췌언을 견딜 수 없어 “춥다”라 말하지 않고 어느 겨울을 버텼네… 미래 아이들의 말은 느려도 좋으니 존재 깊은 곳에서 울려나오기를
▣ 최윤 소설가·서강대 프랑스문화학과 교수
▣ 사진 윤운식 기자 yws@hani.co.kr 어릴 때 아이를 맡겼던 유아원에서는 ‘날적이’라는 이름의 부모와 교사가 같이 쓰는 일기장이 있었다. 어느 날 거기에는 아이에 대한 우려 섞인 교사의 생각이 적혀 있었다. 교사의 걱정은 아이가 ‘또래에 비해’ 너무 말이 느리다는 거였다. 그 말에 나는 아이가 정말 아가였을 때 너무 울지 않아 이러다가 이 착한 아가가 점차 벙어리가 되는 것이 아닌가, 철딱서니 없는 걱정을 했던 생각이 떠올랐다. 지나놓고 보니 어느 정도까지는 교사의 지적이 옳았다. 실제 아이의 환경이 자주 바뀌고 무엇보다 여러 언어에 노출되다 보니 언어 발달에서 다른 아이들하고 차이가 나는 성장 단계를 거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교사의 우려에 답을 써보내지는 않았지만 따로 만날 기회에 나는 농담 반 진담 반 이렇게 말했다. 후에 어른이 되면 말을 하고 싶어서 할 때보다 하고 싶지 않아도 억지로 말할 때가 더 많을 테니 지금부터 말 느린 것을 걱정하지 말자고.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아이는 물론 벙어리로 퇴화하지도 않았고, 지금 아이는 수다쟁이는 아니라도 수년 전 한 교사가 보였던 우려를 잘 극복하고 잘도 조잘거리며 자라고 있다. 하루에 꼭 필요한 문장은 몇개일까
이미지의 시대라고 말하지만 나는 이 시대를 말 홍수의 시대로 감지한다. 전 지구인의 정보화 시대가 어떤 심오한 인격적 변화를 인류에 미쳤는지는 두고두고 진단할 전문가들의 영역이라 나로서는 그에 대해 한마디 얹기조차 어렵지만, 적어도 한반도 이남에서 정보화는 전 국민이 말의 중요성, 말의 쾌락을 발견하게 된 계기가 되지 않았나 생각할 때가 있다. 말도 많이 하게 되었지만 말도 재미있게들 한다. 말하는 속도는 또 얼마나 빨라졌는지 정신 차리고 듣지 않으면 반 정도는 놓친다. 논술 세대에 속해서 그런지 요즘 젊은층은 누구나 마이크를 잡고 한바탕 말재능을 발휘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 같다. 물론 말에는 인터넷 채팅, 싸이, 블로그 등 넘쳐나는 말·텍스트들도 포함시켜야 할 것이다. 조금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나는 우리나라의 영어 바람도, 말에 대한 우리의 시대적 정열과 궤를 같이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런가 하면 휴대전화와 문자 메시지에 대한 우리의 각별한 애착 또한 간과할 수 없다. 말로 인한 웃음을 웃음 중 최고로 치고, 웃을 기회, 은근히 미소를 지을 기회를 엿보고 있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확실히 흥미진진한 시대적 변화가 아닐 수 없다. 물론 말 홍수의 시대란 그만큼 말로 인한 그늘이 만만치 않은 시대이기도 하다. 말이 사회적이 되다 보니 매끄럽되 스며듬이 없다. 그런가 하면 말이란 하면 할수록 늘기에 꼭 필요한 말보다 췌언이 늘어나는 시대이기도 하다. 하루를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문장은 몇 개 되지 않는다. 그 나머지 말이 모두 췌언은 아니겠지만 우리의 의중을 왜곡시키는 무수한 문화적인 훼방꾼들로 인해 우리는 할 말을 위해 그 몇 배가 되는 불필요한 말들을 덧붙일 수밖에 없는 상황에 자주 처한다. 때로는 신경쓰지 않고 발설하는 말로 하루가 지나갈 때도 있다. 