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생’의 미화
등록 : 2001-02-20 00:00 수정 :
일본에서 열린 어떤 국제학술회의에 갔을 때 그 사건이 터졌다. 한 한국인 유학생이 일본인을 구하려다가 목숨을 잃은 사건 말이다. 순간적으로 가슴이 아팠다. 얼굴도 모르는 생면부지의 한 사람을 도우려 했던 젊은이, 또 그를 도와 실족한 사람을 구하려 했던 또 한명의 일본인의 죽음 앞에서 갑자기 숙연해졌다. 극한의 상황에서 자신의 생명을 무릅쓰고 낯선 타인을 돕는다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평상시에 정의와 이웃사랑을 얘기하는 사람도 순간적으로 그렇게 몸을 던지기는 어렵다. 이타적인 생각이 몸과 마음에 내면화돼 있는 사람만이 어떤 계기가 주어졌을 때 조건반사적으로 그런 행동을 할 수 있다. 피해자 나라 출신인 그 청년이 가해자였던 나라의 주민을 도왔다는 점에서 이 사건은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민족과 국적과 관계없이 한 ‘인간’을 도우려 했다는 점에서 우리는 여기서 사람간의 보편적 연대 가능성에 대한 희망을 읽는다. 의인들의 명복을 빌고 싶다.
‘공동체’ 혹은 ‘이타적 헌신성’의 포장
지난 신문기사를 뒤적이면서 이런 생각을 해본다. 그의 희생의 의미는 무엇일까? ‘한·일관계의 승화’라는 대의 앞에서 그의 가족과 그를 사랑했던 사람은 과연 무엇을 느낄까? 어떤 추모비와 어떤 재단의 설립이 그의 고귀한 생명을 대체할 것인가? 눈에 보이지 않는 추상적이고 거룩한 명분으로 그의 ‘희생’을 찬양하면서 우리가 빠져들 수 있는 위험은 없는가?
우리는 남을 위한 헌신과 기여를 높이 평가하고 고무한다. ‘남’은 때로는 ‘조국’, ‘국가’, ‘민족’, ‘가족’, ‘학교’, ‘회사’, ‘마을’, ‘조직’의 이름으로 나타난다. 한국사회는 타인을 위해 한 개인이 겪는 ‘고통’과 ‘희생’의 정당성을 이미 미리(?) 전제하고 가르친다. 곳곳에서 우리는 개인 혹은 소수의 ‘희생’을 얼마나 찬양하고 숭배하는가?(물론 그런 주장을 힘주어 요구하는 사람일수록 스스로 희생을 감수하는 것을 보기는 힘들다). 그 과정에서 개인은 집단적 가치의 실현과정의 도구로 전락하고 다시 희생에 대한 요구는 더욱 정당화된다. 동시에 ‘생명’의 절대적 존엄성은 치명적으로 훼손된다. 얼마 전 만난 한 운동가는 어떤 폭격장에 목숨을 걸고 뛰어들어간 몇몇 평화운동가를 향해서 박수를 보내는 군중에 전율을 느꼈다고 고백했다.
그분들의 치열한 싸움 정신에 대해 경의를 표한다. 어떤 상황에서도 생명을 스스로 포기하는 시도에 찬성할 수는 없지만 개인의 희생과 헌신은, 그것이 자발적이라면, 존중돼야 마땅하다. 그러나 옆에서 그것을 목도하는 사람들이 그 개인의 희생에 대해서 박수치고 찬양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개인의 희생, 특히 죽음에 과연 어떤 사회적 의미 부여가 가능할까? 그것은 그저 한 고귀한 생명의 안타까운 사라짐일 뿐이다. ‘희생’ 미화야말로 개인을 죽이는 집단적 이타주의의 망령을 계속 살려두는 일이다. 바로 그러한 추상적인 망령 때문에 계속해서 ‘순교자’가 생산되는 것이다.
‘희생’을 찬양할수록 수많은 개인은 자신에 대한 권리 침해와 자기부정을 추구하게 되고 개성적 자아실현에 죄책감을 갖게 되는 문화는 번성한다. 이타적 가치의 실현에 관심을 갖지 않는 사람은 ‘이기적’ ‘서구적’ ‘무책임’ ‘얌체’ 등의 언어로 매도된다(항상 남을 위해서 살라는 요구를 받는 여성이 오히려 이런 누명을 대체로 뒤집어쓰는 것은 참 역설적이다). 거기서 번성하는 것은 개인의 절대적 존엄성과 자기 존중을 교묘하게 침해하는 문화다. 물론 그건 ‘집단’ 같은 무시무시한 이름이 아니라 ‘공동체’ 혹은 ‘우리’ 혹은 ‘이타적 헌신성’의 이름으로 포장되게 마련이다. 이러한 문제 의식을 갖기 어려운 것은 ‘희생’과 ‘헌신’을 감내한 사람이나 그 가족의 입장에서 그러한 엄청난 고통에서 어떤 추상적인 의의를 찾지 않으면 자신 삶의 존재기반이 완전히 무너져 버리기 때문이다. 가령 제대 군인에게 ‘국가안보’의 허구성을 전달하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가? 군대 갔다와야 ‘사람’된다고 얘기하지 않는가.
이제는 솔직한 주장을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 남을 위해 헌신하고 희생하라? 자신의 삶을 존중하고 행복을 추구하고 자아실현을 맘껏 하라고 가르치면 안 되는가? 그 대신 다른 사람의 똑같은 권리를 인정하고 그것을 방해하는 세력과는 당당하게 싸우라고 가르쳐야 하지 않는가? 이타적인 희생과 헌신을 신비화하는 이데올로기 교육이 가져온 것은 오히려 지독한 이기주의적 쟁투의 문화다. 영웅적인 ‘희생’ 찬양을 통해서 희생을 낳는 사회의 문제는 또다시 은폐되고 사람들은 자신들의 개인적 욕망을 숨기는 위선적인 문화에 젖어들게 된다. 제발 남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살라고 이제는 솔직히 주장해야 하지 않을까? 단, 남에게는 ‘인간에 대한 예의’를 지켜가면서.
권혁범/ 대전대 교수·당대비평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