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소시효 없는 중대한 인권침해 사건, 김대중 정부에서 피해구제 실현될 것인가
‘의문사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에 따라 지난해 10월 출범한 대통령 직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위원장 양승규)는 최근 비전향장기수의 옥중의문사 사건과 공권력의 개입에 의해 사망했을 가능성이 높은 실종 사건까지 조사대상에 포함시키는 결단을 내렸다. 영원히 역사속에 묻혀버렸을 수도 있는 사건들이 햇빛을 보게 된 셈이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이어 1월27일 5공 초기에 있었던 삼청교육대 사건의 희생자들이 의문사에 해당되는 지 여부에 대해서도 직권 조사키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진상규명위는 곧 개별 희생자들에 대한 기초조사에 들어갈 방침이다. 비록 늦은 일이긴 하나 정부쪽에서 그동안 아예 논외로 뒀던 삼청교육대 사건을 일단 위법한 공권력 행사로 사실상 인정했다는 점에서 반가운 일이다.
“왜 끌려갔는지”조차 모르겠다
그러나 삼청교육대 사건의 경우에는 오는 3월 첫주 진상규명위원회가 정기회의에서 직권조사 대상자를 결정하더라도 당시 교육 현장 사망자 등 일부에 국한될 가능성이 커 사건 희생자 및 유족들의 반발 속에 김대중 정부의 인권지수를 되묻게 하는 또하나의 논란거리로 여전히 남게 될 것으로 보인다. 인천에 사는 박춘화(56)씨는 마흔살 때부터 2남1녀를 혼자 키워왔다. 남편 김정웅(1985년 사망)씨가 삼청교육대에 끌려갔다가 돌아온 뒤 그 후유증으로 세상을 일찍 떴기 때문이다. “1980년 8월 어느 날 새벽 남편이 일 때문에 집에 들어오지 않았는데 무장군인 두명이 담을 넘어와서 다짜고짜 남편을 찾는 거예요. 얼마나 놀랐는지…. 다음날 동네 파출소 방범대원이 남편에게 파출소까지 가자고 해 따라간 게 시초였어요. 경찰서로 넘겨진 남편은 부천 33사단으로, 또 전방부대로 옮겨다니면서 혹독한 군사훈련을 받았대요. 몇달이 지난 뒤 돌아온 남편은 온몸이 피멍이 들어 시름시름 앓는데다 각혈까지 했죠. 돈이 없어 병원에 갈 엄두도 못 내고…. 다리가 마비되면 밤새 주물렀어요. 술 마시고 아이들한테 삼청교육 가르친다면서 머리를 땅바닥에 박게 하고 팔을 등 뒤로 들게 한 뒤에 ‘야, 이 새끼들아 그것도 못해’하며 고함을 지를 때면 정말 죽고 싶더라구요.” 남편 김씨는 결국 결핵에 정신분열증 증세까지 겹쳐 5년 만에 숨졌다. 박씨는 막노동으로 혼자 아이들을 키웠다. 그러나 눈물로 지새워온 세월을 더욱 한스럽게 하는 것은, 정부가 세번이나 바뀌면서도 명예회복은커녕 왜 끌려가게 됐는지 등 진상규명조차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는 점이다. 서울 서초동에서 사업을 하고 있는 박광수(50)씨 역시 삼청교육대 피해 가족이다. 박씨의 동생 이수(46)씨는 1980년 당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형의 사진관에서 일하던 중 우연히 서울 동대문운동장에 놀러갔다가 암표상으로 몰려 삼청교육대로 끌려간 경우다. “한달 만에 집으로 돌아온 동생은 가족을 몰라볼 정도로 정신이상 증세가 심했어요. 국립정신병원에 입원시켰다가 지금은 경기도의 한 기도원에 평생토록 맡긴 상태입니다.” ‘쿠데타 대선배’인 박정희가 가르쳐준 것
암호명이 ‘독수리작전’이었던 삼청교육은 1980년 8월4일 국가보위입법회의(국보위·상임위원장 전두환)의 ‘사회악일소 특별조치’ 발표로 시작됐다.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뒤이어 불량배 검거를 내용으로 한 계엄포고령 13호를 발표했고 국보위는 폭력사범, 공갈·사기사범, 사회풍토 문란사범이 주요 단속대상이라고 밝혔다. 국보위는 내부적으로 검거자들을 4가지 유형으로 나눴다.
