비스업이 국제경쟁력을 얻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문제는 그러기 전에 다윗이 무대에서 영영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떨칠 수 없는 것이 지금 우리의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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