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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간판 공화국의 주목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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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1-10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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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만의 세상읽기]

그 치열한 경쟁은 ‘시간 강박’에 근거한 속전속결주의로 치닫게 돼 있어
사회 전 분야에 걸친 주목의 기회균등과 공정거래 원칙에 눈을 돌려볼 때

▣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한국은 ‘간판 공화국’이다. 당신은 왜 그렇게 ‘~공화국’을 좋아하는가? 워낙 ‘공화국’ 정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런 것으로 이해해주시기 바란다. 앞으로도 다룰 ‘~공화국’ 시리즈가 많이 남아 있으니 계속 이해심을 발휘해주시면 좋겠다.


누군들 천박하게 번쩍거리고 싶겠는가

한국은 간판 천국이다. 간판을 혐오하는 사람에게는 간판 지옥이다. 간판들이 아우성치고 있는 서울의 한 거리. (사진/ 한겨레 이종근 기자)

한국은 간판의 천국이다. 간판을 혐오하는 사람들에게는 간판의 지옥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간판 공해’라는 말은 이미 우리에게 익숙해진 상용어가 되었다. 그 공해는 미학적 관점에서만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바람이 세게 부는 날엔 어김없이 전국 어디에선가 지나가던 행인이 떨어진 간판에 맞아 부상을 입었다는 이야기가 들려온다.

보는 사람들의 입장에선 ‘간판 공해’이겠지만, 적잖은 돈을 들여 간판을 내건 상인들의 입장에선 ‘간판 전쟁’이다. 그것도 처절한 전쟁이다. 간판은 건물 벽도 모자라 땅까지 내려왔다. 보도에 늘어선 이동식 입간판이다. 행여 구청 단속반이 변덕을 부려 입간판을 수거해갈까봐 노심초사하면서 입간판을 지키는 업주들도 많다. 간판만으론 모자라 전단지를 뿌려대고, 그것마저 효용이 다하면 소리를 치거나 아예 손을 붙잡는 호객행위로까지 나아가기도 한다.

간판 전쟁에도 빈부격차가 있다. 대기업은 빌딩 꼭대기로 올라가 싸우고 영세 자영업자는 빌딩 밑에서 싸운다. 대접도 크게 다르다. 대기업과 언론사의 독무대인 ‘전자식 전광판’은 일부 시민들로부터는 지지를 받기도 했다. 도시를 세련되게 만들고 눈요깃거리로 그만이라나. 간판의 대리 판매·유통업에 종사하는 언론매체는 권위까지 누린다. 그 권위를 이용하는 대기업 광고엔 팬클럽까지 생겨났지만, 거리에서 돌리는 전단지에 대한 반응은 싸늘하다.

돈으로 호사하는 극소수 간판을 제외하곤, 간판에 대한 원성이 자자하다. 특히 미적 감수성이 뛰어난 사람들의 개탄은 하늘을 찌를 정도다. 강력한 법으로 확실하게 정비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오래전부터 나왔다. 그런데 묘한 건 서울 같은 구도시야 이미 ‘버린 몸’이라지만, 서울 근교의 신도시들까지 서울을 찜쪄 먹는 수준의 간판 공해로 몸살을 앓고 있다는 사실이다.

소설가 성석제씨는 미국에서 20년 넘게 살다 잠시 들렀던 선배가 저녁에 자신이 살고 있는 신도시의 중심 상업지역을 보고 “아예 넋을 잃고 원색의 숨가쁘게 점멸하는 간판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화를 낼 정신도 없는 듯했다”고 말했다고 한다. 성씨는 선배에게 다음과 같은 변명을 내놓았다.

