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나물이 흔해진 것은 50년 동안 부토 5cm가 쌓였기 때문… 남북한 키 차이가 15cm, 한두 세대로 좁혀지기 어렵겠네
▣ 이윤기 소설가·번역가
“형수님, 이제 냉이는 캐지 않나요? 우리 어릴 적에는 봄나물들이 저렇도록 클 겨를이 없었는데요?”
냉이, 씀바귀, 고들빼기 같은 봄나물이 지천이었다. 보일락 말락 하는, 가녀린 봄나물들이 아니었다. 냉이는 어찌나 씩씩하게 잘 자랐는지 크기가 거의 민들레만 했다. 그래서 40여 년 전부터 우리 고향 마을, 나의 생가에서 살고 있는 고종 형수에게 물어본 것이다. 한식이었던 지난 4월6일 고향 마을에서 있었던 일이다. 고향 마을 옆 선산에 터 잡고 있는 조상 산소에 성묘하러 간 길이었다.
봄나물 보리죽, 그것이 주식이었네 형수가 대답했다. “이제 그런 거 아무도 안 캐어먹지만 그러려고 해도 캐어먹을 사람이 없습니더. 아지뱀(아주버님)이 냉이 좋아하시면 한 박스 캐다가 택배로 부쳐드리지요.” 그렇게까지야. 봄나물 많이 캐어본 내가 잘 알거니와, 아닌 게 아니라 한 시간만 쪼그리고 앉아 오리걸음을 걸어도 한 박스를 거뜬하게 캘 수 있을 것 같았다. 우리 어린 시절에는 그렇게 귀하던 봄나물이 지금은 어찌 이리도 흔한가? 성묘 끝에, 형제들 어울려 술 한잔하는 자리에서도 이런 생각이 내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아무래도 표토(表土)와 밀접한 관계가 있을 것 같았다. 2년 전의 한식날, 선산의 어머니 산소 옆에서 나무 꼬챙이로 지면을 드윽드윽 긁으면서 형님이 하신 말씀이 오래 내 귓가를 맴돌았다.
“보게. 우리 어릴 적에는 솔잎을 하도 긁어서 표토가 하나도 없지 않았는가? 그런데 그 척박하던 청벼랑에 낙엽이 쌓이고 쌓여 표토가 이제 한 5cm 되는군. 표토가 5cm 쌓이는 데 50년 세월이 걸린 것이네.”
그렇다. 표토가 쌓인 덕분에 봄나물이 흔해지기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또 하나의 이유가 있을 것 같다. 내가 유년을 보낸 1950년대, 우리 마을 인구는 100명이 넘었다. 소년소녀도 많았고, 처녀총각도 많았다. 봄철이면 나물 캐는 처녀들이 산과 들을 누비고 다녔다. 하지만 지금은 20명이 채 되지 않는다. 그나마 거의 대부분이 70, 80대다. 50대 후반이 아이 취급을 받을 정도다. 정말로 봄나물을 캐어먹으려고 해도 캐어먹을 사람이 없다.
내가 경험한 가난 이야기, 나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누구에게나 가난한 시절은 있게 마련이어서 그렇다. 하지만 이것이 사회 현상과 관련됐면 좋든 싫든 누군가가 써두어야 한다.
나는 만 11살이 될 때까지 그 마을에서 자랐다. 살림살이에 대한 질문을 받으면 “조반석죽(朝飯夕粥)은 합니다”하고 대답하던 시절이었다. 아침에 밥 먹고 저녁에 죽 먹을 정도는 됩니다, 이런 뜻이다. 하지만 우리는 조반석죽조차 하지 못했다. 믿어지지 않겠지만 봄나물, 산나물이 반(半) 양식이었다. 곡식은 보리뿐이었다. 봄나물이 들어간 보리죽, 그것이 우리의 주식이었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날로 먹을 수 있는 나물, 데쳐서 먹어야 하는 나물, 삶아서 먹어야 하는 나물, 삶은 다음에도 우려서 먹어야 하는 나물을 구별할 줄 안다. 초근목피(草根木皮)에 대한 지식은 생존의 기본이었다. 이런 실력이 없었더라면 나는 살아남을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바로 이런 슬픈 과거 덕분에 나는 유학 시절 외국의 많은 식물학자들 기를 죽인 적도 있다. 요즘도 봄이면 자주 봄나물을 뜯거나 캐어 아내를 귀찮게 한다. 내 몸에 새겨진 슬픈 나이테가 봄이면 거의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봄나물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나는 여느 아이들보다 한 해 늦게 초등학교에 들어갔다. 고향 마을에서 대도시 대구로 떠난 것은 4학년 때다. 바로 전학하지 못하고 한 해를 쉬었다. 대구에서 다시 4학년에 들어가고 보니 동급생들의 나이가 나보다 두세 살씩 적었다. 여느 아이들보다 두세 살이 많은데도 내 키는 큰 축에 들지 못했다. 그렇다. 나는 또 키 이야기를 하고 있다.
