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밀려오는 월드컵 광란, 놀이하는 인간을 둘러싼 이론과 현실의 괴리… 스트레스 해소 덕분에 화병으로 죽는 숫자가 준다면 누가 광란을 두려워하랴
▣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리영희의 <대화>엔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가 하나 나온다. 아니 모든 사람들에게 다 재미있지는 않겠지만, 나는 유사한 경험이 있어 아주 재미있게 읽은 대목이다.
리영희는 이집트 관광에서 돌아와서 어느 잡지의 요청으로 이집트 유물의 건조물에서 상당히 많은 양과 높은 질의 ‘호모루덴스’(놀이하는 인간) 요소를 보았다고 썼다. 그랬더니 어떤 젊은 사람이 다음호에 “리영희 교수가 이집트 유물들을 보고 나서 이야기한 내용은 반계급적인 잘못된 견해이다”라는 반론을 썼다고 한다. 사회에 나가 헷가닥 돌지 않으려면… 이에 대해 리영희는 “나는 고대의 중노동이 ‘주로’ 노예들의 부담이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부인한 것은 아니지”라면서 “다만 마르크스적 계통과 진보적 사상을 가졌다는 사람들의 일반적 견해가 모든 인간적·사회적 현상을 ‘계급적인 관점’에서 이분법적으로 단정하려는 고정관념은 곤란하다는 얘기를 한 것뿐이야”라고 말했다.
“이런 경험과 견문들을 통해서 나는 우리의 지나간 역사적 사실과 현상들의 해석에서도, 기성의 이데올로기화된 이론이나 학설 또는 ‘자민족을 미화하는 편향’에 대해서는 좀더 자유롭고 융통성 있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게 됐어. 계급주의 이론으로 모든 사회현상을 재단하려는 자세는 자칫 ‘지적 현실도피’가 아니면 ‘이념의 화석화’ 또는 교조주의가 되지 않을까요?”
지금은 찾아보기 힘들지만 1990년대 초까지도 그런 학생들이 꽤 있었다. 이제 갓 배운 ‘계급주의 이론’이 너무 신기했던지 모든 걸 그걸로 재단하려는 과잉 열의를 드러내곤 했다. 지식인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 같다. 시종일관 ‘계급주의 이론’을 고수하는 지식인들에겐 경외감을 갖기도 하지만, 한때의 유행에 휩쓸려 그걸 전투적으로 내세우다가 세상 바뀌니까 이젠 정반대편에 서서 또 다른 전투성을 보이는 지식인들을 볼 때엔 씁쓸해진다.
혹 우리 대학 풍토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닐까? 대학이 이론 중심 교육을 하다 보니 현실 세계에 대해선 잘 말하지 않는다. 그런 건 저널리즘의 몫이라는 식이다. 바깥세상의 실제 작동 방식을 거의 알지 못한 채 대학에서 좌파 물을 먹고 사회에 나간 학생들은 대부분 순식간에 헷가닥 바뀐다. 자신이 대학에서 가졌던 생각들의 현실 적합성이 전혀 없으며, 그렇게 살다간 자신만 죽게 돼 있다는 걸 곧 알게 되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예방주사’를 미리 놔줄 필요가 있지 않을까? 정치와 기업이 실제론 어떻게 움직이며, 세상의 어떤 부분이 얼마나 추악한가 하는 걸 미리 알려주자는 것이다. 세상과 적정 수준에서 타협하는 방식까지 알려준다면 더욱 좋겠다. 그래야 사회에 나가더라도 헷가닥 돌지 않을 수 있을 게다.