A급은 폭력 실형전과 2범 이상과 강도·절도·마약 현행범 등으로 이들은 군사재판에 회부되거나 검찰에 송치됐다. B급은 폭력·강도·밀수·정치·경제 사건 전과자로서 재범의 우려가 있는 이들과 이에 준하는 자, C급은 우발적인 범죄자 또는 범죄사실이 경미한 자로 규정됐다. D급은 대부분 학생이나 소년들로 서약서를 받고 훈방조처했다. 삼청교육을 받은 이들은 주로 B급(수개월∼6개월), C급(4주)으로 분류된 이들이었다. 군부대 안에서 이뤄진 삼청교육을 마친 이들 가운데 많은 수가 근로봉사대라는 이름의 강제노역에 동원되거나 2∼3년씩의 보호감호 처분을 받는 등 불법장기구금 피해를 입었다.
문제는, 이같은 분류법이 법률에 의한 것이 아니었을 뿐 아니라 실제 극도로 자의적인 잣대로 운용되었다는 데 있다. 검거과정에서 국보위는 전국 각 경찰서에 검거 숫자를 할당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러다보니 계엄포고령이 밝힌 단속대상과는 무관한 이들이 마구잡이식으로 붙잡혀갔다.
몸에 문신이 있으면 무조건 폭력사범, 밤에 술을 지나치게 마시면 사회풍토 문란사범이 되는 식이었다. 관련 전과자는 재범의 우려가 없더라도 잡아갔다. 지방에서는 지역토호들을 반대했던 이들이 교육대상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심지어 경찰관과 개인적인 원한이 있는 이들이 붙잡혀가는 수도 있었다.
이같은 강제처분과 분류법은 사실 전두환이 처음 고안해낸 것은 아니었다. 전두환은 군사쿠데타의 대선배인 박정희가 5·16 이후 아무런 법률적 근거없이 만들었던 ‘국토건설단’을 흉내낸 것에 불과했다. 국토건설단 역시 불량배, 부랑인, 군기피자 등이 주요 검거대상이었으며, 이들은 A, B, C급으로 나뉜 등급에 따라 군법회의에 회부되거나 건설사업에 강제로 투입됐다.
어쨌든 삼청교육 대상자들은 군부대 안에서 구타와 체벌 위주의 군사훈련을 받아야 했다. 사건의 성격상 피해규모조차 정확히 집계되지 않았다. 다만 1988년 5공비리 특위 당시 국방부는 처음으로 삼청교육의 피해규모를 밝힌 바 있다. 교육 도중 사망자는 모두 54명으로 이 가운데 10명은 구타로, 3명은 총격으로 숨졌다. 전체 연행자는 6만7천여명이며 이 가운데 4만명에 가까운 인원이 삼청교육을 받은 것으로 드러났었다.
그러나 피해자들은 이같은 통계가 국방부의 공식발표였을 뿐 실제 피해규모는 이보다 훨씬 크다고 주장한다. 특히 사망자만 하더라도 수백명 이상으로 추산되는 ‘후유증으로 인한 사망자’를 포함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이같은 피해규모 때문에 삼청교육대 피해자들은 이 사건을 ‘삼청학살’이라고 부른다.
사법부, 정부 책임 인정 안 해
‘삼청교육대 인권운동연합’ 전영순 회장은 “삼청학살은 광주학살보다 더한 만행이었다”며 “광주에서는 총이나 돌을 들고 싸울 기회라도 있었지만 우리는 일방적으로 당했을 뿐 저항은 일체 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엄청난 피해가 실재함에도 이 사건이 홀대받는 이유는 무엇보다 정권 차원에서 볼 때 이 사건이 정치적으로 특별히 이용할 만한 가치가 없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많다. 5공화국에서 이뤄진 해직언론인·공무원 문제, 광주학살 문제, 시국사건 관련자 등 인권피해자들 대부분이 어떤 형태로든 과거청산 절차를 밟아가고 있는 현실을 보면 더욱 그렇다.
그동안 이 사건 피해자들의 문제가 논의된 적은 많았다. 1988년 5공 비리 청문회 당시에는 삼청교육 피해자들의 증언 등을 통해 실상 일부가 공개되기도 했다. 또 13∼15대 국회에서는 삼청교육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 및 배상법안이 의원입법으로 추진되다가 회기가 끝나 자동폐기되는 과정을 반복했다. 1988년 노태우 정부는 담화문을 통해 40일 동안 전국적으로 3200여명의 피해자 신고를 받기도 했다. 당시 국방부는 정부 단독의 특별법안을 만들겠다는 계획을 밝힌 바 있다.
피해자들이 개별적으로 국가를 상대로 한 소송에 나서기도 했지만, 1996년 대법원은 피해자들에게 최종적으로 패배를 안겼다. 기존 법률에 의한 피해구제도 요원하게 된 셈이다. 당시 대법원은 “노태우 정부의 담화문 발표가 국가의 배상책임을 승인한 법률적인 행위가 아니라 정치적인 시정방침을 밝힌 데 불과하다”고 판결함으로써 정부의 책임을 인정하지 않는 태도를 보였다. 이들 피해자들이 대한민국 입법·행정·사법부 모두로부터 버림받은 순간이었다.
