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비행기 47]
황우석 사태를 겪으며 해질녘 공터에서 울던 50년 전 죽음의 공포가 되살아나다…죽은 뒤에도 우상의 시대가 오지 않을 거라고 믿게 해준 건 역시 사람이라네
▣ 김선주/ 전 <한겨레> 논설주간 칼럼니스트
살아가면서 가장 두려웠던 순간은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나는 열 살 무렵의 어느 여름날 오후를 끔찍하게 두려웠던 순간으로 기억한다.
학교 운동장인가 집 앞 공터인가였던 것 같은데 해가 뉘엿뉘엿 지던 무렵이었다. 그날 무슨 연유로 그렇게 되었는지는 모르겠는데 세상에 살았던 사람은 누구나 죽을 뿐 아니라 나도 예외가 아니어서 완전히 무가 되어 쓸쓸하고 차가운 땅속에서 썩어갈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소스라쳤다. 해가 꼴깍 져서 어두워질 때까지 텅 빈 공터에 쭈그리고 앉아 지구상에 혼자만 남은 마지막 사람 같은 공포에 싸여 울고 또 울었던 기억이 난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거름이 되고… 곧, 아니면 얼마 안 있어서 죽을 텐데 잘도 시시덕거리고 살고 있구나 싶으니까 세상 사람들이 모두 버러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세상을 만든 조물주와 나를 이러한 세상에 낳아준 부모를 원망했다. 집에 돌아와서 둘째언니에게 언니는 언니가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어라고 했더니 언니가 보던 책을 덮지도 않고 나를 흘끗 보더니 그거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냐 하는 것이었다. 죽을 줄 아는데 어떻게 사는 거야 했더니 스스로 죽을 수 없으니까 사는 거지 하고 다시 시선을 책으로 돌렸다. 그럼 언니도 아는구나, 알면서도 사는구나 싶으니까 맥이 풀렸다. 그때 언니가 읽던 책이 니체인가 쇼펜하우어인가였다. 나는 그 다음날부터 언니들의 책장에서 니체, 쇼펜하우어, 칸트, 사르트르, 카뮈, <사상계> 그리고 셰익스피어와 그리스의 비극들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그리고 거역할 수 없는 운명의 힘에 의해 인간이 조종되는 것에 아득해지기도 했고, 그러면서도 사람들이 미래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것을 보면서 살아 있는 모든 사람이 위대한 존재라는 데 생각이 이르렀던 것 같다. 책을 읽고 글을 쓰게 된 것은 아마도 이런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불안과 공포를 극복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죽음에 대한 공포에서 벗어난 것은 나무 덕분이었다. 내 어릴 적 살던 집의 앞뒤 마당엔 온갖 나무가 자라고 있었다. 나무는 해마다 잎을 떨어트리고 겨울이 되면 앙상하게 죽었는가 싶었는데 계절이 바뀌면 다시 새잎이 돋고 무성해졌다. 그것을 보면서 사람 하나하나는 나뭇잎 같은 존재이며 인류는 오래오래 사는 거목과 같은 것이구나라는 결론을 내렸다.
내 존재의 의미에 대한 답으로서 나는 나뭇잎 같은 존재라는 것을 받아들였고 죽음에 대한 공포는 거의 극복되었다. 간헐적으로 죽음의 공포가 슬며시 내 안에 들어와도 나무의 존재를 보면서 달랬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더 내 어머니가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거름이 되고 운운하며 성경 말씀을 가르쳐주신 것에도 감동했던 것 같다. 나뭇잎이 떨어져 흙이 되고 그것이 다시 생명으로 돋아남으로써 미래를 기약하는 존재에 자신을 대입시키니까 사는 것과 죽는 것이 그다지 두렵지 않았다. 그러한 맥락에서 자연스레 내 안에서 싹이 트고 자라난 것이 사회에 대한 연대의식과 역사의식이었다.
