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전긍긍 붙잡고 있던 것들을 놓아버리는 건 흥미진진한 실험… 하루 세 번, 한 번에 3분씩 하늘을 보는 연습을 해보시라
▣ 최윤. 소설가·서강대학교 프랑스문화학과 교수
오랜만에 서울을 떠나 멀리 와 있다. 세 번째로 맞는 안식년을 나는 평소 나의 환경이나 취향과 되도록이면 무관한 곳에서 보내기로 작정했다. 6년을 일하고 7년째에 맞는 이 안식년이 일생에 몇 번 돌아오지 않는 귀중한 선물임에도, 나는 첫 번째, 두 번째 안식년을 너무 부산하게 부실하게 보내버렸다. 그렇지 않아도 일중독의 경향이 있는 나는 안식년 때마다 지난 6년간 미루어두었던 일을 몰아서 처리하겠노라는 계획을 세웠고 늘 그렇듯이 계획한 것의 반도 이루지 못한 채 떠날 때보다 더 무거운 돌덩이를 머리에 이고, 어깨가 축 처진 채 나 없는 동안 먼지만 쌓인 집으로, 연구실로 되돌아오곤 했던 것이다.
안식은 절대적 필요이자 권리
창세기에 기록된 이후 기독교 문화에서 시작된 이 안식년 제도는 언제부터인가 모든 문화권에 점차로 도입되어 현대사회 일의 개념에 자연스럽게 포함되어가고 있다.
나는 이런 현상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음은 물론 모든 일의 현장에서 안식년 제도나 그에 상응하는 제도가 어떤 방식으로든지 확산되고 정착하기를 바라 마지않음을 주변에 피력해왔다. 그럼에도 내가 그 의미에 대해 그다지 깊이 숙고해보지도, 삶에서 실천해보고자 마음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다는 것을 뒤늦게 절감한다. 그 이름도 좋은 안식년을, 빚진 일을 탕감받기는커녕, 오히려 좀더 바쁘게 일 빚을 늘리는 한 해 정도로 생각하고 자신을 혹사하는 데 보내버려 뒤늦게 안타까워지는 것이다. 무엇에 그리 비효과적으로 열심이었던지 지금 생각해도 수상하기 그지없다. 그것이 조바심이나 욕심 내지는 흑심, 혹은 조금만 내면을 뒤져보아도 실마리가 잡히는 불안의 다른 모습은 아니었는지 의심해볼 만하다.
두 번의 시행착오를 겪은 뒤에 이제야 마치 난생처음으로 안식년을 맞은 것처럼 나는 이 예외적인 시간의 질량을 가늠하고 있다. 안식의 어의를 따라 편안히 몸과 마음을 쉬면서 주변이 제공하는 모든 것을 다가오는 그대로 사랑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번에는 정말 ‘안식’하자는 굳은 의지에도 불구하고 첫 달은 매일 아침 나의 안이한 ‘안식’을 비난하는 목소리들과 싸워야 했다. 너는 쉴 자격이 있는가? 이 놀라운 경쟁 사회에서 안식이라니. 네가 뭐 그리 잘났다고! 그러나 많은 사람에게 안식은 여유가 아니라 절대적 필요이자 권리인 경우가 많다.
안식년이라고 일상의 자리를 떠나는 왔는데, 일의 관성은 무서운 것이어서 나는 아침 일찍 일어나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하루의 쓸 분량, 하루의 읽을 분량을 촘촘히 나누어진 시간의 저울에 올려놓고 팔을 걷어붙이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늘 시간에 쫓기며 글을 쓰던 습관이고 보니, 갑자기 하루 스물네 시간이 온전히 내 앞에 펼쳐져 있다는 ‘황홀감’에 도저히 적응을 하지 못해서 머리가 멍해지고, 글도 잘 써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건 좋은 징조이기도 하다. 안식년의 시작은 바로 내 일상을 지배하는 이 일련의 관성들을 멈추는 것으로 시작되고 마침내 멈춤에 나 자신을 길들이는 데 한 해의 3분의 1이 지나가버리고 말았다.
멈춤이 어려운 것은, 각자가 자신의 존재 의미를 움직임이나 행위에서 찾으려 하고 그것을 멈추면 자신이 부인 내지는 소멸된다고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한마디로 우리 모두가 이기적인 겁쟁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를 정의하던 모든 것, 나를 나로 있게 한 모든 것을 멈추어본다는 것, 행여 빠져나갈까 전전긍긍 붙잡고 있던 것들을 한 번쯤 부인해본다는 것은 얼마나 흥미진진한 실험인가. 채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 내가 할 수 있는 대부분의 일들, 나만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한 대부분의 기능은 다른 사람으로 대체되어도 문제가 없는 것들임을 알게 된다. 끊임없이 경영되어야 지속되는 관계와 침묵과 부재에 더 강해지는 관계도, 삶에 본질적인 것과 비본질적인 것의 경계도 여지없이 구분된다. 광란의 세상 리듬에 휩쓸려 돌아갈 때보다, 멈춘 자리에서 나 없이도 잘 돌아가는 크고 작은 세상의 움직임이 더 미세하게 감지되고 전체의 모습 속에 확연히 드러난다. 이래저래 멈춤은 사람을 참 겸손하게 만들기도 한다.
하루의 경영이 확실히 달라진다
작은 기업체를 경영하고 있는 친구에게 이런 멈춤의 미덕에 대해 얘기했더니, 그는 단번에 이렇게 답해왔다. 멈추어야 할 사람은 안 멈추고 회사에 꼭 필요한 사람은 멈추겠다고 한단다. 내가 말하는 멈춤을 친구는 조기 퇴임 정도로 이해했던 것 같다. 어떻건 한편으로는 맞는 얘기다. 멈추어서서 호흡을 골라야 할 사람들, 수리하고 재건축에 들어가야 할 많은 사람들이 우리 사회의 각계각층에 산재해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멈추었다 다시 가는 길은 왜 그토록 어려운지. 휴년 뒤의 산이 다시 살아나듯, 한 해 경작을 멈출 때 망가진 땅이 되살아나듯, 잠시의 멈춤이 의지적일 때 그 속에는 새로운 것이 들어찬다는 것을 이성적으로는 잘 알고 있어도 실천하는 사람이 이토록 적으니 말이다. 그래서 멈춤을 의무화하는 안식의 제도가 필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사실 멈춤은 평소에 조금씩 연습해두는 것도 좋다고 한다. 그러기 위해서 하던 일을 놔두고 꼭 당장 멀리 떠날 필요도 없고, 그 기간이 길지 않아도 괜찮다. 일례로 아주 소박한 작은 것으로 시작해볼 수도 있다. 하루에 세 번, 한 번에 3분씩만 하늘을 쳐다보시라. 일과 생각을 멈추고 멍하니. 이건 내가 오래전부터 틈틈이 해오던 것이라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데, 그러면 하루의 경영이 확실히 달라진다. 그렇게 멈추어 바라볼 때만은 한반도 하늘의 모든 어두운 구름이 깨끗이 걷혀 있기를!
창세기에 기록된 이후 기독교 문화에서 시작된 이 안식년 제도는 언제부터인가 모든 문화권에 점차로 도입되어 현대사회 일의 개념에 자연스럽게 포함되어가고 있다.
광란의 세상 리듬에 휩쓸릴 때보다 멈춰서 세상을 바라볼 때 더 미세한 움직임을 감지 할 수 있다. 지금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라. (사진/ 한겨레 이종근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