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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바캉스는 평등으로의 탈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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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7-07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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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가철마다 지옥 같은 전쟁 치르면서도 산과 바다로 달려가는 한국인… 일터를 벗어나 위계가 사라진 현장을 만끽하려는 인정 투쟁의 이벤트

▣ 강준만 전북대 교수·신문방송학

“별이 쏟아지는 해변으로 가요/ 해변으로 가요/ 젊음이 넘치는 해변으로 가요/ 해변으로 가요/ 달콤한 사랑을 속삭여줘요.”

1970년에 발표된 키보이스의 <해변으로 가요>는 70년대의 젊은이들에게 해변으로 가지 않으면 큰일날 것 같은 느낌을 갖게 했다.

대한민국에서 바캉스는 전쟁이다. ‘나 홀로’가 줄 수 없는 군중 속 자기확인이자 대중투쟁이다. 콩나물 시루처럼 좁은 백사장에 수십만 명이 몰려드는 해운대 해수욕장은 바뀔 것 같지 않은 바캉스의 상징물이다.(사진/ 연합 오수희 기자)


푹푹 찌는 도시의 거리를 걷다가도 어느 전파상에서 이 노래가 흘러나오면 더 이상 도시를 지키기가 어려웠다.

왜 바캉스는 전쟁이 되었는가

지난해 국내 가요 중 여름을 대표하는 ‘최고의 여름노래’로 선정된 건 쿨의 <해변의 여인>이었다고 한다. 아니 나훈아의 <해변의 여인>이 리메이크된 건가? 1972년에 나온 이 노래도 70년대의 애창곡이었는데 말이다.

“물 위에 떠 있는 황혼의 종이배/ 말없이 바라보는 해변의 여인아/ 바람에 휘날리는 머리카락 사이로/ 황혼빛에 물들은 여인의 눈동자/ 조용히 들려오는 조개들의 옛이야기/ 말없이 거니는 해변의 여인아.”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전혀 다른 노래였다. 쿨의 <해변의 여인>엔 70년대의 은근함이나 내숭이 없었다.

“아우 여름이다/ 이게 뭐야 이 여름에 방안에만 처박혀 있어/ 안 되겠어 우리 그냥 이쯤에서 헤어져버려/ 내 품에서 흘린 눈물 너만큼 나 힘이 들었어/ 잃어버린 너의 미소 찾을 수 없을까/ 안녕 하고 돌아서는 그건 아니잖아/ 사랑을 위한 여행을 하자/ 바닷가로 빨리 떠나자 야이 야이 야이 야이 바다로.”

이 노래엔 해변에서 건수 올려보려는 요행 심리가 없는 것처럼 보였는데, 막판에 가니 “어디 갔어 이 밤중에 도대체 난 이해가 안 돼/ 여기까지 여행 와서 나만 혼자 내버려두니/ 해변에서 만난 여인 많은 얘길 들려주었지/ 잃어버린 사랑으로 여기에 왔다고” 운운하지 않는가. 아무래도 바캉스에서의 건수 잡기는 세대를 초월한 법칙이 아닌가 싶다.

이제 월드컵에 이어 불어닥칠 열풍은 바캉스 열풍이다. 시의성에 목숨 거는 미디어는 바캉스 노래들을 틀어젖히면서 또 한 번 범국민적 쏠림을 유도하는 데 앞장설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매년 그래왔듯이 치열한 바캉스 전쟁을 또 치를 것이다. 바캉스 가요는 사랑과 낭만을 노래하지만, 저널리즘은 늘 사건으로서의 바캉스에 주목하면서 ‘전쟁’은 물론 ‘지옥’이라는 표현까지 써왔다.

“언제부턴가 휴식이 아니라 1년에 한 번 치러야 하는 전쟁처럼 다가오는 바캉스.” “너도나도 일단 떠나고 보자는 악착스러움이 마치 죽기 아니면 살기의 전쟁을 방불케 한다.”“바캉스 지옥은 우리 자신의 책임이다.” “바캉스 지옥을 없애고 건전한 휴가 문화 정착을 위해 몇 가지 제언을 하고자 한다.”

