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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오이코스’에 대한 중간 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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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3-10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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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학비료는 한 톨도 쓰지 않는데 가재가 사라졌다니, 이것이 멸종이구나
목마르면 그냥 물을 퍼마시던 사치는 불과 5년 새 누리지 못하게 되었네

▣ 이윤기 소설가·번역가

제목을 이렇게 써놓고 보니 뭐 같다. ‘오이코스’(Oikos)는 ‘집’을 뜻하는 그리스 말이다. ‘생태’ 혹은 ‘환경’을 뜻하는 ‘에콜로지’(Ecology)는 바로 여기에서 나온 말이다. 그러니까 생태 및 환경 이야기는 나의 집, 우리의 집 이야기이지 다른 것이 아니다. 그걸 강조하느라고 제목에서부터 조금 ‘오버’한 것을 양해하기 바란다.

봄, 우리 힘으로 부른 듯 대견했던 봄


햇수로 6년 전인 2000년 나는 시골 마을로 들어와 겨울을 났다. 우리 부부가 사는 집은 산에서 내려오면 네 번째로 만나는 집이다. 따라서 우리 집 위로는 집이 세 채밖에 없는 셈이다. 하지만 세 채 중 한 채에는 당시 사람이 살지 않았다. 무슨 단체가 연수원으로 지었는데 마을 사람들과 충돌을 빚으면서 쫓겨나갔다고 했다. 그 건물과 우리 집 사이에 집이 두 채 있기는 했다. 하지만 두 채 모두 화가들이 화실로 쓰던 집이었다. 화가들 부부는 어쩌다 한 번씩 주말에만 그 집을 썼으니 실제로는 빈집이나 다를 바 없었다.

아랫마을 사람들에게, 개울물 그냥 마시는 일은 조상 대대로 누려온 사치였다. 그 사피는 이제 회복될 도리가 거의 없다.

눈 많은 고장이라 고생스럽게 겨울을 났다. 겨울을 산골에서 나본 사람만이 산골의 봄을 예찬할 자격이 있다는 말을 실감했다. 우리가 산골에서 맞은 봄은 예사 봄이 아니었다. 우리 힘으로 불러오기나 한 것처럼 뿌듯하고 대견스러운 봄이었다. 땅을 갈아엎고 씨를 뿌렸다. 퇴비만 쓰기로 맹세했다. 밭일하다가 목이 마르면 밭둑 아래로 내려가 흐르는 물을 그냥 퍼마셨다. 그렇게 달고 시원할 수가 없었다. 골짜기의 유일한 상주민이었던 우리 부부는 그렇게 한 해를 보냈다.

그해 봄날, 물을 마시러 개울로 내려갔다가 큰 돌을 몇 개 들춰보았다. 물이 맑아서 틀림없이 가재가 살고 있을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아랫마을 농부가 지나가다가 가르쳐주었다. 몇 년 전부터는 가재가 사라졌노라고 했다.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었지만 농부는 대답하지 못했다. 이상한 일이 아닌가? 그해 초겨울까지만 해도 나는 서울이나 다름없는 경기도 과천에서 살고 있었다. 과천의 매봉산 계곡물에는 그해 가을에도 가재가 살고 있었다. 마음만 먹는다면 금방 여남은 마리를 잡는 것도 가능했다. 그런데 서울에서 자동차로 한 시간 거리나 떨어져 있는 산골 개울에서 어떻게 가재가 사라질 수 있는가? 농부는 사라졌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무슨 차이가 있는가? 곧 답이 나왔다. 과천 매봉산 골짜기의 개울 위로는 논밭이 없다. 하지만 내가 사는 산골의 개울 위로는 논밭이 많다. 농약과 화학비료가 그 원인일 개연성이 있다. 농부는 메뚜기도, 뱀도 점점 줄어든다고 걱정했다. 아하, 이것이 바로 ‘멸종’이라는 것이구나, 싶어서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집’에 깨어 있어야 할 것 같아서 퍽 조심해서 살았다. 정화조도 아주 큰 것으로 갈았다. 집안에서 쓴 물은 그 정화조를 통하지 않고는 한 방울도 흘러나가지 못하게 했다. 개울가에, 그 집의 전 주인이 놓아두었던 비누와 샴푸 같은 것도 치웠다. 농사를 짓기는 했지만 화학비료는 한 알갱이도 쓰지 않았다.

