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비행기 47]
‘사회’가 건축주가 되어 만든 동네 맞춤형 순천어린이전용도서관
섬세하게 시민들의 삶을 조직하는 건축행위가 우리를 진보케 하리라 ▣ 정기용/ 건축가 6년 전 어느 날 도서관 만들기를 위한 길거리 퍼포먼스 공연을 하던 도중 도정일 선생님이 진지하게 말을 건네왔다. “우리 제발 이 나라에 좋은 도서관 좀 지읍시다. 도서관 없는 나라가 나라입니까.” 그래서 나는 “선생님이 돈만 마련해주시면 열심히 해보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3년 전, 문화방송 를 통해 전국 여러 도시에서 ‘기적의 도서관’이라는 이름으로 어린이 전용 도서관이 탄생하는 과정이 방영됐다. 새 도서관을 얻게 된 아이와 어른들은 누구나 쉽게 찾아가 책을 볼 수 있는 장소가 동네 한복판에 생긴다는 사실에 기쁨과 호기심을 표시했다. 도서관 설계에 참여했던 나는 처음에는 이를 텔레비전이라는 막강한 매체의 힘에 기댄 일시적인 현상으로 생각했으나 서서히 어린이 도서관이 안정적으로 정착해 많은 것들을 변화시키는 장면들을 목격하게 됐다.
젖먹이 키우는 주부들도 들르고픈 공간 돌이켜보면 해방 뒤 이 땅에 작지만 큰 의미를 지닌 사건이 하나 벌어졌다고 기록될 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아마도 크게 두 가지 이유 때문일 것이다. 하나는 여러 사람이 쓰는 ‘공공건축물’을 탄생시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진지하게 지혜를 모았는지라는 점일 테고, 또 하나는 ‘개인’이 아닌 ‘사회’가 건축주일 때 누가 그 필요성을 세상에 발의해 전문가를 모으고 지방자치단체와 연대해 복잡한 과정을 성공적으로 이끄는가를 묻고 있다는 점이다. 어린이 도서관이 어린이만이 아니라 젊은 주부들로부터도 많은 사랑을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건 한마디로 그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들을 실현해준 섬세한 배려 때문이다. 어린이 도서관은 젖먹이와 유아를 키우는 젊은 주부들도 들르고 싶은 공간이다. 그러자면 수유실도 있어야 하고 아이를 잠깐 잠재울 공간도 있어야 한다. 그래서 아이가 잠들면 어머니는 책을 볼 수 있고, 때로는 자원봉사자로 나서 도서관 일을 도울 수도 있다. 이 외에 순천어린이도서관에는 ‘아빠랑 아가랑’이라는 조그만 방이 있다. 어떻게 해서든 젊은 아버지들이 도서관에 와서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면서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돕기 위해 마련된 공간이다. 아이들과 여성의 공간만이 아니라는 점을 부각시킨 것이다.
아이들은 도서관에 들어서면 바로 사서 데스크와 서가를 만나는 대신 대기 공간 겸 만남의 공간인 작은 북카페에 들어서게 된다. 이곳은 사회화 과정을 배우는 중요한 영역이다. 그 다음으로 신발을 벗고 손을 씻는 공간이 나온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한국의 어린이 도서는 일본과 달리 1년도 안 되어 걸레처럼 된다고 한다. 그래서 책을 읽기 전에 반드시 손을 씻는 장소를 만들어달라고 사서들이 주문해 이에 따른 것이다. 본격적으로 도서실에 들어서면 어린이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책과 만난다. 낮은 공간, 높은 공간, 대나무가 자라는 작은 정원들. 그리고 2층에는 아이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두 개의 공간을 따로 마련했다. 하나는 하늘로 여행하는 것처럼 꾸민 비행기 모양의 책 읽는 방이고 또 하나는 강당 상부에 마련된 미로이다. 하늘만 보이는 좁고 긴 통로를 한 발짝씩 걸으면서 이야기를 전개하는 특별한 공간이다.
이 모든 것들은 도서관 전문가들과 아줌마들의 체험과 조언을 참조해 건축화한 것이다. 각기 다른 기능을 적절히 공간별로 배분하고 조직해내는 일이 건축가가 할 일이다. 다시 한 번 뼈저리게 느끼는 것이지만, 건축은 근사한 형태를 만드는 작업이 아니라 섬세하게 사람들의 삶을 조직하는 일이다. 어린이 도서관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원하는 모든 것들, 그리고 도서관을 운영하는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들을 현실성 있게 조직하는 것이 형태나 양식보다 우선한다. 그리고 다른 나라의 사례를 참조하기보단 이 땅에서 어렵게 도서관을 운영해온 사람들과 어떻게 해서든 아이들이 걸어서 갈 수 있도록 동네 한복판에 도서관을 입지시키려는 사람들의 노력이 어우러져 이 세상 어느 곳에도 없는 맞춤형 어린이 도서관이 한국에 탄생한 것이다.