이론과 현실, 이론과 실천의 괴리는 인류 역사 이래로 많은 이들을 괴롭혀온 주제이지만, 그 괴리를 좁혀보려는 시도는 좀처럼 환영받지 못한다. 선명성이 떨어져 사람의 관심을 끄는 ‘상품성’이 약한 탓이다. ‘나의 이론’은 독창성을 내세울 수 있고 오랜 수명을 자랑할 수 있지만, 현실과의 괴리를 좁히려는 일은 당대에 국한되는 ‘소모품’이 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론과 현실 사이의 괴리가 큰 주제로 ‘놀이하는 인간’을 빼놓을 수 없다. 아니 이게 가장 큰 괴리를 갖고 있는 주제일 것이다. 그 주제 중의 하나로 스포츠, 특히 국제 스포츠를 정면 대응해보자. 지금 한국 사회엔 서서히 ‘월드컵 광란’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죄책감 때문에 할 수 없었던 말
요한 호이징하는 1938년에 출간한 <호모 루덴스>에서 놀이는 문화의 한 요소가 아니라 문화 그 자체가 놀이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놀이’ 하면 한국이다. 세계 으뜸이라고 해도 좋다. 조흥윤은 <한국문화론>에서 한국 민중문화의 두 가지 특성으로 놀이와 신들림을 들면서 한국 민중은 다른 나라와 비교해 훨씬 다양하고도 독특한 놀이문화를 가꾸어왔다고 했다. 그는 민중의 놀이는 일 속의 놀이, 여가 속의 놀이, 신앙 속의 놀이라는 세 가지 양상으로 전개돼왔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국 민중의 놀이는 이렇듯 일과 대비되거나 구분되는 개념으로서의 놀이가 아니다. 그것은 일과 여가와 신앙 속에서 그것들과 함께 얽히고 어우러져 즐겨지던 삶의 표현이다. 한국 민중은 놀이를 그렇게 삶의 율동으로서 익히고 생리로 가다듬어왔다. 그것을 일러 민중의 호흡이라 하여도 좋을 것이다.”
그런 ‘민중의 호흡’은 인터넷 시대를 맞아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한국을 가리켜 ‘인터넷 강국’이라고 하는데, ‘놀이’에서만 강국일 뿐이다.
이에 대해 말이 많지만, 인터넷만 보더라도 한국인이 노는 데 목숨 거는 민족이라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데 지식인은 대체적으로 보아 노는 데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이다. 물론 잘 노는 지식인들도 많지만, 그런 지식인들은 자기 주장을 내놓는 데 비교적 게으르다. 사회를 향해 왕성하게 발언하는 지식인들의 주된 놀이는 책읽기와 글쓰기다. 이들은 아무래도 ‘몸’보다는 ‘정신·이성 우월주의’에 기울기 마련이다. 몸을 쓰면서 노는 것에 미쳐 돌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이해심이 약하거나 그 노는 행위를 자기 방식으로 해석하기 쉽다.
일제 치하와 군사독재 시절을 기록한 역사서들은 대부분 ‘노는 이야기’를 배제했다. 그런 책엔 압박·분노·비애만이 가득하다. 정의·대의·명분·인권·양심·윤리·민족 담론 일색이다. 그 시절의 보통 사람들은 놀지 않고 살았을까? 기존 역사서들은 그 점에 전혀 관심없었다.
지난 99년에 나온 김진송의 <현대성의 형성: 서울에 딴스홀을 허(許)하라>가 화제를 모았던 것도 바로 그런 현실과 무관치 않았다. 이 책의 제목은 월간 <삼천리> 1937년 1월호에 실린 ‘서울에 댄스홀을 허(許)하라-경무국장에게 보내는 아등(我等)의 서(書)’라는 공개 탄원서에서 가져온 것이다. ‘딴스홀’을 허가하지 않는 조선총독부에 8명의 조선 대중문화인들이 “일본 내지의 동경, 신호, 횡빈 등지를 돌아보거나 상해, 남경, 북경으로 돌아보거나 가까이 대련, 봉천, 신경을 돌아보거나 거기에는 모두 댄스홀이 있어 건전한 오락이 성하고 있는 것을 보고 우리들은 부럽기를 마지 아니합니다”라고 호소한 내용이다.
유신 시절을 다룬 책들을 읽으면 당시의 세계가 암흑 같았다는 느낌을 준다. 대중문화와 스포츠는 대중의 판단력을 마비시키기 위한 독약처럼 묘사돼 있다. 그런데 과연 그랬나? 유신이 선포된 다음해인 73년에 대학생이 되었던 나의 경험에 비추어보면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그간 감히 그 말을 공개적으로 할 수 없었다. 당시의 수많은 전태일들과 ‘운동권 학생들’에 대한 죄책감 때문이었다. 나처럼 의식 없는 대학생들은 ‘고고 미팅’이다 뭐다 해서 놀기 바빴을 때 그들은 저임에 혹사당하거나 이 나라의 민주주의를 염려하고 있었으니 어찌 훗날에라도 “그 시절이 그렇게 나빴던 것만은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으랴. 죽은 자에 대한 예의 때문에라도 그렇겐 말 못한다.
한풀이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그 무엇!
