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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나는 왜 건축으로 전향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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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6-13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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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이들이 던진 인터뷰 질문에 자문의 웅덩이에 빠지다…사회주의자 윌리엄 모리스의 생과 유년의 한옥이 답이런가

▣ 정기용 건축가

오늘은 몇 주 전부터 인터뷰를 요청하던 국민대 건축과 졸업생들이 찾아왔다. ‘건축가와의 대화’라는 주제로 어디서 숙제를 받았나 보다. 학생들이 마련한 열댓 가지 질문에 답하는 형식인데, 웬일인지 참 하기가 싫었다. 학생들의 질문은 늘 비슷비슷하고 녹음기로 재생하듯 비슷한 답을 해야 하는 내 처지도 곤혹스럽고, 또 학생들에게 과잉 친절을 베푼답시고 성의를 다하려는 듯한 마음가짐도 거짓 같고, 하여튼 무언가 찜찜한데 건장한 두 청년이 카메라를 들고 들어왔다.

미술에 재능이 없어서… 건축은 공공적이라서…


그리고 곧이어 첫 번째 질문. (내 늘 그러리라 짐작했지만) 미술대학을 나오셨는데 어떤 계기로 건축 세계에 입문하게 되었는지 궁금하다는 것이 아닌가?

어릴때 살던 한옥을 성인이 되어서도 종이 위에 복원시킬 수 있다는 사실은 집과 사람은 결코 분리될 수 없고, 공간의 기억은 몸에 깊이 새겨진다는 걸 가르쳐준다.

전공을 왜 바꾸게 되었는지를 물어올 때마다 써먹는 대답이 있다. 간단히 넘겨버리고 싶을 때는 “미술에 재능이 없어서”라고 둘러댄다. 조금 시간이 있으면 각박했던 군사독재 시절 미술이 어떻게 세상을 구원할 수 있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던 이야기를 들려준다. 매일 열린 한일회담 반대 데모로 교정에 군대가 주둔할 때 갈 곳 없어진 우리가 학교 주변을 맴돌면서 탈출구를 찾아 갈등했던 상황들도 얘기해준다. 더 깊이 있는 답을 하고 싶을 때는 “미술은 개인이나 미술관이 작품을 독점하지만 건축은 여러 사람이 나누어 쓸 수 있는 여지가 훨씬 많기 때문”에 건축으로 전향했음을 은근히 자랑스럽게 얘기하기도 했다.

지금은 건축이 미술보다 더 분배적이고 공공적이라고 감히 말하기는 어렵지만 그 당시 나에게는 어느 정도 진실이기도 했다. 특히 화려한 도판으로 만든 현대 건축책에 실린 한스 샤룬의 베를린 음악당의 실내 모습은 환상적으로 다가왔다. 마을 사람들이 여기저기 동네 한 귀퉁이에 모여 있듯이 함께 하나의 음악을 같이 듣는 풍경은 정말 감동적이었다. 나도 이런 일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런 꿈을 꾸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오늘은 이런저런 대답이 잘 나오지 않고 겉으로는 무엇인가 대답을 하고 있었지만 정작 머리에선 ‘정말로 어찌하다 내가 건축을 하게 되었는가’ ‘건축가로 태어나기 위해 학교 수업을 받으면서 도대체 내가 진정으로 이 학생들처럼 기성 건축가에게 묻고 싶었던 질문이 무엇이었는가’라는 생각들이 꼬리를 물고 스치는 것이 아닌가? 그러는 동안 학생들은 돌아갔고 결국 나는 마치 주술에 걸린 사람처럼 나에게 몇 가지 질문다운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고 있었다.

하나는 결정적으로 건축에 입문하게 한 책에 관한 이야기이고, 하나는 내가 어린 시절 살던 한옥에 대한 이야기다. 두 이야기는 결국 하나로 귀결되는데, 비교적 세상 바라보기를 아웃사이더같이 하게 된 어린 시절의 체험이 고리가 된다.

