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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긴 밤 지새우고' 돌아온 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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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0-08-02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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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배자에서 실종자로 낙인찍힌 10년, ‘노해문’의 조정환씨 다시 이름 찾다

(사진/"출판을 통해 나를 공개하고 싶어요." 조씨는 수배중에 차린 출판사 '갈무리'에서 10권의 번역서를 냈다)
어서오라 그리운 얼굴/ 산넘고 물건너 발디디러 간 사람아/ 댓잎만 살랑여도 너 기다리는 얼굴들/ 봉창열고 슬픈 눈동자를 태우는데/ 밤이 새기 전에 땅을 울리며 오라(이시영 <서시(序詩)>)

‘10년간 그리워하며 찾아헤맨 이름입니다. 조. 정. 환.’ 90년대 내내 수배자로 쫓기며 살다 귀환한 문학평론가 조정환(44)씨를 어떤 이는 이런 말로 반겼다. 그랬다. 80년대 말 노동해방문학론을 정립한 대표적인 진보문예 이론가 조씨는 많은 이들에게 ‘그리운 얼굴’이었다. 지난 7월29일 서울 방배동 갈무리출판사에서 만난 조씨는 낮은 목소리로 잃어버린 10년의 세월이 아득한 듯, 술회했다. 지난 90년 1월 도피생활이 시작된 이후 처음으로 이뤄지는 공식 인터뷰였다.

<자본론>을 읽으며 단절을 견디다


“그동안 사람들과의 단절이 가장 힘들었습니다. 외롭고도 기나긴 시간을 견뎌내게 해준 힘은 제게 책이었습니다.”

조씨는 처음부터 인터뷰 요청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의 수배생활을 여러모로 도와준 사람들에게 행여 누를 끼치지나 않을까 걱정됐기 때문이다. 말하는 도중에도 도피생활과 관련된 대목에서는 할말을 먼저 속으로 차분히 정리하는 등 신중을 기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그는 80년대 노동해방문학을 외치던 논객치고는 이상하리만치 말을 아끼는 편이었다.

그동안 생사조차 확인이 안 돼 ‘돌아오지 않는 문학평론가’로 불렸던 조씨는 지난해 12월 수배가 해제되면서 10년간의 도피생활에 마침표를 찍었다. “박노해씨와 백태웅씨가 98년 8·15특사로 풀려났고 현실사회주의 붕괴 이후 사노맹이 내걸었던 애초의 조직동기인 사회주의가 역사 속의 의문에 붙여지지 않았습니까. 이런 상황에서 내가 자유로워질 수 있다면 굳이 계속 도피생활을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어요.” 조씨는 그래서 지난해 12월 스스로 공안당국에 출두했고 자연히 수배에서 해제됐다. 출두 직후 1주일 정도 검찰 조사를 받았지만 검찰은 여태까지 기소여부를 조씨에게 통보하지 않고 있다. 그래서 다소 어정쩡한 모양새지만 조씨는 이제 더이상 수배자는 아니다. 한창 글을 쓸 나이에 도망다니는 신세여야 했던 ‘문학적 장기수’이자 ‘사노맹 마지막 수배자’였던 조씨는 이렇게 다시 세상 속으로 나왔다.

이른바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사노맹) 사건과 관련해 조씨에게 수배조처가 내려진 것은 90년 10월. 조씨가 편집주간으로 있던 <노동해방문학>이 사노맹의 기관지며 조씨 자신도 사노맹 간부라는 혐의가 덧씌워진 것이었다. 서울대 국문과 박사과정을 마치고 대학에 강사로 나가고 있던 시절이었다. 부인이 딸 문영이를 낳은 지 다섯달도 채 안된 상태에서 조씨는 가족을 뒤로하고 기약없는 수배생활에 들어가야 했다.

“도피생활 초기에는 어디로 가야 하나 막막했습니다. 금세 돈도 떨어지고 긴장된 나날을 보냈죠. 동사무소 벽마다 내 얼굴이 나와 있는 수배전단이 나붙어 있는 것을 쉽게 볼 수 있었습니다. 먹을 것을 구하러 시장에 나가는 것도 밤에만 다녔습니다.”