지금 그 시절이 의외로 좋았다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니다. 한국 현대사의 상처 때문에 ‘놀이’에 대한 정당한 평가가 이루어지기 어려웠던 사정을 이야기하려는 것이다. 이미 이 지면에 소개한 바 있지만, 신윤동욱은 “금메달의 감동은 정권의 ‘조작’으로 시작됐는지 모르지만, 이제 자발적 복종, 아니 자발적 열광으로 ‘승화’됐다”고 했다.
그런데 과연 금메달의 감동은 정권의 ‘조작’으로 시작됐을까? 감동을 정치적 자산으로 이용하기 위해 투자한 걸 ‘조작’이라고 할 수 있을까? 독재정권들이 투자와 더불어 그 감동을 이용하기 위해 열심히 부채질을 하긴 했지만, 그런 부채질이 없었다 하더라도 대중은 감동하게 돼 있었다. 그건 마치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손기정의 마라톤 우승에 감동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국제 스포츠에서 한국 선수의 승리에 대중이 열광한 건 한풀이의 성격이 강했다. 그건 일종의 ‘존재 증명’이었다. 그러나 한풀이만으론 설명할 수 없는 무엇인가가 있었으니 그게 바로 한국인들 특유의 ‘놀자판’이었다. ‘놀자판’은 세월이 흐를수록 그 비중이 커졌고, 그게 대폭발을 일으킨 게 바로 2002년 6월의 이른바 ‘월드컵 신드롬’이었다.
월드컵 신드롬에 대해 “파시즘적 광기” “현실을 망각한 집단적 히스테리 증상” “뉘른베르크의 나치대회를 연상케 하는 획일화된 전체주의적 태도” “거대자본에 포획된 상품형식의 논리” “지독한 획일주의, 집단주의” 등과 같은 비판도 쏟아졌지만, 긍정적인 평가가 주류를 이뤘다.
부정적 평가는 소수파였고 긍정적 평가엔 그야말로 ‘오버’하는 게 많았다는 점에서 부정적 평가는 존중할 만한 가치가 있지만, 한국 특유의 ‘놀자판’ 문화에 대한 이해와 공감이 결여된 한계를 드러냈다고 볼 수 있다. ‘독재정권’ 대신 ‘거대자본’이 그 ‘놀자판’을 증폭시킨 점은 있지만, 오늘날 거대자본(거대 언론사)에 의해 증폭되는 건 지식인의 학술 담론도 마찬가지라는 점을 감안할 필요가 있겠다.
월드컵 신드롬을 위시한 한국인 특유의 스포츠 애국주의에 부정적 측면이 없다는 게 아니다. 지금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건 참여자와 분석자의 ‘심각성’의 정도가 크게 다르다는 점이다. 좋은 건수 생겼을 때에 그냥 한번 미친 듯이 놀아보는 거다. 그 놀자판에 뛰어들지 않은 사람의 시선으로 미친 듯이 노는 모습을 곱게 보기는 어렵다. 그건 마치 술을 전혀 마시지 않는 사람이 2차, 3차까지 끌려다니다가 막판에 모두 해롱대는 모습을 지켜봐야 하는 것처럼 고역일 수 있다.
스포츠 애국주의에서 곧잘 나타나는 ‘쏠림’이 문제가 된다면, 그건 영원히 바뀌지 않을 한국인의 속성으로 이해하는 게 옳을 것이다. 좁은 국토, 높은 인구밀도, 인구의 사회문화적 동질성, 과잉 도시화, 초강력 중앙집권 구조 등은 다른 나라에선 볼 수 없는 한국만의 유별난 조건이다. 그 조건에서 쏠림이 안 일어난다면 오히려 그게 더 이상한 일일 게다.
쏠림이 심하다고 아무리 비판해봐야 그건 바뀌지 않는다. 서양에는 없는 현상인데, 서양에서 일어났던 다른 유사 현상, 예컨대 크게는 ‘파시즘’, 작게는 ‘뉘른베르크의 나치대회’ 등과 연계시키는 건 어설픈 보편주의의 폭력일 수 있다.
한국인은 ‘놀이하는 인간’의 전형이다. 과잉 전형이다. 인터넷·휴대전화 문화가 놀자판 일색인 것도 우연이 아니다. 각종 게임에 미쳐 돌아가는 걸 보라. 노래방을 보라. 찜질방을 보라. 러브호텔을 보라. 근엄한 세미나 끝난 뒤에 벌어지는 뒤풀이 현장을 보라.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는 한국인의 절대 좌우명이다. 늙었다고 못 놀거나 안 노는 게 아니다. 노인들의 관광버스 행락을 보라. 달리는 고속도로에서 미친 듯이 노래하고 춤추는 모습을 보라.