몇십 년 만의 추위라는 어느 겨울 날 단 십여 분을 같이 걷게 된 어떤 사람은 지루하게도 무려 57번이나 “어이 춥다”를 반복했다. 잘 모르는 사이였기에 어색해서 그랬겠지만 그 덕분에 나는 그해 겨울 단 한 번도 “춥다”는 말을 하지 않기로 결심하고 그 겨울을 버텼다. 물론 “춥다”는 말을 대신할 무수한 다른 표현을 만들어내는 수사학적인 변주를 즐겼고, 그러다 보니 어느새 추위도 지나가버렸다. 현란미의 극치에서 단순미를 흠모하듯…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 말과 그 위상이 격상된 것을 즐기고 또 반가워하면서도 나는 지나가버린 말의 이상적인 시대, 혹은 아직 오지 않은 새로운 말의 시대를 그리워한다. 글쎄, ‘태초의 말씀’ 이후, 바벨탑 사건 이후 현재까지 실제 모든 문명의 거의 전 시대에 걸쳐 말은 시대적으로 갱신해야 할 어떤 것으로 다루어졌으니 나만의 새삼스러운 그리움이 아닐지도 모른다. 현란함의 극치에서 다양함을 압도하는 단순미를 흠모하듯, 보석상에 진열된 보석 가공품들 사이에서 원석의 본질적 신비에 시선을 뺏기듯 나는 시대를 역행하는, 그보다는 시대를 뛰어넘는 어떤 말을 그리워한다. 생각해보면 사람은 참 간사하다. 젊은 문학도 시절 국어의 어법에 스며 있는 경건주의와 경직된 문법주의를 억압적으로 느꼈기에 나는 그 반대의 것을 무작정 선호했다. 이제 옛 바람은 현실이 되고도 넘쳐, 우리 말의 관습은 유연하며 가볍고 장식적이며 감각적이고 자유롭게 되었다. 욕망은 늘 변덕스럽기에 이제는 이루어진 토양 저 너머의 것을 그리워한다. 적어도 자라나는 아이들의 시대의 말은, 다소 느려도 좋으니 머리나 목 언저리에서가 아니라 심장 너머 저 존재 깊은 곳에서 울려나오기를, 그들의 말이 단지 현재를 복사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만들어내는 것이 되었으면 한다. 시대착오적이라고? 모든 좋은 말, 좋은 문학은 늘 시대를 앞섰으니 그 자체가 시대착오적 아니었던가.
▣ 사진 윤운식 기자 yws@hani.co.kr 어릴 때 아이를 맡겼던 유아원에서는 ‘날적이’라는 이름의 부모와 교사가 같이 쓰는 일기장이 있었다. 어느 날 거기에는 아이에 대한 우려 섞인 교사의 생각이 적혀 있었다. 교사의 걱정은 아이가 ‘또래에 비해’ 너무 말이 느리다는 거였다. 그 말에 나는 아이가 정말 아가였을 때 너무 울지 않아 이러다가 이 착한 아가가 점차 벙어리가 되는 것이 아닌가, 철딱서니 없는 걱정을 했던 생각이 떠올랐다. 지나놓고 보니 어느 정도까지는 교사의 지적이 옳았다. 실제 아이의 환경이 자주 바뀌고 무엇보다 여러 언어에 노출되다 보니 언어 발달에서 다른 아이들하고 차이가 나는 성장 단계를 거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교사의 우려에 답을 써보내지는 않았지만 따로 만날 기회에 나는 농담 반 진담 반 이렇게 말했다. 후에 어른이 되면 말을 하고 싶어서 할 때보다 하고 싶지 않아도 억지로 말할 때가 더 많을 테니 지금부터 말 느린 것을 걱정하지 말자고.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아이는 물론 벙어리로 퇴화하지도 않았고, 지금 아이는 수다쟁이는 아니라도 수년 전 한 교사가 보였던 우려를 잘 극복하고 잘도 조잘거리며 자라고 있다. 하루에 꼭 필요한 문장은 몇개일까
