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겨레21 ·
  • 씨네21 ·
  • 이코노미인사이트 ·
  • 하니누리
표지이야기

이규태 선배와 낙지볶음

604
등록 : 2006-04-04 00:00 수정 :

크게 작게

자유언론투쟁 때 나를 은밀하게 불러 말렸지만 속사포처럼 쏘아부쳤는데…“암흑시대가 200년도 넘게 계속되기도 했다”던 그의 말을 다시 곱씹어본다

▣ 김선주

지난 2월 말에 작고한 이규태 선생은 젊은 시절 내 직장 동료이자 선배였다.

그는 내가 입사했을 때 처음으로 나를 김선주라고 이름 석자를 함께 불러준 유일한 선배였다. 당시는 무조건 결혼 안 한 여자는 미스 김이었다. 선배는 물론 동료들도 미스 김이라고 불렀다. 내가 인상을 쓰면서 왜요 미스터 김 해도 그 의미가 무엇인지조차 몰라 어리둥절해하던 것이 대부분의 남자들이었다.

이규태 선생에게 월북한 친척이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그는 아들에게 그 사실을 알려주며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는 걸 기억하라’고 말했다. 이 선생이 집필에 전념하던 지하 서재.


이규태 선배는 무교동 낙지골목에 자주 나를 데리고 갔다. 후배들을 여럿 몰고 가서 낙지 한 접시를 시키고는 종업원에게 국물 모자라다고 국물 더 달라 하고 국물에 낙지 몇 점이 묻어오면 그것으로 버티고 여러 차례 국물을 청해 낙지 한 접시로 몇 시간을 버티는 방법도 전수해주었다. 나는 죽으면 낙지귀신들에게 쫓길 거야 낙지를 너무 먹었거든 하며 히죽이 웃기도 하였다.

쓸쓸했던 그 표정이 내내 빚으로

유신이 선포되고 거수기 국회의원이었던 유정회 소속의 의원 하나가 유신의 정당성을 주장한 글이 어느 날 <조선일보>에 실렸다. 그 글이 실린 경위를 따져묻는 것으로 <조선일보>의 자유언론실천운동이 시작되었다. 1972년인가였을 것이다. 앞장선 것은 저번 칼럼에서 말한 신홍범씨였다. 그 무렵 나는 신홍범씨한테 워낙 뿅가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신홍범씨가 하는 일이면 무조건 지지였다. 사안이 워낙 기가 막히고 국장과 부장이라는 선배들의 태도가 비겁해서 편집국 기자 전원이 이 운동에 동참했다. 당시 부장들은 우왕좌왕하며 젊은 기자들을 맨투맨으로 격파시킨다며 한 명씩 따로 불러 회유와 설득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하였다. 이규태 선배는 몇 번인가 나를 은밀하게 불렀다. “이봐 김선주, 그만 설쳐. 역사를 보라구. 암흑시대가 200년도 넘게 계속되기도 했어. 그냥 조용히 살라구. 설치지 말라구….”

그가 나를 회유하거나 설득하기 위해 한 말이 아님은 나는 그때도 알았다. 진정으로 나를 걱정하는 마음뿐이었다는 것을. 그러나 나는 매번 빈정대고 발끈했다. “아니 그럼 나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암흑시대에 살아야 한단 말이에요. 나는 그렇게 못해요. 못 참아요. 지금 시대에 어떻게 암흑시대가 200년이나 계속된단 말이에요. 일제시대도 오래갈 것 같았지만 36년으로 끝났잖아요. 이광수도 최남선도 일제시대가 영원히 계속될 것이라고 믿고 친일을 했지만 결국 암흑시대는 끝났잖아요. 이 선배는 평생을 암흑시대다 하고 나 죽었다 하고 살 건가요.”

