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고통에 목숨 걸 만큼 동의하지 않고는 들을 수 없었던 얘기… 우리가 진정으로 상기해야 할 것은 6·25가 아니라 학살 사건들
▣ 정기용 건축가
올해 6·25는 월드컵 열기에 묻혀 잊혀진 듯싶다. 언제부터인가 6·25는 형식적으로 다뤄지고, 이제는 더 이상 집단적으로 상기해야 할 일이 아닌 채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의구심도 든다. 나같이 6·25 직후에 초등학교를 다닌 사람들에게는 말이다.
당시 교사들은 6·25만 되면 천진난만한 초등학교 아이들은 물론 중·고등학교 청소년들에게 6·25와 관련한 포스터를 그리게 했고, 결과물들을 가지고 학교 연중행사치고는 크게 다룬 기억이 난다. “상기하자 6·25” “무찌르자 오랑캐” “북진통일”이라는 표어 아래 도깨비 같은 괴뢰군이 탱크에 깔린 모습, 처연한 폭격 장면에 줄지은 피난민, 늠름하고 씩씩한 국군 장병들이 돌진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세뇌교육이란 북이나 남이나 똑같았던 시절이 아니었나 싶다.
머리가 없었던 시아버지의 주검 이 세상의 모든 어린이는 평화로운 세계인으로 태어나지만, 국가는 이들을 적개심 품은 국민으로 만들어가던 그 시절의 이야기는 참으로 씁쓸하다. 더욱이 매년 조금씩 사료들이 공개되면서 6·25 전쟁의 진실들이 하나둘씩 밝혀지고, 많은 민간인들의 노력으로 노근리 사건 같은 어처구니없는 미군에 의한 피난민 학살 사건의 전모가 드러나고 있다. 뿐만 아니라 6·25 이전에 일어난 제주도 4·3 사건이 몰고 온 학살 이야기며, 남북을 통틀어 6·25 전쟁 중에 학살된 민중이 얼마나 되는지 아직까지 아무도 모른다는 사실 등은 우리 세대가 진지하게 짚고 넘어가야 하지 않을까. 이보다 중요한 역사 바로 세우기가 어디 있겠는가!
우리가 진정으로 상기해야 할 것은 6·25가 아니라 학살 사건들이다. 학살의 전통은 광주 5·18에까지 이어지며, 해방 뒤 지금까지 이 땅에 이유도 모른 채 목숨을 잃은 사람들이 수백만 명이 될 터인데 그 잘못을 내가 했노라고 나서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 죽은 자는 넘쳐나는데 살인한 사람은 없다. 모두가 “아, 그때는 혼란한 전쟁 시기였으니까” 하고 넘어간다. 그러나 나는 돌아가신 이모님의 이야기를 듣고 난 뒤부터는 학살의 이야기를 쉽게 듣고 넘어갈 수 없다. 내가 정말로 이모님의 고통에 목숨을 내놓을 만큼 동의하지 않고는 들을 수 없었던 얘기, 그 가혹한 개인의 역사를 알고부터는 말이다.
이모님은 6·25 때 남편과 딸과 시아버지를 잃었다. 남편은 청주교도소에서 인민군에 부역했다는 죄로 목숨을 잃었고, 시아버지는 아들이 부역했다는 이유로 어느 날 충청북도 학산면 노루목에서 끌려가 인근 산기슭에서 총살당했다. 이모님은 시아버지가 끌려가던 긴박한 순간을 말씀하실 때 눈에 눈물이 고이셨다. 군인들이 시아버지를 잡으러 들어와 소란을 피울 때 이모님은 뒤꼍으로 가 양잿물을 들이켜고 당신도 세상을 떠나려 했다고 한다. 그 순간 이 광경을 본 큰딸이 양잿물 사발을 내리쳤다. 그때 군인들이 시아버지를 찾아 끌고 나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오는가 싶더니 딸이 쏜살같이 달려가 할아버지 옷깃을 잡고 나뒹굴었다. 평소에 잘 따르던 할아버지가 끌려가는 모습을 바라만 보고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딸도 같이 트럭에 실려버렸고, 똑같이 총살당하고 만 것이다.