이미지의 시대라고 말하지만 나는 이 시대를 말 홍수의 시대로 감지한다. 전 지구인의 정보화 시대가 어떤 심오한 인격적 변화를 인류에 미쳤는지는 두고두고 진단할 전문가들의 영역이라 나로서는 그에 대해 한마디 얹기조차 어렵지만, 적어도 한반도 이남에서 정보화는 전 국민이 말의 중요성, 말의 쾌락을 발견하게 된 계기가 되지 않았나 생각할 때가 있다. 말도 많이 하게 되었지만 말도 재미있게들 한다. 말하는 속도는 또 얼마나 빨라졌는지 정신 차리고 듣지 않으면 반 정도는 놓친다. 논술 세대에 속해서 그런지 요즘 젊은층은 누구나 마이크를 잡고 한바탕 말재능을 발휘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 같다. 물론 말에는 인터넷 채팅, 싸이, 블로그 등 넘쳐나는 말·텍스트들도 포함시켜야 할 것이다. 조금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나는 우리나라의 영어 바람도, 말에 대한 우리의 시대적 정열과 궤를 같이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런가 하면 휴대전화와 문자 메시지에 대한 우리의 각별한 애착 또한 간과할 수 없다. 말로 인한 웃음을 웃음 중 최고로 치고, 웃을 기회, 은근히 미소를 지을 기회를 엿보고 있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확실히 흥미진진한 시대적 변화가 아닐 수 없다. 물론 말 홍수의 시대란 그만큼 말로 인한 그늘이 만만치 않은 시대이기도 하다. 말이 사회적이 되다 보니 매끄럽되 스며듬이 없다. 그런가 하면 말이란 하면 할수록 늘기에 꼭 필요한 말보다 췌언이 늘어나는 시대이기도 하다. 하루를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문장은 몇 개 되지 않는다. 그 나머지 말이 모두 췌언은 아니겠지만 우리의 의중을 왜곡시키는 무수한 문화적인 훼방꾼들로 인해 우리는 할 말을 위해 그 몇 배가 되는 불필요한 말들을 덧붙일 수밖에 없는 상황에 자주 처한다. 때로는 신경쓰지 않고 발설하는 말로 하루가 지나갈 때도 있다. 몇십 년 만의 추위라는 어느 겨울 날 단 십여 분을 같이 걷게 된 어떤 사람은 지루하게도 무려 57번이나 “어이 춥다”를 반복했다. 잘 모르는 사이였기에 어색해서 그랬겠지만 그 덕분에 나는 그해 겨울 단 한 번도 “춥다”는 말을 하지 않기로 결심하고 그 겨울을 버텼다. 물론 “춥다”는 말을 대신할 무수한 다른 표현을 만들어내는 수사학적인 변주를 즐겼고, 그러다 보니 어느새 추위도 지나가버렸다. 현란미의 극치에서 단순미를 흠모하듯…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 말과 그 위상이 격상된 것을 즐기고 또 반가워하면서도 나는 지나가버린 말의 이상적인 시대, 혹은 아직 오지 않은 새로운 말의 시대를 그리워한다. 글쎄, ‘태초의 말씀’ 이후, 바벨탑 사건 이후 현재까지 실제 모든 문명의 거의 전 시대에 걸쳐 말은 시대적으로 갱신해야 할 어떤 것으로 다루어졌으니 나만의 새삼스러운 그리움이 아닐지도 모른다. 현란함의 극치에서 다양함을 압도하는 단순미를 흠모하듯, 보석상에 진열된 보석 가공품들 사이에서 원석의 본질적 신비에 시선을 뺏기듯 나는 시대를 역행하는, 그보다는 시대를 뛰어넘는 어떤 말을 그리워한다. 생각해보면 사람은 참 간사하다. 젊은 문학도 시절 국어의 어법에 스며 있는 경건주의와 경직된 문법주의를 억압적으로 느꼈기에 나는 그 반대의 것을 무작정 선호했다. 이제 옛 바람은 현실이 되고도 넘쳐, 우리 말의 관습은 유연하며 가볍고 장식적이며 감각적이고 자유롭게 되었다. 욕망은 늘 변덕스럽기에 이제는 이루어진 토양 저 너머의 것을 그리워한다. 적어도 자라나는 아이들의 시대의 말은, 다소 느려도 좋으니 머리나 목 언저리에서가 아니라 심장 너머 저 존재 깊은 곳에서 울려나오기를, 그들의 말이 단지 현재를 복사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만들어내는 것이 되었으면 한다. 시대착오적이라고? 모든 좋은 말, 좋은 문학은 늘 시대를 앞섰으니 그 자체가 시대착오적 아니었던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