살면서 우리 사회의 온갖 풍랑과 역사를 지켜보면서도 행복했던 것은 내가 살아온 우리 사회와 시대가 뒤뚱뒤뚱하면서도 앞으로 나아갔다는 점 때문이다. 일제시대와 내전을 겪고 30년에 걸친 군사정권 아래서 살다가 이대로 우상의 시대가 이어지는 것이 아닌가 암울해지기도 했다. 그러나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에 이르는 정권의 탄생을 보면서 내가 그러한 시대를 살아낸 사회의 일원인 것이 자랑스러웠다. 적어도 우리 사회가 과거 지향적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고 미래를 향해서 나간다는 것이, 그런 시대에 살았다는 것에 뿌듯했다. 내 생의 의미를 내가 산 시대의 의미에서 찾는 것은 기쁨일 수밖에 없다.
모든 생명이 가는 길, 그리고 그 이후
그런데 지난 연말, 50년 전의 공포가 되살아났다.
황우석 사태를 겪으며 세상이 거꾸로 미쳐 돌아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전체주의 국가, 나치의 시대, 하이 히틀러의 시대가 오는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엄습했다. 인터넷이, 언론이, 참과 거짓을 가리기보다는 광신 집단처럼 믿사오며를 주문처럼 외치고, 사실을 오도하고, 그것이 거의 국민적 정서처럼 퍼져나가는 것을 보면서 내가 늘그막에 못 볼 꼴을 보는구나 싶었다. 몇몇 친지들이 반동의 시대가 올 것 같다며 그런 조짐이 여러 구석에서 감지된다고 말해 나를 더욱 두렵게 했다. 황우석 사태 때문에 온 국민이 패닉 상태에 빠져 있는 상황을 이용하는 세력들이 날뛰는 것을 보며 절망적인 기분이 들었다.
나는 살아가면서 사람에 대해 많이 절망했다. 그러면서도 결정적인 때가 되면 꼭 사람에게 희망을 걸어왔다. 당시에도 사람에게 희망을 걸 수밖에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해피엔딩이었다.
모든 태어난 생명의 마지막 가는 길은 죽음이다. 죽을 때 자신이 역사적으로 어떤 시대에 살았는지, 그리고 앞으로 어떤 시대가 오리라는 희망 없이 죽는 것은 허망하다. 다시는 우상의 시대가 올 수 없고 이성이 우리의 삶을, 개인의 삶을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들 것이라는 것을 확인하면서 나는 다시 공포에서 벗어났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거름이 되고… 곧, 아니면 얼마 안 있어서 죽을 텐데 잘도 시시덕거리고 살고 있구나 싶으니까 세상 사람들이 모두 버러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세상을 만든 조물주와 나를 이러한 세상에 낳아준 부모를 원망했다. 집에 돌아와서 둘째언니에게 언니는 언니가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어라고 했더니 언니가 보던 책을 덮지도 않고 나를 흘끗 보더니 그거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냐 하는 것이었다. 죽을 줄 아는데 어떻게 사는 거야 했더니 스스로 죽을 수 없으니까 사는 거지 하고 다시 시선을 책으로 돌렸다. 그럼 언니도 아는구나, 알면서도 사는구나 싶으니까 맥이 풀렸다. 그때 언니가 읽던 책이 니체인가 쇼펜하우어인가였다. 나는 그 다음날부터 언니들의 책장에서 니체, 쇼펜하우어, 칸트, 사르트르, 카뮈, <사상계> 그리고 셰익스피어와 그리스의 비극들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그리고 거역할 수 없는 운명의 힘에 의해 인간이 조종되는 것에 아득해지기도 했고, 그러면서도 사람들이 미래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것을 보면서 살아 있는 모든 사람이 위대한 존재라는 데 생각이 이르렀던 것 같다. 책을 읽고 글을 쓰게 된 것은 아마도 이런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불안과 공포를 극복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죽음에 대한 공포에서 벗어난 것은 나무 덕분이었다. 내 어릴 적 살던 집의 앞뒤 마당엔 온갖 나무가 자라고 있었다. 나무는 해마다 잎을 떨어트리고 겨울이 되면 앙상하게 죽었는가 싶었는데 계절이 바뀌면 다시 새잎이 돋고 무성해졌다. 그것을 보면서 사람 하나하나는 나뭇잎 같은 존재이며 인류는 오래오래 사는 거목과 같은 것이구나라는 결론을 내렸다.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불안과 공포에서 벗어난 것은 나무 덕분이었다. 사패산 터널 구간 공사현장에 돋아나고 있는 도토리 새싹. (사진/ 강창광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