이모님은 주검을 수습하러 사람들이 알려준 총살 현장을 찾았다. 아비규환의 현장에서 시아버지와 딸의 주검을 찾고 또 찾았다. 이루 형언할 수 없는 시체 더미를 들추고 또 들추며 찾았으나 둘 다 못 찾고 말았다. 망연자실해 있다가 딸을 찾는 일을 포기하고 시아버지의 주검을 찾기 위해 주검들의 옷소매를 뒤지기 시작했다. 소매 끝 솔기를 마무리하는 방식을 다른 사람과 달리했던 것이 생각난 것이다. 결국 시아버지인 듯한 주검을 찾아냈으나 머리가 없었다. 머리를 찾기 위해 주변을 샅샅이 찾았으나 허사였다. 온전한 주검을 수습하지 못한 채 장례를 치렀다. 그날 밤 꿈에 시아버지가 나타나 “아가야 수고했다. 그런데 숨을 쉴 수가 없구나” 하는 말에 벌떡 일어나 생각해보니, 머리 없이 장례를 치른 탓이라는 자책감이 들어 다음날 다시 총살 현장을 찾아갔다. 혹시 찾으면 싸올 보자기를 들고서. 그러나 역시 못 찾고 말았다. 그래도 그냥 돌아올 수는 없는 일. 한참을 고민하다 주검을 수습했던 근처에서 흙을 모아 머리 크기만큼 만들어 보자기에 싸가지고 와 다시 관을 열고 머리 부분을 흙으로 완성해 두 번째 장례를 치렀다. 그날 밤 꿈에도 어김없이 시아버지가 나타나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제야 조금 숨을 쉴 수 있구나. 아가야 정말 수고했다…”고. 그 뒤 시아버지는 더 이상 이모님의 꿈에 등장하지 않았다.
경건한 죽음을 학살해 버린 사회
학살이 아무리 집단적으로 이루어져도 죽음은 개별적이고, 개인 역사의 종말을 의미한다. 이모님의 이야기는 시아버지와 딸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이며, 동시에 이모님 삶의 역사이기도 하다. 평생을 잊을 수 없는, 누구에게도 하소연하고 책임을 따져물을 수 없는 이 땅의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속에 응고된 비극의 씨앗들이다. 이 비극적인 역사의 진실을 밝히는 일들을 접고 어떻게 역사가 올바로 세워지기를 바라는가 묻지 않을 수 없다. 비단 6·25 전쟁만이 아니라 제주도 4·3 사건, 광주 5·18 항쟁에서 일어난 학살의 진실들은 100년 뒤에라도 밝혀 허공에 넘쳐나는 원혼들을 달래야 한다. 형식적으로가 아니라 고통에 연대하는 진지한 마음가짐으로 말이다.
나는 역사학자는 아니지만 한국 근대사의 모든 잘못들, 부정부패, 지역감정 그리고 부를 축적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천민자본주의의 경제동물화, 이 모든 것의 근원에는 청산되지 않은 학살의 후유증이 있다고 말하고 싶다. 한 사람을 죽이면 살인이라고 말하지만, 1만 명이 죽으면 전쟁이라고 말하며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이 잘못은 이 땅에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죽음은 본래 삶의 중요한 한 부분이었으나 한국의 근대사는 이 경건한 죽음을 학살해버린 것이나 다름없다. 죽음을 삶에서 분리한 뒤 남는 것은 ‘사는 것’만이 중요하다는 착각이며, 이에 온 국민이 빠져들었다. 이것이 이 땅의 가장 큰 불행이다. 생에서 가장 중요한 죽음을 죽인 사회에서는 무엇이든지 가능하다. 가족끼리 오순도순 살던 집을 때려부수는 것을 재건축의 이름으로 경축하는 일도 가능하고, 이웃에 임대아파트가 들어오는 것을 백주에 저지하는 것도 가능하다.
가끔 이 나라에 사는 것에 회의를 느끼는 사람들이 있다면 나는 그들에게 말하고 싶다. 그래도 오늘 우리는 살아 있지 않느냐고. 오늘은 어제 죽은 자가 그토록 살고 싶어하던 그 내일이 아니냐고 말이다.
머리가 없었던 시아버지의 주검 이 세상의 모든 어린이는 평화로운 세계인으로 태어나지만, 국가는 이들을 적개심 품은 국민으로 만들어가던 그 시절의 이야기는 참으로 씁쓸하다. 더욱이 매년 조금씩 사료들이 공개되면서 6·25 전쟁의 진실들이 하나둘씩 밝혀지고, 많은 민간인들의 노력으로 노근리 사건 같은 어처구니없는 미군에 의한 피난민 학살 사건의 전모가 드러나고 있다. 뿐만 아니라 6·25 이전에 일어난 제주도 4·3 사건이 몰고 온 학살 이야기며, 남북을 통틀어 6·25 전쟁 중에 학살된 민중이 얼마나 되는지 아직까지 아무도 모른다는 사실 등은 우리 세대가 진지하게 짚고 넘어가야 하지 않을까. 이보다 중요한 역사 바로 세우기가 어디 있겠는가!
한국 근대사에서 은폐된 민간인 집단 학살은 죽음이 지닌 경건함마저 학살했다. 삶의 일부인 죽음은 삶과 분리되고 비극은 계속된다. 대전시 산내 학살 현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