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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호형호제의 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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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4-12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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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팀 WBC 4강행의 힘을 “형님·아우”의 유대관계로 해석하는 건 옳은가… 사회적으로 문제되는 연고주의, 그 장점부터 이해하고 들어가야 하는 이유

▣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 사진 이정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서 한국팀이 미국팀과 일본팀을 격파하고 4강에 진출했을 때 언론은 그 원인 분석에 골몰했다. 여러 분석 중 가장 눈길을 끈 건 KPR 미디어본부장 김수인의 ‘형님·아우’론이었다. 말을 조금 바꿔 그 이론을 소개하자면 이런 이야기다.

이종범이 김병현에게 잔심부름 시킨다?


한-일전이 끝난 뒤 박찬호·이승엽·이종범 등 승리의 주역들은 한결같이 “팀워크·단결력·정신력에서 일본 선수들을 압도했기에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고 말했는데, 이는 사실상 선수들 간 관계의 특수성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왜 그것이 비교우위가 될 수 있단 말인가?

‘사이즈’와 ‘밀집도’의 문제다. 한국의 고교 야구팀은 57개에 불과하지만 일본엔 4천 개가 넘는다. 그래서 프로에 입단해도 동문을 만나기가 힘들어 서로 서먹서먹하거나 어렵게 대할 수밖에 없다. 3천 개가 넘는 대학이 대부분 야구팀을 갖고 있는 미국의 경우엔 더 말해 무엇하랴. 반면 한국팀은 야구 시장이 워낙 좁은 탓에 다 알고 지내는 사이다. 고교 동문들로 얽혀 있거니와 출신 학교가 달라도 다 ‘형님·아우’ 하면서 지낼 수밖에 없는 여건과 전통을 갖고 있다.

김수인의 표현을 그대로 옮기자면, “‘메이저리그 100승’에 빛나는 박찬호나 ‘아시아의 홈런왕’ 이승엽 같은 대스타도 막내 전병두가 말도 꺼내기 어려운 선배가 아닌 ‘찬호형’ ‘승엽이형’일 뿐이다. 이종범은 광주일고 후배인 김병현·최희섭 등 메이저리거들에게 ‘병현아’ ‘희섭아’라고 부르며 잔심부름도 시킨다. 야구 동기생인 박찬호와 김종국·김민재·송지만은 어깨를 툭툭 치며 고향 친구보다 더 친하게 지낸다. 이런 살가운 스킨십이 끈끈한 팀워크로 이어져 어느 나라 선수도 따라오지 못할 단결력·정신력의 핵융합을 이뤄내고 있는 것이다.”

WBC에서 한국팀이 일본팀을 이긴 뒤 태극기를 들고 야구장을 돌고 있다. 팀의 맏형으로 불리는 구대성(앞줄 왼쪽)과 이종범(앞줄 오른쪽) 선수가 맨 앞에 서서 태극기를 들고 뛰는 것이 인상적이다.(사진/ 연합 전수영기자)

김수인은 “최근 일어나는 비리나 사건에는 꼭 지연·학연이 얽히고설켜 있어 그 폐해가 상당하지만, 스포츠계에서는 이처럼 엄청난 장점으로 폭발하는 원동력이 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 결론과 유사한 다른 기사들도 나왔다.

그런데 이런 시각에 대해 연세대 영상대학원 교수 윤태진은 반론을 제기했다. 그는 “동문 선후배의 끈끈한 정이 승리의 원동력이라는 신문 보도도 있었다”며 “동계올림픽 쇼트트랙팀을 보도하면서 분열로 인한 경쟁이 승리의 힘이었다고 해석한 조선일보의 어처구니없음이 반복된 것이다”고 비판했다.

“WBC와 거의 비슷한 즈음에 대학 체육학과의 고질적 폭력문화를 기획 보도한 신문사도 스타 야구선수들이 중·고교 시절 ‘맞으면서 훈련했던’ 사실은 지적하지 않는다. 지난해 이맘때 한 배구 감독이 성인 선수들을 구타한 사건도 변변한 반성 없이 어물쩍 넘어간 바 있다. 승리만 한다면 분열도 폭력도 용인될 수 있다는 말인가?”