“누군들 좋아서 천박하게 번쩍거리고 싶겠는가. 옆집 앞집 뒷집에서 하니까 가만히 있으면, 아니 평범하게 하면 묻히고 버림받을 것 같은 초조감에 간판도 커지고 자극적으로 변한다. 앞에서 시끄럽게 떠들어대니까 나도 스피커를 마주 틀어댈 수밖에 없다. 비슷비슷한 사람들이 비슷비슷하게 사는 한국에서 눈에 띄는 방법은 저런 것뿐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맞다.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전국적으로 음식깨나 한다는 어느 곳에 가건 접할 수 있는 ‘원조’ 간판은 절규에 가깝다. ‘원조’는 더 이상 ‘원조’를 의미하지 않는다. ‘진짜 원조’ 또는 ‘유일 원조’를 강조해야 한다. 원조의 다원성을 인정하면서 ‘원조 제1호’라고 주장하는 곳도 있고, 증거 과시를 위해 텔레비전의 무슨무슨 프로그램에 나온 집이라는 걸 사진과 같이 보여주기도 해야 한다.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간판 메시지도 막 나가고 있다. <매일경제> 기사에 따르면, 서울 강남, 명동을 비롯한 지방 대도시 유흥 밀집지역엔 ‘꼴통’ ‘줄래’ ‘쭈쭈’ ‘똥값’ ‘야마도라’ ‘졸라빨라’ ‘배째라’ ‘란제리 오르가즘 쎄일’ 등 비속어 간판이 즐비하다. ‘여대생 다방’ ‘쇼걸 노래방’ ‘골때리는 노래방’ ‘뼈다귀에 작업 들어갔네’ 등 변태 영업을 교묘히 광고하는 간판들도 많다.

그 조급증이 초고속 경제성장을 낳았다?

돈에 눈이 먼 건가? 아니다.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돈과는 관련 없는 대학가 플래카드도 사람들의 주목을 쟁취하기 위해 처절한 투쟁을 하고 있다는 점에선 다를 게 없다. 경희대 조현용 교수는 대학의 정문을 들어서면 대학에는 건물도 숲도 없고, 플래카드만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고 했다.

대학에는 플래카드가 휘날린다. 플래카드는 앞을 가리고 여유로운 시선을 차단한다. 토익 강좌를 알리는 플래카드가 즐비한 대학교. (사진/ 류우종 기자)

“앞의 플래카드에 가려 뒤의 플래카드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빽빽하기도 합니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는 플래카드에 덮인 하늘을 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시선은 가려지고 닫혀 있습니다. 닫혀진 시선에서 여유를 찾을 수 있을까요? 그러고서 조금 더 넓게 그리고 멀리 볼 수 있을까요? 이제 다른 이들의 시선을 열어주면서 새롭게 관심을 모으는 생각들을 시작해보는 건 어떨까요. 눈을 가리려 하는 구호보다는 하늘을 열어 보여주는 배려의 속삭임으로 다른 이들의 마음을 움직여보는 건 어떨까요.”

아무래도 ‘여유’라는 말에 답이 있는 것 같다. 자극적인 간판 범람의 주된 이유는 경쟁의 악순환 때문이겠지만, 그 악순환마저도 여유 없는 조급증이 낳은 것이라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조급증 덕분에 세계에서 가장 빠른 경제성장을 이루었으니, 조급증을 무작정 나쁘다고만 할 수는 없다. 아니 조급증을 극복하는 게 매우 어렵다고 말하는 게 옳겠다.

‘간판’이 낳은 파생어라 할 ‘간판주의’에 대해 생각해보자. ‘간판 만능주의’나 ‘간판 제일주의’라고 부르기도 한다. 간판주의는 학벌주의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왜 한국인들은 학벌, 아니 간판에 집착하는가? 그것 역시 조급증과 관련이 있다. 한국인은 뭐든지 빨리 알려고 든다. 그래서 처음 만나는 사람도 만나자마자 나이, 고향, 학교 등 ‘족보’부터 파고든다. 이는 폭탄주 심리와 비슷하다. 거쳐야 할 과정을 건너뛰거나 생략하자는 것이다. 이런 극단적 효율주의엔 간판이 큰 변수가 된다. 적어도 확률적으로 그렇다. 사람에 대한 평가를 확률로 때려잡는 건 효율적일지는 몰라도 위험하다. 반인권적이다. 그러나 조급증은 그런 문제의식을 마비시킨다.