남의 놀이를 비난하는 것도 놀이다
진짜 정색을 하고 볼 것은 정치다. 그것 역시 놀이다. 혹자는 ‘쌩쑈’라고도 한다. 정치 수준은 국민 수준이다. 이렇게 말하면 화낼 사람 많을 테니, ‘수준’을 ‘모습’으로 바꾸자. 정치 모습은 국민 모습이다. 위선과 기만으로 점철된 ‘쌩쑈’를 연출하는 건 정치권이 아니다. 정치인은 배우일 뿐 배후 연출은 국민이다. 정치는 화내면서 즐기는 게임이다. ‘쌩쑈’ 놀이 즐기면서도 갈 길은 간다. 큰 걸음은 내디디면서 딴전 피운다. 한국이 세계에서 가장 빠른 경제발전과 민주화를 동시에 이룬 건 분명한 사실 아닌가.
미디어는 이미 월드컵 광란을 드러내고 있다. 근엄한 시선으로 보자면, 제2의 ‘뉘른베르크의 나치대회’를 획책하는 음모 같다. 그러나 그냥 놀자판 정서로 보면 “그래 애쓴다” 하고 너그러운 마음을 갖게 된다. 놀자판 이용해 권력 챙기고 돈 챙기는 이들을 괘씸하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원래 놀자판에선 꼭 그렇게 자기 실속 챙기는 이들이 있기 마련이다.
이해하자. 조긍호에 따르면, 서구인들은 분노를 일상생활에서 10번 느낀다면, 한국인은 50번을 느낀다고 한다. 한국의 40대 남성 사망률도 세계 최고다. 한국은 세계 최고의 스트레스형 사회 구조를 갖고 있는 나라다. 월드컵 광란을 통해 스트레스 해소하는 덕분에 화병으로 죽는 사람들의 수가 준다면, 누가 월드컵 광란을 두려워하랴
이런 말을 하는 나는 월드컵 광란을 즐기는 사람인가? 그렇진 않다. 한국인이 ‘놀이하는 인간’의 과잉 전형이라고 해서 모든 한국인이 똑같다는 의미는 아니다. 각기 다른 개성과 취향대로 각기 다른 해석을 내놓는 것도 ‘놀이’다. 내 놀이가 소중하면 남의 놀이도 소중하게 생각하는 게 바람직하겠지만, 남의 놀이를 비난하는 것도 놀이다. 각자 기죽지 말고 원없이 놀자.
리영희는 이집트 관광에서 돌아와서 어느 잡지의 요청으로 이집트 유물의 건조물에서 상당히 많은 양과 높은 질의 ‘호모루덴스’(놀이하는 인간) 요소를 보았다고 썼다. 그랬더니 어떤 젊은 사람이 다음호에 “리영희 교수가 이집트 유물들을 보고 나서 이야기한 내용은 반계급적인 잘못된 견해이다”라는 반론을 썼다고 한다. 사회에 나가 헷가닥 돌지 않으려면… 이에 대해 리영희는 “나는 고대의 중노동이 ‘주로’ 노예들의 부담이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부인한 것은 아니지”라면서 “다만 마르크스적 계통과 진보적 사상을 가졌다는 사람들의 일반적 견해가 모든 인간적·사회적 현상을 ‘계급적인 관점’에서 이분법적으로 단정하려는 고정관념은 곤란하다는 얘기를 한 것뿐이야”라고 말했다.

대한민국을 광란의 놀이터로 몬 월드컵 앞에서 당신은 원없이 놀 것인가, 아니면 스포츠 애국주의의 시선으로 근엄하게 바라볼 것인가. 2002년 서울 신촌교차로에서 한국 축구팀의 8강 진출에 환호하는 사람들.(사진/ 한겨레 김정효 기자)

한국인은 놀이하는 인간의 전형이다. 2002년 대전 엑스포 과학공원에서 스타크래프 프로게이머들이 벌이는 e-스포츠를 관람하는 마니아들(왼쪽)과 김홍도의 <씨름>에 나오는 조선시대 씨름을 즐기는 민중(오른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