인터넷을 때려보라. 지난 수십 년간 7~8월의 신문엔 기업들의 바캉스 마케팅에 호응하는 기사들도 많지만, 목욕탕을 방불케 하는 해변의 인파, 주차장으로 변한 도로, 쓰레기로 뒤덮인 해변과 계곡, 바가지 요금 시비, 바캉스 비용을 마련하기 위한 범죄 등으로 흘러넘친다.

왜 우리의 바캉스는 전쟁이 되었는가? 누구도 이런 질문을 던질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모두가 당연하게 여기는 어떤 답을 예비해두고 있기 때문이다. 땅은 좁고 인구는 많은 나라에서, 사계절에 무더운 여름을 갖고 있는 나라에서, 삼면이 바다이고 산이 많은 나라에서, 당연한 거 아냐?

바캉스는 평등하다. 여의도 63빌딩에서 하얀 와이셔츠를 입고 일하든 그 안에서 청소를 하든 윤중로 벚꽃 축제에선 같은 공간에 있는 똑같은 존재라는 만족감을 던져준다. (사진/ 한겨레 강창광 기자)

그러나 아무래도 그 정도론 부족한 것 같다. 뭔가 또 다른 이유가 있지 않을까? 우선 ‘바캉스’라는 용어 자체가 수상하다. 불어 바캉스(vacance)는 영어 버케이션(vacation)에 해당하는 말로서, 단순히 ‘휴가’라는 뜻이지만, 한국에선 좀 다른 의미가 되었다. <뜻도 모르고 자주 쓰는 우리말 사전>은 “프랑스 사람들, 그중에서도 특히 파리 사람들이 휴가를 극성스럽고 떠들썩하게 떠나고 즐기는 통에 바캉스라고 하면 이름난 휴양지나 해수욕장에서 그럴듯하게 즐기고 오는 것을 가리키게 되었다”며 “이 영향 때문인지 우리나라에서도 바캉스라고 하면 어딘가 그럴듯한 산이나 바다에 다녀와야 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고 했다.

놀면 불안해지는 병?

영어가 국어처럼 돼버린 나라에서 영어 단어는 ‘있어 보이는’ 느낌을 주지 못하며 불어가 훨씬 더 고급스러운 느낌을 준다. 그 고급스러움은 낯설다는 희소성, 그로 인해 극대화되는 환상과 일탈에 대한 기대감으로 연결된다.

아닌 게 아니라 바캉스 시즌만 되면 신문에 등장하는 사설·칼럼 등엔 환상과 일탈에 대한 경계와 더 나은 일상으로의 복귀를 위한 재충전의 가치를 역설하는 훈계가 난무한다. 거의 모범답안이 정해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안 제시도 빠지지 않는다. 고정 메뉴는 바캉스를 무슨 유행이나 과시의 기회로 생각하지 말고 휴식과 재충전 기회로 보아야 한다는 인식 전환, 관공서와 기업 등에서의 휴가 실시 분산, ‘전쟁’과 ‘지옥’을 벗어날 수 있는 다양한 휴가지 개발 등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건 이런 대안은 수십 년 묵은 대안이며 일부 실행에 옮겨졌음에도 바캉스 전쟁은 계속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우리가 바캉스 전쟁의 정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걸 말해준다.

좀더 파고들자면, 학계부터 ‘여가사회학’을 대접하지 않았다. 최근 주 5일 근무제가 실시되면서 여가사회학의 가치가 인정받기 시작했지만, 그간 여가문화를 진지한 학술적 연구의 대상으로 삼아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한국의 대표적 여가사회학자라 할 부산대 교수 김문겸은 1996년에 출간한 <현대사회와 여가>에서 1985년에 나온 크리스 로젝의 <자본주의와 여가이론>을 1987년에 번역해 출간하고자 했지만 출판사를 찾을 수 없어 좌절을 맛보아야 했다고 털어놓았다. 이념이 난무했던 당시 상황에서 출판사들은 ‘여가 이론’을 한가하다고 보았을 것이다. 그때에도 대중은 이념보다는 여가를 위한 삶의 투쟁을 하고 있었는데 말이다.