어느 신문의 논설위원은 명문대학 선호 열기를 비판하면서 “‘명문 간판’이 보다 나은 삶을 보장하는 시대는 곧 끝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일갈했다. 아닌 게 아니라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그런 말을 한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나는 그런 날은 결코 오지 않으리라고 생각한다. 간판주의는 인구 밀도와 깊은 관련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최근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한국 인구밀도는 2005년 11월1일 기준 1㎢당 474명으로 5년 전 464명보다 10명 높아졌다. 세계 3위지만, 산악지대를 빼고 평지 중심으로 계산하면 세계 1위일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서울의 인구밀도는 세계 최고일 것이다. 서울의 인구밀도는 1만6181명으로 강원 88명보다 183배가 높다.

고밀도 사회에서 여유는 기대하기 어렵다. 생물학적으로 그렇다. 치열한 경쟁과 더불어 ‘시간 강박’에 근거한 속전속결주의로 치닫게 돼 있다. 간판은 ‘시간 강박’이 요구하는 비용 절감 효과를 가져다준다.

고밀도 사회는 이웃과의 비교를 강요한다. 이웃을 의식하지 않고선 단 한시도 못 살게 만든다. 그 비교는 필사적이다. 행복은 비교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간 수많은 사상가들이 이 ‘비교의 사회학’에 대해 한마디씩 했다.

카를 마르크스는 “집은 클 수도 작을 수도 있다. 주변의 집들이 똑같이 작다면 그것은 거주에 대한 모든 사회적 수요를 충족시킨다. 만약 작은 집 옆에 궁전이 솟아오르면 그 작은 집은 오두막으로 위축된다”고 했다.

이웃 효과와 ‘기 민주주의’

“부자란 그의 동서(아내의 여동생의 남편)보다 더 많이 버는 사람을 가리킨다”는 헨리 루이스 멘켄의 말도 가슴이 와 닿는다. 실제로 미국에서 이뤄진 조사에 따르면 여동생의 남편의 소득이 자기 남편의 소득보다 많은 여성은 그렇지 않은 경우에 비해 취업할 확률이 20% 더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 경제 칼럼니스트 윌리엄 번스타인은 이를 ‘이웃 효과’로 부르면서 인터넷을 비롯한 현대적인 원격 통신이 ‘이웃 효과’의 국지적 본성을 소멸시키고 있다는 점에 주목했지만, 이는 한가하기 짝이 없는 미국 이야기다. 한국은 인터넷 이전부터 늘 이웃과 부대끼지 않고선 살아갈 수 없는 나라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런 고밀도 덕분에 세계적인 인터넷 강국으로 등극했으니 ‘이웃 효과’는 한국적 삶의 알파요 오메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의 학부모들이 오직 자식 사랑 때문에 자식에게 좋은 간판을 요구하는 건 아니다. 이웃에게 기죽지 않으려는 심리도 적잖이 작용한다. 요란한 간판과 플래카드를 내거는 심리도 ‘기싸움’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한국 정치가 ‘기의, 기에 의한, 기를 위한’ 싸움을 하는 ‘기 민주주의’라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간판주의는 학벌주의의 다른 이름이다. 한국에선 서울대와 관련되는 모든 사건이 뉴스가 된다. 서울대 등 수시합격자를 알리는 한 고등학교 플래카드. (사진/ 류우종 기자)

한국인들의 지극한 명품 사랑도 일종의 기싸움이다. <서울신문>은 세계적인 명품업체들이 첫 출시를 한국에서 하는 이유에 대해 국내 한 명품 정보 사이트의 전문가의 분석을 소개했다. “똑똑한 소비자와는 거리가 멀죠. 아무리 명품이라도 품질 등 조건을 따지는 유럽 소비자와 달리 브랜드 프리미엄만으로 너도 나도 구매를 하니, 한국만큼 안전하고 매력적인 시장이 어디 있겠습니까. 당연히 몰려올 수밖에 없죠.”

아니다. 똑똑한 소비자다. 명품 사랑의 이유가 ‘주목’이며, 유럽인들에게 주목받으려는 게 아니라 같은 한국인들에게 주목받으려는 게 아닌가. ‘명품 대중화’에 반발한 상류층, 즉 ‘노노스족’ 또는 ‘신명품족’이 일반 소비자는 몰라보고 이른바 ‘선수’들만 알아보는 브랜드를 찾아내 사용하는 데에서 쾌감을 느끼는 것도 ‘이웃 효과’ 때문이 아니겠는가.