서울지역 피해자들의 소송을 맡았던 백승헌 변호사는 “국가가 스스로 불법행위를 인정한 것을 두고 사법부가 이를 인정하지 않은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며 “정부는 지금이라도 특별법 제정 등의 정치적 결단을 내려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새 정부가 들어선 이후 김대중 정부에 기대를 걸었던 피해자들은 지난해 8월부터 석달 동안 매주 목요일마다 서울 용산 국방부 앞에서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그러나 야당 총재 시절부터 이들의 피해를 광주학살과 같은 성격으로 규정했던 김대중 대통령은 특별한 조처를 취하지 않고 있다.
인권전문가들은 국제인권법적 기준으로 볼 때 삼청교육대 사건은 공소시효가 없는 ‘중대한 인권침해 사건’에 속하며, 이 사건을 과거청산의 범주에 포함시키는 것은 우리 사회 인권 문제의 지평을 한 단계 높이는 의미를 지닌다고 강조한다. 민주화운동 관련자들의 인권만을 챙기는 정부라면 인권의 진정한 의미를 안다고 말하기 힘든 이유가 여기에 있다.
김창석 기자kimcs@hani.co.kr

사진/1980년 당시 군부대 안에서 이뤄진 삼청교육은 훈련이라기보다 조직적인 고문에 가까웠다.(보도사진연감)
그러나 삼청교육대 사건의 경우에는 오는 3월 첫주 진상규명위원회가 정기회의에서 직권조사 대상자를 결정하더라도 당시 교육 현장 사망자 등 일부에 국한될 가능성이 커 사건 희생자 및 유족들의 반발 속에 김대중 정부의 인권지수를 되묻게 하는 또하나의 논란거리로 여전히 남게 될 것으로 보인다. 인천에 사는 박춘화(56)씨는 마흔살 때부터 2남1녀를 혼자 키워왔다. 남편 김정웅(1985년 사망)씨가 삼청교육대에 끌려갔다가 돌아온 뒤 그 후유증으로 세상을 일찍 떴기 때문이다. “1980년 8월 어느 날 새벽 남편이 일 때문에 집에 들어오지 않았는데 무장군인 두명이 담을 넘어와서 다짜고짜 남편을 찾는 거예요. 얼마나 놀랐는지…. 다음날 동네 파출소 방범대원이 남편에게 파출소까지 가자고 해 따라간 게 시초였어요. 경찰서로 넘겨진 남편은 부천 33사단으로, 또 전방부대로 옮겨다니면서 혹독한 군사훈련을 받았대요. 몇달이 지난 뒤 돌아온 남편은 온몸이 피멍이 들어 시름시름 앓는데다 각혈까지 했죠. 돈이 없어 병원에 갈 엄두도 못 내고…. 다리가 마비되면 밤새 주물렀어요. 술 마시고 아이들한테 삼청교육 가르친다면서 머리를 땅바닥에 박게 하고 팔을 등 뒤로 들게 한 뒤에 ‘야, 이 새끼들아 그것도 못해’하며 고함을 지를 때면 정말 죽고 싶더라구요.” 남편 김씨는 결국 결핵에 정신분열증 증세까지 겹쳐 5년 만에 숨졌다. 박씨는 막노동으로 혼자 아이들을 키웠다. 그러나 눈물로 지새워온 세월을 더욱 한스럽게 하는 것은, 정부가 세번이나 바뀌면서도 명예회복은커녕 왜 끌려가게 됐는지 등 진상규명조차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는 점이다. 서울 서초동에서 사업을 하고 있는 박광수(50)씨 역시 삼청교육대 피해 가족이다. 박씨의 동생 이수(46)씨는 1980년 당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형의 사진관에서 일하던 중 우연히 서울 동대문운동장에 놀러갔다가 암표상으로 몰려 삼청교육대로 끌려간 경우다. “한달 만에 집으로 돌아온 동생은 가족을 몰라볼 정도로 정신이상 증세가 심했어요. 국립정신병원에 입원시켰다가 지금은 경기도의 한 기도원에 평생토록 맡긴 상태입니다.” ‘쿠데타 대선배’인 박정희가 가르쳐준 것

사진/피해자들은 지난해 국방부 앞에서 석달동안 시위를 벌였다.(이정용 기자)

사진/삼청교육대 인권운동연합 전영순 회장과 유영덕 의장.(김창석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