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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골리앗과 21세기형 파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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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12-21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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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완의 노동시대]

20세기 공격적 형태의 ‘창조 행위’가 지금은 ‘방어적 저항’으로
신자유주의 시대, 해고로 인한 ‘삶의 불안’에 맞서는 최후의 수단

▣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은 아파트를 소유하고, 자가용을 굴리고, 퇴근 이후 노조 집회에 참여하기보다 자녀 과외비라도 더 벌기 위해 잔업을 하거나 서둘러 가정으로 돌아가는 이기적 안락함을 추구하는 노동자가 되어버렸다.” 1990년 봄 골리앗 투사는 이미 잊혀졌고, 현대중공업 노동조합은 10년 넘게 무분규 사업장 신화를 이어가고 있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돈으로 산업의 평화를 산’ 회사 쪽이 더 많은 임금·복지를 제공하면서 ‘노동의 침묵’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성실한 교섭에 나서지 않는 사용자들

20세기는 ‘노동의 세기’였다. 전 지구적으로 선진 자본주의 경제든 신흥공업국에서든 파업의 물결이 일어났고, 노동의 전투성이 폭발했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1981년 항공관제사의 파업, 영국에서는 1984년 탄광노조의 파업이 결정적인 패배를 겪은 뒤 노동은 침묵으로 빠져들었다.

우리나라에서 파업은 1987년 노동자 대투쟁 당시 무려 3749건이 폭발했으나, 1995년에 100건 이하로 떨어지는 등 10여 년간 주춤했다. 그러나 2001년 235건, 2003년 320건, 2005년 11월 현재 268건 등 외환위기 이후 파업은 다시 늘고 있는 추세다. 대대적인 구조조정 속에서 고용불안에 내몰린 노동자들과 노동시장 유연화에 따라 급증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파업이 빈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 “민주주의는 공장 문 앞에서 멈춘다”고 했는데 과거의 파업이 임금뿐 아니라 작업장의 노동권 인정 등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싸움의 성격이 컸다면, 지금은 양극화 시대 ‘삶의 불안’에 맞선 투쟁이 새롭게 일어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한국에서는 21세기에도 왜 ‘최후의 수단’인 파업이 격렬하게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무엇보다 가족 이외에는 사회적 안전망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 사회에서 해고는 생계수단뿐만 아니라 삶 자체의 박탈을 뜻한다. 극단적으로 저항할 수밖에 없다. 또 기업별 노조는, 다양한 정치적·사회적 협상 수단을 동원할 수 있는 산별 노조와 달리, 파업이란 외길 이외에 사용자를 압박할 수단을 갖고 있지 못하다. 특히 우리나라 사용자들은 파업이 일어나도 정부가 ‘신속히 개입’해 공권력으로 해결해줄 것이라고 믿고 성실한 교섭에 나서지 않는다. 파업이 장기화될 경우에는 ‘제복을 입지 않은 공권력’이나 다름없는 용역깡패를 동원해 파업을 파괴한다. 용역깡패는, 파업을 ‘공안’ 차원에서 불온시하고 노동법이 아닌 형법에 의해 형사처벌하고 ‘고임금 노조의 배부른 파업’이란 이데올로기로 파업 때리기를 해온 정부의 노동 탄압에 힘입어 더욱 횡행하게 된다. 이렇듯 파업을 무조건 깨부수려 드는 사용자에 맞서 물리적 투쟁을 동원하지 않으면 사용자들은 교섭 테이블에조차 나오지 않는다.

1990년 골리앗 크레인에 올라가 농성을 벌이는 현대중공업 노동자들. 이들이 침묵하는 사이 21세기에 새로운 파업이 터져나오고 있다. (사진/ 한겨레)

그런데 이제는 돈 없이는 파업도 하기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 불법 파업이란 딱지가 붙으면 그 즉시 가압류·손해배상 청구서가 노조와 파업 지도부의 가정에 날아든다. 노동력은 다른 상품과 달리 저장되는 것도 아니고, 안 팔려 굶는 것보다는 저임금으로라도 팔아야 한다. 마찬가지로 작업장에서의 노동력 철수는 사용자뿐 아니라 노동자에게도 상당한 비용과 고통을 수반한다. 가족이 점점 더 배고픔에 내몰리면 노동자들은 다시 일을 시작할 수밖에 없게 된다.

게다가 불행하게도, 노동 소요가 빈발하고 있음에도 우리나라 노동조합은 ‘승리의 경험’을 잊은 지 오래다. 노동의 힘은 1987년 대투쟁과 1996년 말 노동법 개정 총파업의 승리를 거치면서 상당히 축적됐다. 승리에 대한 기대감은 그동안 파업을 이끈 원동력이었다. 그러나 외환위기 이후에는 ‘구조조정 반대’와 ‘거듭된 총파업 선언’만 되풀이했을 뿐 전투적 동원에 따른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했고, 장기화되는 투쟁에 조직적 피로가 누적되고 있다. 20세기 노동의 반란(파업)은 새로운 노사관계를 만들어내는 공격적 형태의 ‘창조 행위’였으나, 지금은 ‘방어적 저항’에 그치고 있다. 또 구조조정과 세계화라는 거대한 ‘시장의 흐름’을 상대로 한 싸움이기 때문에 사용자들에게서 양보를 얻어내기도 쉽지 않다.

‘골리앗’의 주역들이 침묵하는 동안…

사실 파업권은 노동과 자본의 타협의 산물이다. ‘분배’를 둘러싼 투쟁은 국가와 자본이 어느 정도 인정하겠다는 ‘갈등의 제도화’인데, 노동조합이 일단 허용되면 노조는 투쟁만 외치는 게 아니라 책임 있게 타협도 해야 하는 제도권 조직이 된다. 그래서 파업은 생산을 멈추는 것임에도 역사적으로 합법적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노조 지도부는 현장 노동자들의 불만과 파업 열망을 달래고 산업의 평화를 추구하는 ‘관리자’가 되기도 한다. 특히 노동의 힘이 과대해서 노동쟁의가 폭발하는 건 아니다. 노동의 힘이 강력할수록 쟁의 없이도 요구를 관철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한국 노동조합의 힘은 여전히 취약하다고 할 수 있다.

주목할 점은 급속히 고용이 늘어나는 비정규직·이주노동자·개인서비스 노동자들이, 대공장에 비해 작업장 교섭력이 취약한데도 새로운 파업의 거점으로 등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양극화 속에서 노동자의 경계가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핵심 노동자와 주변부 노동자로 갈리고 있지만, 노동 전투성의 진원지가 전통적인 자동차·섬유·철강산업 등에서 컨베이어벨트를 따라 주변부로 이동하고 있는 것이다. 현대중공업 조선 노동자들이 침묵하는 사이 21세기 새로운 파업이 터져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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