“당신은 주목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말도 있지만, 그건 당위일 뿐 현실은 아니다. 주목은 쟁취의 대상이다. 한국인은 주목 투쟁의 전사들이다. 최근엔 황우석 전사가 충격적인 사건의 주인공이 되었지만, 그는 너무 극단으로 치달았다는 것일 뿐 예외적인 한국인은 결코 아니었다.

간판은 포장 심리다. 주목 투쟁은 포장 투쟁이다. 한국의 근현대사는 불확실성의 질곡으로 점철된 시대였기에 한국인들은 본능적으로 불확실성에 대한 공포감을 갖고 있다. 그래서 불확실성을 제거하는 데 도움을 주는 종교, 위계질서, 신분증 문화가 발달돼 있다. 간판은 불확실성 제거의 표지이기에 요란할수록 좋다.

속전속결주의의 이면엔 바로 이 불확실성에 대한 공포가 자리잡고 있다. 다른 것에 대한 공포는 동질성을 찾고자 하는 시도로 이어지고, 이게 연고와 배짱과 코드를 융성케 한다. 또 이게 같은 간판을 가진 사람들의 결속력을 높여주기 때문에 이왕이면 좋은 간판을 가져야 할 결정적인 이유가 된다.

좋은 간판을 가진 사람들에게 물어보라. 가장 우선적인 효용이 무엇인가? 안도감이다. 자기 확인이다. 요란한 간판을 내건 상인들도 똑같은 말을 한다. 간판 문화 개선을 위해 발벗고 나선 한나라당 이계진 의원은 상인들에게 큰 간판을 달아야 장사가 잘된다는 건 ‘오해’라는 것을 이해시켜드려야 한다고 했지만, 상인들이 그걸 모를 것 같진 않다. 간판은 자기 존재 증명이다. 인정 투쟁이다. 장사가 잘되면 좋지만 안 되더라도 “나 여기 있다”라는 걸 알리는 일을 소홀히 할 수는 없다.

‘서울대 간판’ 중독증을 어찌할까

눈과 귀는 따로 놀지 않는다. 언제 어느 곳에서건 자기 감정 발산을 자유롭게 하는 한국인들의 큰 목소리가 낮아질까? 그게 낮아지지 않는데, 시각적인 간판 문화만 홀로 바뀔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혈압 올려가며 국가주의·민족주의 비판하는 지식인들도 어느 낯선 나라의 공항에 내려 시선을 압도하는 한국 재벌들의 대형 광고판을 보면 묘한 안도감을 느낀다지 않는가.

그래서 지금과 같은 간판을 그대로 두자는 건가? 아니다. 간판 문제가 지극히 한국적 현상임을 인식하면서 전 분야에 걸쳐 주목의 기회균등과 공정거래의 원칙에도 눈을 돌려보자는 뜻이다. 예컨대 언론의 서울대 보도를 보라. 우리는 다음과 같은 신문기사 제목들을 당연하게 여길 정도로 간판 중독증에 빠져 있는 건 아닌지 자문해볼 필요가 있다.

“탈북자 최초로 서울대생 나온다” “56년 만에 첫 서울대 합격 강원 평창고 ‘경사 났네’” “전교조 해직교사 출신 40대 서울대 교수 됐다” “올해 서울대 10명 이상 합격 전국 60개 고교” “서울대 교수님 강의 맞아?: ‘가슴 작은데 브래지어 필요한가’ ‘김태희는 비싸다’…” “소녀가장 서울대 들어가다”.

서울대 총장이 기침만 해도 뉴스가 되고, 자신이 살고 있는 아파트가 ‘아파트 브랜드’를 알리는 대형 광고판 노릇을 하는 걸 긍지로 여기며 살아가는 사회에서, 발버둥에 가까운 주목 투쟁을 벌이는 조무래기 간판들만 문제 삼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간판 공화국’의 신민다운 이해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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