산골에서 두 번째로 겨울을 났다. 얼어 있던 냇물이 풀릴 무렵, 마을의 중년 사내들이 떼를 지어 개울을 따라 우리 집 쪽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아주 무거운 쇠망치로 바위를 내려치고는 그 밑에 숨거나 동면하고 있던 물고기와 개구리를 주워담으면서 올라오고 있었다. 어떤 바위는 힘 좋은 장정이 무지막지하게 내려치는 쇠망치에 쩍쩍 갈라지기도 했다. 그들이 지난 개울물에는 성한 바위가 남아나지 않았다. 낮술에 벌겋게 취한 채 흡사 축제라도 벌이고 있는 것 같아서 말릴 수도 없었다. 개구리와 물고기를 넣은 검은 비닐봉지가 제법 불룩했다. 마을 사람들은 대문이 없는 내 집 마당에다 짚불을 피우고 거기에다 구운 개구리를 안주 삼아 술을 마시면서 내게도 권했다. 술만 한 두어 잔 받아마셨다. 바로 그날 개울에서 가재가 사라진 까닭, 개구리가 사라지고 있는 까닭, 뱀의 개체 수가 나날이 줄어드는 까닭을 어렴풋이 짐작했다.

반딧불이와 자동차 전조등

2001년 여름에 흔하게 보이던, 2003년 여름에는 간간이 보이던 반딧불이가 2004년부터는 보이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은 나라에서 세워준 가로등 때문일 거라고 했다. 산골이 어두워야 반딧불이가 사는데, 너무 밝아져서 불빛으로 신호를 보내는 반딧불이가 사라졌다고 했다. 우리 집 거실의 조도(照度)에도 신경이 쓰였다. 드나들 때 타고 다니는 자동차의 전조등 밝기에도 신경이 쓰였다. 하지만 흐르는 물은 여전히 맑았다. 아랫마을 사람들이 그렇게 하듯이, 나도 논밭에서 일하다 목이 마르면 그 개울물로 갈증을 달래고는 했다.

2004년 가을, 골짜기 맨 윗자리의, 비어 있던 연수원 건물이 사람들로 북적거리기 시작했다. 무슨 요양 시설이라고 했다. 교회에서 불쌍한 사람들을 거두어 살게 해주는 시설이라고 했다. 20명 정도 된다고 했다. 송아지만 한 개들도 여러 마리 들어왔다. 밤이면 그 건물이 밝히는 전등 덕분에 산골이 훤해졌다. 산짐승이라도 한 마리 지나가면 개들이 일제히 짖어 골짜기가 떠들썩해지고는 했다. 개들이 들어온 뒤부터 나는 그 건물 앞으로 이어지는 산길의 산책을 그만두었다.

마을 사람들은 그런 요양원이 들어서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에게는, 같은 개울을 끼고 사는 이웃이었다. 나는 그들을 도와주고 싶었다. 하지만 도와줄 수도, 마을 사람들 편에 설 수도 없었다. 한번은 그 시설에 속하는 트럭이 길가 도랑에 빠진 적이 있다.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할 것 같아서 내 자동차로 그 트럭을 끌어올려 주었다. 트럭 운전사가 아침인데도 벌겋게 취해 있는 것이 마음에 걸리기는 했다. 아랫마을 사람들은 그들을 도와주었다고 나를 비난했다.

우리 시대에, 골짜기를 흐르는 물을 손으로 퍼서 그냥 마시는 것은 사치에 속한다. 그 사치를 계속해서 누리지 못한다고 해서 아랫마을 사람들은 요양원 들어서는 것을 반대한다. 야박한가? 그것은 야박하다. 요양원 사람들도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랫마을 사람들에게, 개울물 그냥 마시는 일은 조상 대대로 누려온 사치였다. 그 사치는 이제 회복할 도리가 거의 없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개울물을 그냥 마시지 못한다. 이제 농부들은 물병을 따로 들고 다닌다. 해법을 찾아야 한다. 불과 5년 사이에 내가 사는 산골짜기의 ‘집’이 이렇게 달라졌다. 불과 5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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