제천·서귀포·금산에서 기적은 계속
건축은 필요에 의해서 탄생한다. 그것이 사적인 경우에는 사적인 필요에 의해 개인이 제안해 건설되지만 사회가 필요로 하는 건축은 누가 주체가 되어 그 요구를 발의할 것인가? 어린이 도서관이 지닌 또 다른 의미는 요새 유행하는 단어인 집정(集政), 또는 거버넌스의 필요성을 상징적으로 드러냈다는 점에 있다. 어린이 도서관은 시민단체가 주체가 되어 사회적 요구를 대신했는데, 어찌됐든 개인이나 정부가 아니라 한 사회가 건축주가 되어 사회가 요청하는 건물을 탄생시킬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중요한 사례다.
‘책 읽는 사회’라는 시민단체가 발의하고, 기획하고, 건축 전문가가 설계하고, 도서관 운영 전문가는 준공 뒤의 운영 프로그램을 제안하고, 지방자치단체는 토지와 건축비의 절반을 제공하고, 시민들이 나머지 절반의 건축비를 위해 모금에 동참하는 이 일련의 과정이야말로 우리들이 거버넌스를 통해서 실현하고자 하는 공공공간의 이상적인 구조를 확인시켜준 셈이다. 제대로 된 거버넌스에 의해 탄생한 공공장소는 사람들이 좋아할 수밖에 없다. 어린이 도서관은 어린이, 어른, 어머니, 아버지, 교육, 사회 모두에게 작은 변화지만, 이 사회가 변화해야 하는 중요한 계기를 제공한 사건이다. 시민들이 원하는 것이 눈앞에서 실현됐을 때 비로소 사회는 한 걸음씩 진보한다. 순천에서, 진해에서, 제천에서, 청주에서, 그리고 서귀포와 제주에서도, 울산과 금산에서도 우리는 한 걸음씩 나아갔다.
어린이 도서관을 ‘기적의 도서관’이라고 말하는 것은 어린이 도서관의 탄생이 기적적인 사건이라는 것뿐만이 아니라 책을 읽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 한순간 그것이 기적 같아 보이기 때문이다.
어린이 도서관은 매일매일이 기적이다. 이런 일에 동참했던 나는 행복하다.
섬세하게 시민들의 삶을 조직하는 건축행위가 우리를 진보케 하리라 ▣ 정기용/ 건축가 6년 전 어느 날 도서관 만들기를 위한 길거리 퍼포먼스 공연을 하던 도중 도정일 선생님이 진지하게 말을 건네왔다. “우리 제발 이 나라에 좋은 도서관 좀 지읍시다. 도서관 없는 나라가 나라입니까.” 그래서 나는 “선생님이 돈만 마련해주시면 열심히 해보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3년 전, 문화방송 를 통해 전국 여러 도시에서 ‘기적의 도서관’이라는 이름으로 어린이 전용 도서관이 탄생하는 과정이 방영됐다. 새 도서관을 얻게 된 아이와 어른들은 누구나 쉽게 찾아가 책을 볼 수 있는 장소가 동네 한복판에 생긴다는 사실에 기쁨과 호기심을 표시했다. 도서관 설계에 참여했던 나는 처음에는 이를 텔레비전이라는 막강한 매체의 힘에 기댄 일시적인 현상으로 생각했으나 서서히 어린이 도서관이 안정적으로 정착해 많은 것들을 변화시키는 장면들을 목격하게 됐다.
젖먹이 키우는 주부들도 들르고픈 공간 돌이켜보면 해방 뒤 이 땅에 작지만 큰 의미를 지닌 사건이 하나 벌어졌다고 기록될 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아마도 크게 두 가지 이유 때문일 것이다. 하나는 여러 사람이 쓰는 ‘공공건축물’을 탄생시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진지하게 지혜를 모았는지라는 점일 테고, 또 하나는 ‘개인’이 아닌 ‘사회’가 건축주일 때 누가 그 필요성을 세상에 발의해 전문가를 모으고 지방자치단체와 연대해 복잡한 과정을 성공적으로 이끄는가를 묻고 있다는 점이다. 어린이 도서관이 어린이만이 아니라 젊은 주부들로부터도 많은 사랑을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건 한마디로 그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들을 실현해준 섬세한 배려 때문이다. 어린이 도서관은 젖먹이와 유아를 키우는 젊은 주부들도 들르고 싶은 공간이다. 그러자면 수유실도 있어야 하고 아이를 잠깐 잠재울 공간도 있어야 한다. 그래서 아이가 잠들면 어머니는 책을 볼 수 있고, 때로는 자원봉사자로 나서 도서관 일을 도울 수도 있다. 이 외에 순천어린이도서관에는 ‘아빠랑 아가랑’이라는 조그만 방이 있다. 어떻게 해서든 젊은 아버지들이 도서관에 와서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면서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돕기 위해 마련된 공간이다. 아이들과 여성의 공간만이 아니라는 점을 부각시킨 것이다.

순천어린이도서관은 어린이, 어른, 어머니, 아버지 모두에게 작지만 큰 변화를 줬다. 섬세하게 조직된 공간에서 아이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책과 만난다. (사진/ 기용건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