김수인과 윤태진의 각기 다른 시각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나는 두 시각에 모두 동의한다. 모순인가? 아니다. ‘명암론’(明暗論)이다. 이 세상 모든 일엔 명암이 있다. 누구나 다 아는 이치다. 그런데 의외로 우리는 그걸 현실엔 잘 적용하지 않는다. 그래서 많은 논쟁이 동전의 양면과 같은 명암을 놓고 각기 어느 한쪽만을 보는 평행선을 이루곤 한다.

서로 밀어주고 끌어주는 ‘시너지 효과’

연고주의는 나쁘다. 모두 공개적으론 그렇게 말한다. 그러나 연고주의를 거부하는 실천을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왜 그럴까? 모두 위선과 기만의 천재들이기 때문인가? 아니다. 뭔가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다.

연고주의는 나쁘기만 한 게 아니라 좋은 점도 있다. 여러 사람과 힘을 합해 작은 사업을 시작한다고 가정해보자. 연고 중심으로 뭉친 집단이 그렇지 않은 집단보다 성공할 가능성이 훨씬 높다. 연고엔 상호 신뢰가 있다. 그래서 절차·시간·비용을 줄여준다. 공동운명체의 성격이 강해 결단을 내리는 데에도 유리하다. 개인적 이해득실을 따지지 않는 헌신의 강도도 높아진다.

연고주의가 문제 되는 건 사회적 차원이다. 우리가 정녕 그 차원의 연고주의 극복을 원한다면 일단 연고주의의 장점을 이해하고 들어가야 실천 가능한 프로그램을 기획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곧잘 연고주의를 전면 부정해버림으로써 도저히 실천할 수 없는 프로그램을 내놓고, 그 제안자마저 지키지 않는 일을 자주 저지르고 있다.

‘형님·아우’론도 마찬가지다. ‘호형호제(呼兄呼弟) 인간관계 유대’(이하 호형호제)는 내부적 폭력을 낳을 뿐만 아니라 다른 집단과의 관계에서 극도의 배타성과 편파성을 유발하게 돼 있다. 원형을 놓고 보자면 그건 사적 위계·의리 중심의 조폭식 인간관계다.

그러나 개인적 삶의 경쟁력을 높이는 데엔 그만한 무기가 없다. 서로 밀어주고 끌어주는 ‘시너지 효과’를 창출하기 때문이다. 정(情)이라고 하는 삶의 의미와 보람을 느끼는 데에도 탁월한 효능을 발휘한다.

다시 문제는 사회적 차원이다. 호형호제는 늘 부정부패의 토대가 되었다. 최근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윤상림·김재록 사건은 그 점을 드라마틱하게 웅변해준다. 이들은 처음 만난 사람에게도 금방 ‘형님’ ‘아우’ 하고 부르는 탁월한 붙임성의 소유자들이었다. 호형호제를 처세술의 기본 동력으로 삼아 수백 명의 형님과 아우들을 둔 입지전적 인물이었다. 과도한 나머지 스캔들로 비화되었을 뿐, 한국적 삶의 문법에 가장 충실한 사람들이었다.

<매일경제>는 간부급 직장인들에게 “사람 사귀려고 형님·동생 한 적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던졌다. 다음과 같은 답은 정권 핵심부에서부터 작은 중소기업에 이르기까지 한국 사회에 널리 퍼져 있는 처세의 기본 자세라고 보는 게 옳지 않을까?

“‘형님·동생’으로 부르는 것은 이미 생활화돼 있다.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직함을 부르지만 술자리같이 개인적인 자리에서는 확실히 효과가 크다.” “형님·동생 호칭을 적극 애용하는 편이다. 처음 만난 상대라도 상대방만 괜찮다면 그렇게 부른다. 호칭이 서로 편해지면 업무로 만난 사이라도 좀더 깊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된다. 친밀감도 아울러 높아진다.”

‘호형호제’와 ‘코드’는 과연 다른가

많은 학자들의 연구 결과, 가족주의가 강한 나라일수록 부정부패가 심한 것으로 밝혀졌다. 당연하다. 부정부패를 저지르는 사람들은 자기 혼자 잘살겠다고 그러는 게 아니다. 가족을 위해서다. 우리는 부정부패로 쇠고랑을 찬 사람들을 흉악하게 보지만, 그들은 집에선 헌신적인 가장일 가능성이 높다. 헌신이 지나쳐서 문제일 뿐이다.