최근 방송·강연 활동을 통해 ‘여가문화 전도사’로 활약하고 있는 명지대 사회교육대학원 여가경영학과 교수 김정운은 주 5일 근무제라는 외형적 변화에 상응하는 자율적 개인의 철학이 자리잡기에는 아직 많은 문제가 남아 있다며, 무엇보다도 ‘놀면 불안해지는 병’에 집단적으로 걸려 있다는 걸 지적했다.

아닌 게 아니라 개발독재를 거치면서 일중독증에 걸린 사람들이 많은 나라인지라 ‘놀면 불안해지는 병’에 걸린 사람들이 많다는 건 분명하다. 그런데 이 ‘병’과 바캉스 전쟁은 어떤 관계일까? 고속도로상에서 필사적으로 춤을 추는 관광버스 ‘원로그룹’의 놀자판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김정운은 “좌절과 고통의 밑바닥에서 우리 부모님들은 ‘잘 살아보세.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세’라는 그 단순한 구호에 가슴이 저려오는 흥분으로 새벽마다 뛰어나갔다”고 했지만,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늙어지면 못 노나니”로 대변되는 놀자판이 개발독재 시절에도 호황을 누렸다는 것 또한 분명한 사실이다. 즉, 한국 현대사에서 왜곡된 면은 있었을망정 놀자판이 중단된 적은 없었다고 보아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카를 마르크스는 “자기 나름대로 처리할 자유시간이 없는 사람, 즉 식사·수면 등의 단순한 육체적 욕구 충족을 위해 드는 시간 이외의 전 시간이 자본가를 위해 노동으로 흡수되어버리는 사람은 짐 나르는 짐승보다 못하다”고 했다. 이 말에 어떤 답이 숨어 있을 것 같다.

1930년대 영국 노동자들의 여가문화는 마르크스의 진술을 입증해주었다. 그들의 여가는 휴식이나 재충전을 위한 게 아니었다. 오로지 ‘탈출’이었다. 일상과 구조로부터의 탈출이었다. 인간다움을 만끽하기 위한 해방이었다.

한신대 민주사회정책연구원 연구교수 박선권은 <현대적 여가의 상태>(2006)에서 30년대 영국 노동자들에게 “휴가는 가정에 기억할 만한 사건들과 진정한 것들을 가지고 돌아올 수 있는 서사적인 탈출을 의미했다”며 “여가에서 개성의 정수를 추구해야 한다는 중간계급 개혁가들의 설교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들은 노동시간에 만나는 군중을 피하기는커녕 동시에 휴가를 얻어 군중 속으로 갔다. 중요한 것은 공장에서 말없이 기계 앞에서 일을 하며 출퇴근을 반복하던 바로 그 대중이 휴가지에서 극적으로 변화하곤 했다는 것이다”고 했다.

목적이 그러했던 만큼 소모와 낭비는 필수였다. 박선권은 “노동자들에게 있어서 진정한 휴가란 돈에 대한 생각을 잊고 부자처럼 행동할 기회였다”며 “물론 이러한 것은 줄곧 엘리트들의 비난을 받았지만, 그것은 현실의 결핍으로부터의 진정한 탈출을 상징했다”고 분석했다.

“질러도 된다, 아니 질러야만 한다”

그거야 30년대의 영국 이야기 아닌가. 아니다. 지금도 유효하다. 노동자들의 조건이 달라지지 않았는데 ‘탈출’의 가치가 사라질 리 없다. 1970년 프랑스의 사회학자 장 보드리야르는 <소비의 사회>에서 “여가에서는 모든 사람이 다시 평등하다”는 신화를 이야기하기 위해 이런 우화를 소개했다.

“함께 잠수 물고기잡이를 하고 사모스(아페리티프의 일종)를 같이 마신 후 그들 사이에는 깊은 우정이 생겼다. 돌아오는 배에서 두 사람은 서로의 이름밖에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주소를 교환했을 때 같은 공장에서 근무하는 기술부장과 야간경비원이라는 사실을 알고서 너무 놀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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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오늘날엔 빈부 양극화가 휴가지의 선정에서도 그대로 나타나기 때문에 위와 같은 우화는 설득력이 좀 떨어지지만, ‘평등 욕망’은 여전히 건재하다. 바캉스는 평등으로의 탈출이다. 그래서 평소에는 감히 넘보지 못했던 것들을 바캉스 때엔 ‘질러도’ 된다. 아니 질러야만 한다. 바캉스는 자신이 모든 위계로부터 자유로운 자율적 존재라는 자기확인의 기회이기 때문에 어떤 비용을 지불하고서라도 만끽해야만 할 그 무엇이다.