그리고 30년이 지났다. 편집국 기자 전원이 동참한 운동이었지만 서른 몇 명만 회사에서 쫓겨났고 이규태 선생과는 가는 길이 달라진 채로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 시대는 많이 변했다. 나는 그를 꼭 한 번쯤 만나서 지금이 암흑시대인가요 암흑시대가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건가요를 묻고 싶었다. 좋아하는 낙지볶음을 사드리고 싶었다. 내 젊음도 지나갔고 그냥 사는 이야기를 하면서 뭔가를 위로해주고 싶다는 기분이 들었다. 아마도 내가 그렇게 잘난 척하며 따졌을 때 그가 보인 쓸쓸했던 혹은 풀 죽었던 표정이 두고두고 내 마음의 빚으로 남았기 때문이리라.

<한겨레21>에 ‘이규태의 지하실에 들어가다’라는 기사가 실렸다. 이규태 선생의 사후에 그의 서재를 방문한 기사였다. 그의 아들은 아버지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둘째 큰아버지가 6·25 당시 좌익의 고위 간부였다가 월북을 하였는데 가족과 친척이 연좌제 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답니다. 당신도 돌아가실 뻔한 위기를 넘겼고 조카들이 취직할 때는 그 문제 때문에 보증을 서야 했지요. 내가 대학 다닐 때 데모를 하는 것은 좋은데 연좌제로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 하셨지요.”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던가. 좌익 간부의 형을 두었던 사람은 아들이 데모를 해도 연좌제로 가족이 두고두고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인가. 이규태 선생이 얼마나 모진 세월을 지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나에게 “이봐 김선주 역사를 보라구 암흑시대가 200년 계속된 적도 있었다구” 말할 때 그의 머릿속에는 연좌제가 스쳤을 것이다. 어디 이규태 선생뿐이었겠는가. 물론 그런 낙인을 딛고 일어나서, 또 그런 누명과 오해를 대대로 받으면서도 당당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대한민국 사람들에게 그것은 지뢰밭이고 복병이다. 끔찍한 세월이었다. 우리 사회의 소시민적 보수층들은 가족 가운데 누군가 좌익이었다는 것 때문에 상처를 받았거나 간접경험을 통해 절대로 영원히 결코 좌라는 말, 빨갛다는 말 근처에는 얼씬도 안 하는 것이 거의 체질화돼 있다.

생전에 꼭 낙지볶음 사드리고 싶었는데…

나는 암흑시대는 이제 지나갔다 하고 살고 있다. 그러나 한명숙 총리 지명자에게도 그의 전력을 들먹이며 사상 논쟁을 벌이려 하고 무슨 사건만 생기면 아직도 빨갱이 운운하고 사돈의 팔촌의 전력까지 들먹이는 것은 여전하다. 학자의 의제 설정을 문제 삼아 강정구 교수를 그가 몸담고 있는 대학은 쫓아냈다. 사상과 관련한 집단적인 광기와 경기다. 나처럼 실실 사는 사람에겐 암흑시대가 아니지만 더 정직하고 더 날카롭고 더 분명하게 살려는 사람들에겐 우리 사회가 아직 암흑시대일 수도 있다는 것에 생각이 미치면 부끄러워진다.

글로 먹고 사는 사람에게 평생 글쓸 공간이 있다는 것을 행운이라고 생각하고 산 이규태 선생, 왜 연좌제 좌익 이런 문제에 대해, 그 끔찍한 시절에 관한 이야기를 정면으로 쓸 수 없었는지 당신쯤 된다면 그래도 될 텐데…. 살아 계셔 만났다면 나는 또 30년 전처럼 속사포처럼 쏘아붙였을 것이다.

이규태 선생 돌아가셨다는 소식 듣고 문상도 못 갔다. 살아생전에 꼭 만나 낙지볶음 사드리고 싶었는데 내가 먼저 연락을 드리지도 못한 사이에 가셨다. 속 좁은 내가 사람 노릇 또 못하는구나 싶다.


좋은 언론을 향한 동행,
한겨레를 후원해 주세요
한겨레는 독자의 신뢰를 바탕으로 취재하고 보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