나는 유년기를 큰집에서 사촌들과 지냈다. 아버님은 6·25 전쟁이 나고 8월 어느 날 의용군들에게 끌려가셔서 지금까지 돌아오시지 않고 있다. 내 나이 다섯 살 때 즈음이다. 그 이후 대학 입학 때까지 백부 밑에서 엄한 교육을 받고 15년간 사촌들과 함께 성장했다. 그런데 어쩌다 단체기합으로 종아리를 맞을 때마다 나는 열외로 매를 면했다. 나중에 어른들에게서 들은 이야기지만 나는 나의 아버님과 너무 닮아서 차마 백부님이 때리실 수 없었다고 한다. 그 시절 나는 세상을 살면서 관찰하고 들여다보는 습관이 생겼다. 늘 여럿이 함께 있지만 동시에 여럿으로부터 빠져나와 세밀하게 살피는 버릇이 생긴 것 같다. 학교 수업 시간에도 그냥 보통 학생들처럼 재잘거리며 그 속에 빠지면 되는데 늘 “왜” 그런가 반문하고, “또 다른 방법은 없는가” 자문했던 것 같다. 심지어는 ‘미술교육과 한일회담은 무슨 관계인가’라고 어처구니없는 질문을 하게 됐고, 이때 영국의 건축가이자 사회주의자인 윌리엄 모리스의 일생을 다룬 책을 만나게 됐다. 책의 서문에 윌리엄 모리스가 평생을 세 가지 가치를 위해서 살았다는 구절이 나온다. 첫째는 노동에 만족하고, 둘째는 부의 분배에 이바지하고, 셋째는 환경의 질을 높이는 데 평생을 바쳤다는 문장은 당시 나의 뇌리를 쳤다. 아, 얼마나 근사한 삶인가! 노동에 만족할 뿐만이 아니라 세상의 부를 나누는 데 이바지하고 환경의 질까지 높이는 것이 건축이라면 이 얼마나 근사한 직업인가.

그렇게 해서 건축계에 입문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일은 그렇게 순조롭게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을 것이다. 더욱이 나는 건축 수업을 프랑스에서 했다. 돈도 빽도 없던 시절, 프랑스어 공부만 열심히 하면 프랑스 정부 초청 장학생이 된다는 말에 미친 듯이 프랑스어 공부를 하고 운 좋게 합격해 프랑스에서 건축 공부를 하게 되었다. 나는 그곳에서 현대 서양건축을 배우고 있었지만 한국 건축에 대해 무지한 것을 늘 한쪽에 콤플렉스로 가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내가 살았던 큰집, 서울의 도시형 한옥을 생각나는 대로 그려보기로 작정했다. 만일 제대로만 그릴 수 있다면 그렇게 해서라도 한국의 건축에 한 발짝 다가설 수 있다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프랑스에서 그린 툇마루와 아궁이

자화자찬 같지만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치수가 다소 불완전한 것을 빼고 거의 전부 잘 맞아떨어져 나 스스로도 놀랐다. 아버님이 나가시고 돌아오시지 않은 대문간, 신혼부부가 살림을 차리던 대문간의 문간방, 댓돌 밑으로 연속된 타일들, 거지들이 주로 밥상을 차려먹던 건넌방 툇마루, 툇마루 밑의 아궁이, 대청마루, 여름 장마 소리 요란할 때 홑이불을 덮고 온 가족이 잠자던 대청마루, 대청마루 가운데의 이상한 옹이, 그리고 안방, 안방의 다락, 다락 속의 향로, 제사상, 자동차놀이를 하던 벽장, 늘 질척한 부엌, 그리고 부엌방, 뒤곁의 목욕통, 마당의 수돗가, 그리고 귀뚜라미 울던 지하실, 여름이면 지하실에 둥둥 떠다니던 빈 장독들, 지하실 위의 장독대, 그리고 잊을 수 없는 기와지붕. 6·25 때 마당에 즐비하던 시체와 환자들.

이렇게 어린 시절 내가 살던 공간들은 내 머릿속에 깊이 각인돼 나를 쫓아다니고 있음을 알았다. 그것은 어떤 사진보다 정교하게, 집과 내가 일체가 되어 분리될 수 없는 실존의 모습으로 생생하게 살아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그것은 단순히 기억력의 문제가 아니며 내가 그 속에서 깊이 살았음을 인식시켜주는 것이기도 했다.

놀라운 이야기지만, 우리의 삶은 이미 어린 시절에 대체로 예정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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