호형호제도 가족주의와 비슷하다. 그건 개인적으론 세상을 따뜻하게 사는 방식인 동시에 사회적으론 늘 문제를 낳을 수밖에 없다. “팔이 안으로 굽는다”는 말은 진리의 반열에 올려놓아야 한다. 그건 더 이상 진보할 수 없는 철칙이다.

구세대와는 멀리 떨어진 것 같은 신세대의 문화를 보라. 호형호제만큼은 구세대 뺨칠 정도로 잘 지킨다. 형님들이 아우들 군기 잡는 일에 얼마나 열성인지 대학에선 매년 학기 초에 꼭 몇 건씩 폭력 사고가 터지곤 한다. 남녀평등의 구호를 내걸고 언니들도 그런 일에 뛰어들었다. 그런 호형호제 문화의 부산물이 바로 ‘왕따’ 현상이다.

요즘 신세대 조폭은 인터넷 홈페이지를 활용해 조직원 관리를 한다고 한다. 조직원들끼리 일촌(홈페이지의 모든 내용을 열어볼 수 있는 자격)을 맺고 방명록에 정기적으로 인사글을 남기는 방식으로 결속력을 다진다나. 예컨대, “건강하십니까, 형님? 홈피 한번 보러 왔습니다, 형님” 하는 식으로 말이다.

‘형님, 동생’ 하는 호칭을 적극 애용하는 처세는 한국 사회에 널리 퍼져 있다.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직함을 부르지만 술자리같이 개인적인 자리에서는 ‘호형호제’하며 친목을 다진다.(사진/ 류우종 기자)

사회적으로 출세한 사람들의 인맥 관리 방식도 다를 게 없다. 한때 <조선일보> 사주를 가리켜 ‘밤의 대통령’이라고 부르는 아첨이 그 동네에선 나왔다지만, 한국 사회를 제대로 읽으려면 호형호제로 이뤄지는 ‘밤의 관계’를 탐구해야만 한다. 그럼에도 우리의 사회적 담론은 공식적인 ‘낮의 관계’ 일색이다.

경희대 교수 도정일은 한국 사회엔 ‘끼리끼리 해먹는’ 폐습이 뿌리 깊이 박혀 있다며, ‘친족등용주의’와 ‘패거리주의’를 합해 ‘끼리끼리즘’(kirikirism)이라는 신조어를 선보였다. 그는 “현 정권에 대해 사람들이 ‘코드주의’를 자주 들먹거리는데, 그런 코드주의가 있다 해도 그건 끼리끼리즘과는 성질이 다를 거”라고 했다.

그러나 문제가 그리 간단치 않다. 달리 볼 수도 있다. ‘끼리끼리즘’을 실천하는 방법론이라 할 호형호제의 문제는 조폭보다는 오히려 사회적 공인들에게서 더 심각하게 나타난다. 조폭은 자기들의 호형호제의 정체와 그것이 자신의 생각과 행동에 미치는 영향을 자각하는 반면, 사회적 공인들은 그걸 자각하지 못하고 자각하지도 않으려고 애쓴다. 호형호제의 영향을 받은 의사결정에 대해 온갖 명분을 만들어내는 데엔 모두 천재들이다.

노무현 정권 핵심부의 ‘호형호제’와 ‘코드’를 구분하는 건 사실상 무의미하다. 진정한 호형호제는 원래 같은 코드를 전제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또 코드라는 건 위계질서에 종속되기 때문에 천하의 보수 인사들도 노 정권에 중용되는 한 진보파 코드를 공격적으로 드러내며 실제로 그렇게 활약하는 이들이 많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겠다. 고위 공직자들 간 호형호제 지도를 그려보면 한국 정치가 쉽게 이해된다.