“너는 신발에다 거름 넣고 다니냐”
나는 중학교 시절에도 키가 작았다. 당시 우리 학교에서는 신장순으로 번호를 매겼다. 키가 가장 작으면 1번, 가장 크면 60번, 이런 식이었다. 2학년 때의 내 번호는 25번, 3학년 때는 27번이었다. 동급생들보다 나이가 두세 살 많은데도 내 키는 그 모양이었다. 형님들 두 분의 키는 180cm에 육박했는데도 내 키는 그 모양이었다. 동급생들에게 나타나던 성징(性徵)이, 그들보다 두세 살 많은 나에게는 나타나지 않았다. 매우 당황스럽던 시절이었다. 나는 심한 열등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나는 유년 시절의 심하게 부실했던 영양 상태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고등학생이 되고부터는 의도적으로 먹기 시작했다. 그래서인지 17∼18살 즈음의 내 키는 한 해에 근 10cm씩 컸다. 친구들이 나에게 “너는 신발에다 거름을 넣고 다니나” 하고 농담하기도 했다.
한식 지내고 나흘째 되는 10일, 경기도 파주에 새 집을 마련한 딸의 초대를 받았다. 저녁식사는, 출판 단지의 유럽식 마을 ‘헤르만 하우스’에서 북쪽으로 15분 거리에 있는 헤이리의 한 음식점에서 하기로 했다. 헤이리에 가자면 싫어도 통일전망대 아래를 지나야 한다. 야트막한 산들 사이를 지나면 임진강 너머로 북녘 땅의 관산 반도가 이따금씩 보인다. 나는 관산 반도를 잘 알고 있다. 35년 전, 지금의 통일전망대인 오두산 관측소에서 북녘 땅 감시하는 것이 내 일이었다. 만 3개월간 거기에서 근무했다. 북녘 땅에는 나무가 거의 없었다. 한식이 지난 지 나흘이 되었는데도 푸른 기운이 보이지 않았다.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을 구경하면서 그랬듯이, 나는 가족과 함께 저녁을 먹으면서도 딴생각을 했다. 주제 넘은 걱정인 줄 알면서도 북쪽 사람들 먹을거리 생각을 했다.
그로부터 사흘 뒤인 13일, <한겨레> 1면에 실린 상자기사에 뒤집어지는 줄 알았다. “남북한 청년 키 15cm나 차이!” 베이징에서 이상수 특파원이 날린 청천벽력이다. 15cm! 한두 세대로는 좁혀지기 어려운 차이 아닌가.
보라, 형편이 이 지경이다. 내가 야구 시합을 보면서, 딸네 집에 가면서 딴생각 안 하게 생겼는가?
**** ‘이윤기의 종이비행기47’은 이번호로 마칩니다. 그동안 수고해주신 필자와 이 칼럼을 사랑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봄나물 보리죽, 그것이 주식이었네 형수가 대답했다. “이제 그런 거 아무도 안 캐어먹지만 그러려고 해도 캐어먹을 사람이 없습니더. 아지뱀(아주버님)이 냉이 좋아하시면 한 박스 캐다가 택배로 부쳐드리지요.” 그렇게까지야. 봄나물 많이 캐어본 내가 잘 알거니와, 아닌 게 아니라 한 시간만 쪼그리고 앉아 오리걸음을 걸어도 한 박스를 거뜬하게 캘 수 있을 것 같았다. 우리 어린 시절에는 그렇게 귀하던 봄나물이 지금은 어찌 이리도 흔한가? 성묘 끝에, 형제들 어울려 술 한잔하는 자리에서도 이런 생각이 내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아무래도 표토(表土)와 밀접한 관계가 있을 것 같았다. 2년 전의 한식날, 선산의 어머니 산소 옆에서 나무 꼬챙이로 지면을 드윽드윽 긁으면서 형님이 하신 말씀이 오래 내 귓가를 맴돌았다.

옛날에는 조반석죽도 못해 산나물이 반양식이었다. 들에 나물이 남아나지 않았다. 지금 들에는 민들레만 한 냉이를 비롯해 씀바귀, 고들빼기 같은 봄나물이 지천이다. 긁지 않아 쌓이는 표토들이 그것들을 살찌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