그런 그의 초기 불안한 마음을 달래주던 책이 <자본론>이었다. 6개월 동안 아침부터 저녁까지 <자본론>을 읽고 또 읽었다. 조씨는 <자본론> 덕분에 어려운 시절을 넘어설 수 있었다며 희미하게 웃어보였다. 조씨는 90년 10월 조직을 비롯한 모든 것을 일단 정리했다. 우선 알고 지냈던 사람은 일절 만나지 않았다. 동지는 물론 가족도 예외는 아니었다. 딸의 생일 같은 기념할 날에만 집으로 카드를 보냈다. 살아 있다는 짤막한 편지였고 부치지 못한 편지도 많았다. 10년간의 도피생활중 서울과 경기도를 벗어난 적은 없었다. 그동안의 딸에게 아빠는 외국 유학생이었다.

“박노해와 접점 찾기는 어려워”

(사진/사노맹의 마지막 수배자 조정환씨. 지난해 12월 수배가 해제되면서 10년간의 도피생활을 끝냈다)
“많은 사람을 만날 필요가 없었습니다. 아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불리했으니까요. 도피생활중 제가 만난 사람이 10명도 채 안 될 겁니다.” 그래서인지 수배생활을 말하는 중간중간 어느새 익숙해진(?) 쓸쓸한 그림자가 얼굴에 스치는 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지친 모습은 좀체 찾아볼 수 없었다.

“기관원들이 93년까지 집 주변에서 동태를 살피면서 가족을 감시하는 바람에 아내가 고통을 많이 겪었죠. 아내와는 도피가 시작된 지 6년 만에 잠깐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때 딸이 오래 전부터 결핵으로 치료를 받고 있었다는 사실을 듣고 가슴이 아프면서 한편으로는 분노가 교차했습니다.”

수배중인 처지라 ‘불안한 평온’이었지만 어느 정도 안정을 찾아갈 무렵, 박노해씨가 91년 검거된 데 이어 박씨와 함께 사노맹 중앙위원이었던 백태웅씨까지 이듬해에 구속되면서 조씨는 모든 연락을 철저히 끊었다. 사실상 이때부터 ‘실종’ 상태에 들어간 것이다. 지난해에는 문화방송이 실종자를 찾는 방송을 기획하면서 조씨를 실종자로 분류한 뒤 가족들을 통해 행방을 수소문하기도 했다. 풀려난 백태웅씨가 <말>과의 인터뷰에서 조씨를 만나고 싶다며 실종자로 처리(?)했는데 이를 보고 문화방송에서도 그를 실종으로 기정사실화 해버린 것이었다. “분명 수배자인데 너무 오랫동안 가족들한테도 소식을 끊다보니 실종자로 분류된 것이죠. 서글픈 느낌마저 들더군요. 백태웅씨가 미국으로 가기 전에 이전의 사노맹과 관련된 문제도 풀겸해서 잠깐 만났죠.”

박노해씨는 지난해 12월에 만났다. 최근 박노해씨의 변모에 대한 비판적인 글을 발표한 적이 있는 조씨는 박노해씨와 관련해 이렇게 말하고 더이상 얘기를 진전시키지 않았다. “박노해씨는 ‘몸통철학’을 통해 자신의 사유를 발전시키고 있고, 저는 ‘자율성’을 중심으로 세계인식에 접근하고 있습니다. 만나 얘기를 나눠봤지만 실천적 접점을 찾기 힘들더군요. 과거를 정리하는 차원에서 만나 회포를 푼 셈이지요.”

조씨가 말한 도피과정에서의 ‘자기보위 조처’는 뜻밖에 평범했지만 이름을 바꿔 활동을 계속해오는 등 치밀한 면모를 보여줬다. 하지만 그는 수배일기를 추억하면서 당시의 구체적인 정황은 일체 꺼내지 않았다.