국가주의·민족주의 논쟁을 풍요롭게 하는 일

행여 호형호제 문화에 대해 비관할 필요는 없다. 좁은 곳에서 몰려사는 바람에 생기는 숙명으로 여기면 된다. 동시에 그 덕분에 갖게 된 장점에도 눈을 돌리면 위로가 될 게다. 세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역동성’이라는 축복이 있지 않은가. 벌써부터 우리는 월드컵을 앞두고 화끈하게 한번 뒤집어질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많은 경우 ‘축복’과 ‘저주’가 동전의 양면처럼 분리될 수 없는 것이라는 걸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최근 이런 완강한 풍토에 작은 반란을 시도하는 이들이 등장했다는 건 다행스러운 일이다. 적어도 논의의 확장에 기여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말이다. 이른바 ‘스포츠 애국주의’의 문제다.

신윤동욱은 “금메달의 감동은 정권의 ‘조작’으로 시작됐는지 모르지만, 이제 자발적 복종, 아니 자발적 열광으로 ‘승화’됐다”며 “심심찮게 태릉선수촌 폐지론이 나왔지만, 국민 정서가 거부한다”고 했다. 그는 “솔직히 나도 자유롭지 않다. 선수촌이 없어져서 메달마저 사라진다면, 무엇으로 지루한 일상을 견딘다는 말인가. 감정이 이성을 앞선다”고 토로하면서 ‘대한민국 만세’를 외쳤다.

<딴지일보> 총수 김어준도 가세했다. 그는 한국 야구팀이 미국 야구팀을 격파한 것에 열광하는 사람들을 향해 ‘진보의 교과서’를 펴드는 이들에게 “오버 좀 하고 살자”고 했다.

‘호형호제’하는 사이였던 법조 브로커 윤상림씨와 관련해서 의혹을 산 최광식 경찰청 차장이 결백을 주장하며 계좌 목록을 들어 보이고 있다.(사진/ 한겨레 이정아 기자)

“때론 경기 하나가 인식의 일대 전환을 가져오고 그것이 실제의 물적, 질적 변화를 선도한다. 그러니 이 대목에서 혹여나 촌스런 애국주의에 대한 민망함에 그를 질타하는 분석은 참아달라. 지난 월드컵 애국주의와 파시즘에 대한 근엄한 분석을 접할 땐, 어렵게 만난 멋진 연인과 이제 겨우 연애 좀 시작해보겠다는데 연애 너무 집착하면 자칫 살인 나는 수도 있다는 훈계부터 듣는 기분이었다.”

반갑다. 그래야 ‘스포츠 애국주의’는 물론 민족주의·국가주의에 대한 논의가 양자택일 구도를 벗어나 풍요롭게 이루어질 수 있다. 역설이지만, 일부 지식인들의 민족주의·국가주의 비판이 사회적 의제로 떠오른 건 민족주의·국가주의를 동력으로 삼아 한국의 국력이 신장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민족주의·국가주의 비판이 선진국 지식인들에 의해 주도된 것도 같은 이치다. 국내의 민족주의·국가주의 비판은 한국의 국력 신장을 측정하는 지표가 되고 있다. 그래서 그것에 동의하지 않으면서도 환영하는 여유를 보이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형님’ 이야기를 하면서 너무 멀리 나간 건 아닌가? 아무래도 그런 것 같다. 내가 말하고자 했던 건 호형호제의 정치학은 WBC 4강의 주요 동인을 분석하는 데에만 그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한국 사회에서 이뤄지는 주요 논쟁들은 대부분 닮은꼴이다. 이 논쟁들은 인간에 대한 평가의 문제이기도 하다. 혹 우리는 인간을 과대평가하고 있는 건 아닌가?

‘나홀로 독백’을 하려는 게 아니라면…

진보파와 보편주의파들이 옳은 메시지를 갖고도 자주 민심을 얻지 못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사안에 대한 명암을 제대로 인식하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타도와 극복의 대상으로 삼는 것에도 또 다른 얼굴이 있다는 걸 간파·인정하고 들어갈 때에 좀더 설득력 있는 대안 모색과 더불어 여론투쟁을 전개할 수 있을 것이다. ‘나 홀로 독백’을 하려는 게 아니라면 말이다. 물론 도저히 바뀔 것 같은 전망이 보이지 않을 때엔 ‘나 홀로 독백’도 필요하거니와 아름다운 일이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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