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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가면 속의 토론’은 정녕 위험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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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1-02-13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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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자유게시판의 ‘자유’는 어디까지… 인터넷 익명보호 원칙의 딜레마

사진/안티조선운동의 거리시위. 이들 단체들의 인터넷 자유게시판이 딜레마에 빠져있다.(김정효 기자)
올 들어 자살사이트의 자유게시판을 통해 만난 남녀가 동반자살한 사건이 일어나고, 폭탄제조법이 각 사이트의 자유게시판을 통해 유포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자유게시판’은 인터넷을 죽음의 바다로 몰고 가는 원흉처럼 여겨지고 있다. 게다가 자유게시판의 익명성을 악용한 명예훼손이 잦아지면서 자유게시판은 사이버 공간의 규제와 검열에 알리바이가 되고 있는 형편이다.

한국만의 독특한 인터넷 문화?

인터넷의 여러 공간 중에서도 자유게시판은 익명성이 가장 폭넓게 활용되는 장이다. 개인 홈페이지부터 언론사 홈페이지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의 대부분 사이트는 자유게시판을 열어두고 있다. 전문가들은 각 사이트마다 자유게시판을 두는 현상을 “한국만의 독특한 인터넷 문화”라고 이야기한다. 진보넷 장여경 정책실장은 “언로가 독점돼 있고, 표현의 자유가 제약된 현실이 게시판 활성화의 배경”이라며 “누구나 자신의 의견를 다수에게 전할 수 있게 된 최초의 공간”이라고 평가한다. YMCA 열린정보센터 김종남 사무국장은 “PC통신에서 시작된 게시판 문화가 인터넷으로 그대로 옮겨온 것”이라고 해석한다. 외국에서는 공통의 관심사로 묶인 메일링리스트나 뉴스그룹이 우리의 자유게시판 역할을 한다.


익명성에 대한 논란이 커지면서 지난 1월 중순 커뮤니티 사이트인 사이월드는 네티즌을 대상으로 인터넷 실명제 도입에 대한 찬반을 조사했다. ‘찬성’이 36%인 반면, ‘반대’는 12%에 그쳤다. ‘공공기관에만 도입하면 된다’고 대답한 25%까지 합치면 긍정적인 응답은 61%에 이른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의 검열정책에 맞서 표현의 자유를 옹호해온 진보넷과 민주노총 자유게시판의 ‘자유’도 도전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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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에게 격려전화를

무슨 암호 같은 조합이다. 다름 아닌 진보넷(www.jinbo.net) 자유게시판에 올라 있는 ‘100인위’라는 제목의 글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지난해 말 올라온 이 게시물에는 원래 ‘운동사회 내 성폭력 뿌리뽑기 100인위’(이하 100인위)회원 3명의 이름과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다. 100인위는 회원들의 신상을 철저히 비밀에 부쳐오던 터였다. 12월 명단공개 뒤 진보넷 자유게시판을 비난글로 도배하던 사이버마초들(인터넷에서 기승을 부리는 남성우월주의자들) 중 한명이 100인위 활동가들의 이름과 전화번호를 찾아내 공개한 것이다. 진보넷 운영진은 프라이버시 보호를 위해 즉각 이름과 전화번호를 *표 처리했다. 사이버마초들의 비방은 요즘도 계속되고 있다. 지난해 12월21일부터 올 2월8일까지 ‘김선희’라는 이름을 쓰는 사이버마초 한명이 올린 글만 정확히 100건. 사이버마초들은 성폭력 가해자 명단이 공개되면 “꽃뱀들도 실명공개하라”(남성부), 언론사 세무조사 때면 “여성단체도 세무조사 받아라”(김선희)라는 식의 시의적절한(?) 대응을 한다.

‘정보통제’의 참을 수 없는 욕구

사진/진보네트워크센터 참세상 운영자들과 인터넷 게시판.
이들의 영향으로 자유게시판은 제 기능을 잃고 이전투구 양상으로 변했다. 이에 진보넷은 대책마련에 나섰다. ‘비실명 ID’ 도입이 그것이다. 이 제도의 도입 검토 배경에는 100인위 논쟁이 벌어졌던 두 게시판의 대비되는 양상이 놓여 있다. 자유게시판은 인신공격의 장이 된 반면, 비실명이지만 ID를 가진 회원들만 글을 올릴 수 있었던 ‘참세상 게시판’에서는 비교적 진지한 토론이 이뤄졌다. 진보넷쪽은 “ID라는 얕은 문턱도 상당한 성찰적 기능을 한다는 것을 확인한 만큼 진보넷 전체에 ID제도를 도입할 계획”이라면서도 “하지만 표현의 자유를 제약할 수 있는 실명제는 도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비방글을 따로 옮겨두는 ‘쓰레기 게시판’도 마련할 계획이다. 안티조선사이트인 ‘우리모두’(www.urimodu.com)와 여성단체연합 홈페이지(www.women21.or.kr)는 이미 지난해부터 ‘쓰레기 게시판’을 운영하고 있다. 쓰레기 게시판에 대해 피스넷 전응휘 사무처장은 “표현의 자유를 제약하지 않으면서도 게시물에 대한 운영진의 가치판단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평가했다.