“딱 한번 검거될 뻔한 위기상황에 맞닥뜨린 적도 있었습니다. 불심검문에 걸린 것이죠. 그러나 어떻게 해서 용케 넘어갔습니다. 서점이나 길거리에서 아는 사람과 우연히 마주친 적도 몇 차례 있었죠. 하지만 없던 일로 해달라는 저의 부탁을 다들 그대로 들어줬습니다.”

다시 오르는 문학의 산길

조씨의 수배생활은 94년 반지하 사무실에 도서출판 갈무리를 세우면서 전환점을 맞았다. 그가 살아 있는지 죽었는지조차 의문에 싸여 있던 때였다. 갈무리는 ‘불의 연대’였던 80년대 지나간 역사에서 취할 것은 취하고 버릴 것은 버린다는 의미에서 붙였다. 출판사는 다른 사람 이름으로 차렸고 서울 아현동 영등포 구로동 합정동 등으로 수차례 사무실을 옮기며 전전했다. “출판은 공중 앞에 자기의 생각과 언어활동을 제시하는 소통행위지요. 수년간 고립돼 있어서인지 제가 격리돼 있다는 생각이 강하면 강할수록 출판을 통해 나를 공개해보자는 생각도 함께 강해지더군요.” 수배중에도 시대를 따라잡기 위해 나름대로 몸부림친 것이 출판활동으로 표현된 것이다.

조씨는 ‘성도 이름도 없이 산 세월’이라고 말했지만, 이원영이라는 필명으로 갈무리에서 번역본을 출간하기 시작했다. 수배도중 번역한 10권은 주로 멕시코의 치아파스 원주민 투쟁이나 이탈리아의 아우토노미아(자율주의) 정치철학에 관한 것이었다. 이원영이란 이름으로 월간지나 학보 등에 글을 발표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원영이 노동해방문학의 조정환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단 한명도 없었다. 최소한 지난해까지만 해도 그랬다. 세상에서 그는 사라진 문학평론가였기 때문이었다. 물론 어떤 이들은 이원영의 글을 보며 내용이나 문체가 조씨를 많이 닮았다고 의심(?)하기도 했지만 의심 이상으로 확인하지는 못했다.

80년대 말 민족문학주체논쟁의 한 당사자로 노동해방문학론을 정립했던 그에게 노동문학에 대한 변화된 생각은 정리해야 할 숙제다. 노동문학을 ‘아직 살아 있는 어떤 진지처럼 사고하는 것이 가능한지’, 그리고 자율적 삶이 어떻게 가능할지가 조씨의 최대 화두다. “요즘 노동과 삶의 관계를 다시 생각하고 있습니다. ‘노동’문학이라는 말만으로는 삶을 풍부하게 하고 삶의 장애를 철거하는 대안이 못됩니다. 이제는 자율적인 삶이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를 모색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는 올해 <실천문학> 봄호에 발표한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종말이후의 노동문학>에서 “이제 노동문학은 옛 기억에만 매달리지도 않고 망각의 늪으로 빠져들지도 않는 살아 있는 감각을 필요로 한다”며 ‘삶으로서의 문학’으로 재구성하자고 주장하기도 했다.

조씨는 80년대 말 어느 글에서 “문학발전의 전망에서 아직 산기슭에서 꾸무럭거리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필자가 소지한 지도는 곳곳에 선이 희미하다. 게다가 오솔길 같은 것은 표시도 없다. 고약한 일이지만, 올라가면서 분명하게 그려넣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고 말했다. 수배생활 10년, 어느덧 불혹을 훌쩍 넘겨버린 조씨에게 이 기간은 자신의 표현대로 ‘감옥 밖에서 감옥을 사는 또 하나의 감옥생활’이었다. 하지만 기나긴 수배생활로 인한 팍팍함은 엿보이지 않았다. 대신 자신을 그리워했던 이들을 위해서라도 비평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부담을 느끼는 듯했다. 이원영이 아닌 조정환이란 이름으로.

조계완 기자kye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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