한국은 세계 최고 수준의 고(高)스트레스 국가이기에 바캉스의 의미는 처절할 수밖에 없다. 사람이 몰리지 않는 조용한 곳에 가서 사색하고 재충전하라고? 그건 바캉스의 목적에 위배되는 주장이다. 오히려 가능한 한 많은 사람이 몰리는 곳으로 가야 바캉스의 의미가 산다. 사람과 차량에 치이고 불편과 피곤에 시달리지 않는다면, 그건 바캉스가 아니다.

1985년에 발표된 조용필의 <여행을 떠나요>는 떠나지 말고 가능한 한 모여야 하는 당시 운동권 진영의 미움을 샀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우리의 바캉스는 떠나도 홀로 떠나진 않는다. 바캉스는 우르르 몰려다녀야 제 맛이 난다. 여러 여행 전문가들이 하는 말이, 외국에서 한국 사람 찾아내는 건 쉽다고 한다. 여러 사람이 몰려서 움직이는 건 십중팔구 한국인이라나. 우리는 같이 지지고 볶고 사는 게 좋다는 말을 자주 한다. 평소 과밀에서 얻은 학습효과일 수도 있지만, 바캉스는 구조와 위계가 사라진 새로운 환경에서 지지고 볶는다는 점에서 새로운 느낌을 준다.

그러나 우리는 동시에 각개약진과 개인플레이에 익숙한 사람들이 아니냐는 반론이 있을 법하다. 그건 이렇게 보면 된다. 우리는 공적 영역에선 ‘분열’을, 사적 영역에선 ‘단결’을 선호한다. ‘공적 불신, 사적 신뢰’와도 통하는 현상이다. 공적 영역의 분열도 따지고 보면, 계파나 연고 중심의 사적 단결이 너무 강하기 때문이다.

바캉스 과소비는 바캉스가 결혼식과 장례식과 같은 반열에 올라섰다는 걸 말해준다. ‘결혼식 과소비’나 ‘장례식 과소비’는 모순어법이다. 평소의 근검절약은 그때 한번 제대로 써보자고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결혼식과 장례식은 우리의 삶에서 가장 거대한 자기확인·인정투쟁 이벤트다. 그래도 이때엔 들어오는 수입이나 있지만, 바캉스엔 그것도 없다는 점에서 바캉스가 훨씬 더 순수한 자기확인·인정투쟁 이벤트인 셈이다.

지난 97년 여고생들이 바캉스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무더기로 술집 접대부로 취업한 게 ‘사건’으로 부각된 적이 있다. 그때 한 여고 1년생은 경찰에서 “평소 용돈이 20만원인데 선텐을 하고 피서지에서 입을 유명 메이커의 옷을 마련하려면 적어도 100만원이 필요하다”면서 “유흥업소에 나가려는 학생이 10여 명이 넘는 학급도 있다는 말을 들었다”고 말했다. 이 말에 혀를 끌끌 찬 사람들이 많았겠지만, 그 소녀는 한국형 바캉스의 본질을 지나칠 정도로 정확히 이해했다는 점에서 문제였던 건지도 모를 일이었다.

꼭 휴가지에서 책을 읽어야 할까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이 글을 바캉스에 대한 냉소로 본다면 섭섭하다. 오히려 휴가지에서 책을 읽는 게 어떻겠느냐는 고상한 제안이야말로 냉소일 게다. 평소에도 읽지 않던 책을 왜 1년에 한 번 오는 일상 탈출의 소중한 기회에 읽어야 한단 말인가? 가치 평가는 잠시 유예하고, 있는 그대로의 바캉스의 모습을 보자는 뜻이었다. 조만간 미디어는 거대한 ‘해운대 목욕탕’의 모습을 또 보여줄 게 틀림없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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