익명 보호의 원칙을 고수하는 사이트가 익명 때문에 피해를 보는 아이러니도 있다. ‘우리모두’의 시솝 최기수씨는 올 1월 갑자기 늘어난 게시판 관리일을 감당하기 힘들어졌다. 네티즌들 사이에서 이른바 ‘익명닷컴’(www.anonymizer.com)으로 불리는 사이트를 통해 조직적으로 올려진 듯 보이는 쓰레기 게시물을 하루 500개 이상씩 청소해야했기 때문이다. 원래 익명닷컴은 사생활 보호를 위해 만들어진 사이트다. 이 사이트에 들어가 자기가 글을 올리고 싶은 사이트 주소를 입력하면 그 사이트로 연결되고, 여기에 글을 올리면 이용자의 IP주소가 남지 않아 추적이 불가능하다. 역설적이게도 익명보호 원칙을 고수하고 있는 ‘우리모두’ 사이트가 익명닷컴을 악용한 익명의 사용자들로 인해 피해를 본 것이다. 그래도 최씨를 비롯한 ‘우리모두’ 운영진은 익명보호 원칙을 고수할 생각이다. 인터넷의 익명성이 현실에서 막혔던 언로를 사이버 공간에서 활짝 열어주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검열에 반대하던 단체가 홈페이지의 자유게시판을 운영하면서 검열의 욕구를 느끼는 딜레마에 빠지기도 한다. 진보넷 장여경 실장은 “지금껏 우리가 주장해온 표현의 자유는 언론의 자유에 불과했는지도 모른다”며 “사회단체들이 홈페이지를 운영하며 정보통제의 주체가 됐을 때, 막상 비판을 받으면 정보통제의 욕구를 느낀다”고 전했다. 노동넷 이용근 사무국장에 따르면, 노조들이 자주 IP추적이나 게시물 삭제요구를 해와 “비록 적대적인 의견일지라도 삭제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라고 설득하는 데 진땀을 뺀다고 한다. 일례로, 현대자동차 노조는 지난해 민주노동당 울산북구 후보결정을 둘러싸고 잡음이 불거지자 아예 자유게시판을 폐쇄하고 실명게시판만을 운영하고 있다.

익명성 지켜져야 할 분야 적잖다

사진/민주노총의 대의원대회와 인터넷게시판.(박승화 기자)

이런 현실에도 불구하고 피스넷의 전응휘 사무처장은 “익명성은 인터넷의 발전을 불러온 원인이자 혜택”이라며 익명성을 옹호한다. 익명성 때문에 인터넷에서는 현실의 위계질서에 구애받지 않는 수평적 의사소통이 가능했고, 이런 점이 지금처럼 급속한 인터넷의 확산을 불러왔다는 얘기다. 진보넷 장 실장도 “익명성이 문제의 근원은 아니다”며 “우리 사회의 척박한 토론문화가 자유게시판에 반영된 면이 더 크다”고 지적한다. 더구나 공직자 내부고발처럼 익명성이 지켜져야 할 분야도 아직 적지않다.

합리적인 토론문화의 부재는 민주노총 홈페이지(www.nodong.org) 자유게시판인 ‘열린마당’을 통해서도 드러났다. 지난해 12월22일부터 올 1월23일까지 진행된 선거기간중 열린마당에 올라온 게시물은 총 2천여건. 이중 상당수는 후보들에 대한 비난글이었다. 이에 반해 실명게시판이었던 선관위게시판은 비록 올라온 글의 숫자는 적었지만 비교적 차분한 토론이 이뤄졌다. 이처럼 표현의 자유를 지키면서도 토론을 활성화하기 위한 대안으로 자유게시판과 실명게시판을 모두 운영하는 방법이 떠오르고 있다. 자유게시판의 ‘자유’는 지키면서, 실명게시판을 좀더 책임있는 토론의 장으로 활용하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자유게시판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네티즌들의 자율적인 윤리가 우선”이라고 입을 모은다. 심지어 정보통신윤리위원회 관계자도 “광활한 인터넷에서 규제만으로는 한계가 너무 명확하다”며 “익명성의 폐해를 줄이기 위해 네티켓 교육이 절실하다”고 토로한다. 물론 익명성의 그늘에 숨어 자행하는 사이버 성폭력 등은 처벌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이들의 횡포와 자유게시판의 ‘자유’를 지키려는 네티즌들의 노력은 별개다. 진보넷 장여경 실장은 “일일이 수작업으로 게시물들을 확인해야 하는 어려움이 크지만 표현의 자유를 지키기 위한 이 남루한 실험을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어느새 2천만명을 훌쩍 넘어선 이 나라 네티즌들은 좌충우돌하며 표현의 자유를 몸으로 배우고 있다.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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